27화사냥꾼(1)
고립무원.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한화기의 마음속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가장 어울리는 말일 것이었다.
황량한 광야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한화기.
‘예상은 했지만… 맹공이 거세다. 첩년 자식이라 그런지 지독하군. 한번 잡은 기회를 놓을 생각을 않는다.’
언제 이렇게 달변가가 되었는지, 자신이 기습적으로 만들어 온 성과를 청중 앞에서 어필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조카.
괜찮았다.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마음속으로 각오했던 바였다.
비록 사우디에서의 쿠데타라는, 상상도 못 했던 변화구를 얻어맞았지만, 그는 충분히 재기할 여력이 있었으니까.
한쪽 손을 턱에 괸 채,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는 한화기.
마침내 머릿속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정리한 그가 결론을 내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는 독을 바른 단검을 한 자루 가지고 있었다.
선대의 비자금.
정적인 조카를 단 한 칼에 보내버릴 수 있는 무기.
그러나 이제 막 그 존재에 대해 꼬리를 밟은 만큼, 한화기에게는 아직 한 달이라는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크흐, 전략실장님께서 저희 탄약그룹에 계신 것 자체가 크나큰 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요! 연치도 젊으신 분이 벌써 이 정도신데…. 어떤 미래를 열어가실지 이 늙은이는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독무대의 막이 내리고, 그의 조카를 향해 쏟아지는 아첨의 말들.
동시에 임원들의 눈은 흘낏흘낏 한화기 자신을 향해 훔쳐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상황이 바뀐다면, 다시 꼬리를 흔들 것만 같은 모습으로.
‘밥버러지들이 눈치를 보는군. 아직 임원들이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정중앙을 바라본 한화기. 그는 조심스럽게 의장석에 앉은 서태후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같이, 도무지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보이는 차가운 빙벽. 비록 피가 이어진 어머니일지언정 숨이 막히는 존재였다.
작은아들에 대한 그 어떤 모성애조차 없는 것처럼, 오로지 원칙만으로 일관하는 그 모습.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후계자에 대한 평가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호평하는 건가? 저 첩 자식 놈에 대해?’
서태후가 두 후계자를 모은 자리에서 천명했던 시간은 석 달.
아직 절반의 시간이 남았으나, 그 안에 얼마든지 결정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법.
그리고 한화기의 그 불안감은, 서명희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말로 인해 현실이 되었다.
“잘했다. 전략실장. 수고가 많았다.”
“과찬이십니다. 할머니… 아니, 이사장님.”
“호언장담만 하고 내빼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꼴은 없지. 자네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로구먼.”
표정을 찌푸린 한화기.
굳어져 있던 석상에 금이 간 채 일그러져 내려앉듯, 애써 유지하던 평정심의 균형이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퉁명스러운 서태후의 발언.
그러나 한화기는 알 수 있었다. 그 속뜻에 담겨있는, 입 밖으로 마저 내뱉지 못한 극찬의 말이 무엇인지를.
‘빌어먹을… 설마 마음을 정한 건가? 벌써?’
조급함과 다급함.
겨우 스물다섯짜리 서출 조카 놈에게 밀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그런 생각 자체가 들었다는 것에 대한 수치스러움까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그 감정의 집합체는, 그의 품 안에 꽁꽁 감춰둔, 독 바른 단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게 하는 데 충분했다.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
선대의 비자금 카드.
한화기의 품속, 군데군데 이가 빠진 낡은 단검은 아직 날이 무딘 상태였다.
적어도 재무 본부에서 확실한 물증을 제시해야만 의미가 있는 상황.
외통수에 걸린 것만 같은 기분에 한화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일단 치명상을 입었다. 다시 판을 뒤집어야만이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수를 두어야 하지?’
수세에 몰린 한화기. 그러나 그가 부화뇌동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그저 깊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차분히 눈을 뜬 채로 대국을 복기하기 시작할 뿐.
바둑판 위, 조카의 검은 돌이 성큼성큼 다가와 압박을 가하고 있다.
순식간에 먹혀버린 자신의 영역.
그리고 마침내 이 상황을 끝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도전자의 손가락 끝에 승부수로 향하는 검은 돌이 쥐어졌다.
“이사장님? 이 자리를 빌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나. 전략실장.”
“이번에 사우디에서 일을 처리하고 나니, 새로이 보이는 것이 생기더군요. 가령… 그룹 내의 뿌리 깊은 안일함.”
흠칫 놀라는 표정을 애써 감춘 한화기.
분명 묘수(妙手)라 생각할 법한 돌이지만… 손끝이 조급함으로 떨리고 있다.
방향은 위지(危地)를 넘어 사지(死地)로 향하는 악수(惡手).
한화기의 눈은 대국 상대의 손끝에서 떠나지 못한 채로 그대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자리에 놓인 검은 돌.
“그 안일함은 이렇게 쉽게 해결할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리고… 내부의 쥐새끼들의 배만 불릴 뿐이지요.”
“자네 무슨 단도리라도 치고 싶은 모양인가 보구먼. 칼춤을 추고 싶은 게야?”
“이전에 있었던 KS 산업 횡령 건.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대대적인 내부 감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내부 감사라….”
악수(惡手).
하늘이 돕기라도 한 듯, 한서준 스스로의 목덜미를 조르는 자리에 놓인 검은 돌.
그 모습을 본 한화기는 마구잡이로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어리석은 놈! 아직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를 못하는 모양이로군. 끝을 보려고 했으나 그 수는 자충수다.’
판을 뒤집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따른 희열.
때마침 들려오는 서태후의 목소리 또한 한화기에게 기회를 주는 것만 같았다.
“…이것만큼은 재무 본부장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겠군. 이봐, 자네는 전략실장의 말에 어찌 생각하나?”
