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사냥꾼(2)
어두운 밤. 마포구 양화진 공원 바로 앞의 한강 공용 주차장.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비 사이로 차량용 헤드라이트 불빛이 물방울 하나하나를 비추었다.
인적이 드문, 가장 구석진 자리로 서서히 움직이는 승용차 한 대.
이윽고 그르렁거리는 엔진음이 멈춤과 동시에 자동차의 시동이 꺼졌다.
“읏차, 여기는 뭐, 아무도 들을 귀가 없을 겁니다. 따라오는 놈도 없었고.”
운전대를 잡은 이는 탄약 건설의 나덕술 사장.
차량용 블랙박스의 SD 카드를 꺼내버린 그는 앞쪽 룸미러에 시선을 옮겼다.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뒷좌석에 앉아 팔짱을 낀 두 사람.
나덕술 사장은 자신과 똑같이 머릿속 수심이 가득한 그들 가운데 한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후우… 그래서 이제 어쩔 거요? 선배.”
“돌겠다, 증말. 한서준이 그 어린 노무새끼 때문에 진짜….”
초조함으로 잔뜩 부푼 배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은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블랙박스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하려던 말을 곧장 이어나갔다.
“한화기 그 양반도 그래. 갑자기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것이여? 뭔 내부 감사 타령이야.”
“하… 거, 보면 몰라요? 한서준이 잡아다 족칠 껀수가 있다는 거지.”
박한이 사장 옆자리에 앉은 조선 해양의 성원식 사장.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움켜잡은 그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니까 재무 본부 내부에서 직원들끼리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합디다.”
“소문? 무슨 소문 말이여?”
“그, 왜. 한서준이가 김원철 통해서 선대 회장의 해외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 그게… 한화로 1,000억 원 정도 된다 하는 식의.”
“뭣이여! 참말로 그런 게 있다고?”
물경 1,000억 원의 비자금이라는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박한이 사장.
거기에 해외 비자금인 만큼, 외환으로 되어 있기에 그 힘은 상대적으로 더 클 것이었다.
부담스럽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그를, 성원식 사장이 한 손으로 밀어내며 대답했다.
“없어도 있게끔 만들 위인이 한화기라는 사람 아니요? 나 같아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겁니다. 문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성원식 사장.
쏟아지는 빗방울은 유리창에 서린 하얀 김을 타고 물줄기를 남기고 있었다.
마치 그가 차마 겉으로 흘리지 못한 채, 그저 속으로 삭이고만 있는 후회처럼.
“후우… 주인댁 왕관 싸움에 내가 목매달게 생겼다는 거지. 여기 두 분 포함해서.”
“옘병할… 이래 죽나 저래 죽나 하여간 사주팔자도 드럽게 꼬였네….”
불편한 침묵.
탄식으로 가득 찬 이 대화를 듣다 못한 나덕술 사장이 핸들을 꽉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한서준이가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요? 설마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건에 대해 뭐 알고 있나?”
도망갈 쥐구멍이 필요하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던 한서준. 굳이 교수형 체험을 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얄미운 말까지 덧붙였었다.
하필이면 그 말을 건넨 타이밍은 내부 감사 이야기가 나온 직후였기에, 한번 만들어진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되짚어보는 세 명의 사장.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결론을 내린 이는 박한이 사장이었다.
“그건 아닐 것이여.”
“어째서….”
“사우디 건이야 사실 잭팟 아니었것냐? 시작은 뭐 방산 영업하러 갔겄지. 그러다 빈 살만인가 하는 아랍 코쟁이랑 어떻게 잘 엮인 것이고.”
막대한 성과를 얻어 온 사우디 왕자의 난이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행운의 결과라 여긴 모양이었다.
“근디 이거, 해수 담수화 요것은 그렇게 운빨로 될 문제가 아니여. 김원철이도 그건 못 했어야. 그러니 한서준이는 볼 것도 없고.”
“그래서. 선배 말은 그냥 끝까지 한화기로 가자, 뭐 그런 거요?”
“막말로 우리가 새가슴이라 잠시 팬티에 오줌을 찔끔 지린 것이지. 어쩌면 한서준이가 그냥 한 번 찔러본 것일