“내부 감사를 할 때가 되긴 했습니다. 저 역시 한서준 실장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뭐라…?”
눈썹 한쪽을 추켜올린 서명희 이사장. 전혀 예상치 못한 작은아들의 반응에 다소 놀란 모양이었다.
서둘러 말을 이어나가는 한화기.
“안 그래도 재무 본부 자체적으로 그룹 내의 기생충들에 대한 감사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간신히 잡은 기회였다.
놓쳐서는 안 되는, 가뭄의 단비 같은.
광야에서 떠돌던 이에게 무언가 흐릿한 신기루가 보이는 것처럼, 한화기의 눈에는 이성 대신에 충동이 깃들기 시작했다.
“한 달. 부디 한 달만 시간을 주십시오. 모든 것은 그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신감에 차올라 자신도 모르게 미소까지 지은 한화기.
방금 전까지 그의 조카 쪽에 붙기 위해 아첨을 떨던 임원들의 눈에 불안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이봐… 윤 전무. 이거 뭔가 되치기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너무 일찍 줄을 갈아탄 것 아닌가?”
“일단 좀 두고 보자고. 둘 다 살짝 거리를 두다가 한 달 후에 결과 보고 바로 수그리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보신을 위해 강한 쪽에 붙으려는 임원들의 추태가 속닥거리는 소리로 회의실 안을 가득 메웠다.
한화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한 달 후, 방금 놓인 자충수를 발판 삼아 자신이 모든 판을 주도하게 된다면, 이들은 금세 자신의 발아래 머리를 숙일 것이기에.
그러나…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덫에 걸렸군요.”
“그러게 말이다.”
그의 앉은자리 맞은편,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조용히 자신을 노리는 사냥꾼의 활시위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발목 아래 놓인 올무가 당장이라도 가죽을 찢을 만큼 자신을 휘감을 것이라는 사실을.
* * * *
고민이 되었었다.
이번 사우디 건을 통해 구미 화약 공장 폭발 사고의 수습까지 한꺼번에 성공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숙부의 영향력을 뿌리 뽑고, 내가 온전히 힘의 구심점이 되기에는 부족한 상황.
그룹 조간 회의를 40여 분 앞둔 그때, 구석수 탄약 증권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후우…. 선대 회장의 비자금. 한화기 재무 본부장이 그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무기로 실장님을 공격할 겁니다.’
세세한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곧장 상황에 대한 모든 판단이 섰다.
아버지의 비자금. 분명 이를 걸고넘어져 나를 공격하려는 시도일 터.
그리고 그 투박하고 불완전한 권모술수에는 마치 필적처럼 숙부의 심정이 담겨있었다.
조급함, 다급함, 불안감.
반드시 약속된 날짜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는, 숨 막히는 압박감까지.
그렇기에 자신이 있었다.
잘못된 자리에 자충수로 보이는 돌을 둔다면, 분명… 미끼를 물 것이라는 확신이.
“좋습니다. 존경하는 재무 본부장님께서도 저와 뜻을 함께해주신다니, 탄약그룹의 미래가 참 기대됩니다.”
과다한 자신감을 넘어 불필요한 자만심으로 비추어질 만큼, 혼신을 다해 혈기에 눈이 뒤집힌 젊은이를 연기했다.
사냥감은 숙부, 미끼는 나 자신.
내부 감사, 그 정도야 얼마든지 받아도 상관없었다.
아직 숙부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버지의 비자금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부 감사가 이루어지면, 피를 보는 것은 내가 아닌 숙부일 테니까.
“…기대되는군. 전략실장의 한 달 후의 모습이 말일세.”
다소 평판이 깎여나갈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놓아둔 덫에 걸린 숙부.
본인은 모를 것이다.
그저 자신의 편에 섰기에 지원해 주려고 마음먹은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그 사업에 어떤 부실과 횡령과 분식 회계가 있는지를.
그리고 거기에 연관되는 순간, 발을 뺄래야 뺄 수 없다는 것을.
“사냥감이… 자기 눈이 서서히 가려지는 줄도 모르나 봅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김원철 아저씨에게 간신히 들릴 정도로 말을 건넸다.
“함정에 빠지면 저렇게 되는 거야. 너도 나중에 저런 실수 안 하도록 배운다고 생각해.”
김원철 아저씨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나.
실수야 회귀 전에 실컷 한 것으로 족하다.
그저 지금은… 덫에 걸린 숙부를 피할 수 없는 구석까지 몰아붙여 숨통을 끊을 생각뿐이다.
“허면, 이제 슬슬 일어들 나지. 오늘 자 그룹 조간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허고.”
회의 종료를 알리는 할머니의 명에 다 같이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임원들.
먼저 문밖으로 나선 숙부의 뒷모습 바로 앞, 자신도 모르는 사이 덫 역할을 맡은 세 사람에게, 내가 시선을 옮겼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사장들. 하얗게 질린 얼굴의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저쪽은 가관이네요, 부실장님. 그래도 자기들이 무슨 사고를 친 줄을 알긴 하나 보죠?”
“내부 감사의 폭풍이 불면… 저 치들부터 나가떨어질 테니까. 오래간만에 감옥 가는 꼴을 보게 생겼어.”
마치 삼각형을 그리듯, 자기들끼리 모여 마주 본 그들.
행여나 누군가 듣는 이가 있을까, 목소리를 최대한 죽여 자기들끼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줄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그러니까, 이대로 가다간 우리 셋 다 어디 야산에 목매달고 시계추 꼴 되는 거라니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나누고 계십니까?”
“아. 거, 별일 아니니 방해하지 마쇼… 어, 어, 한서준 전략실장….”
마치 저승사자라도 본 듯한 그들에게, 나는 한마디 말만을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도망갈 쥐구멍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굳이 교수형 체험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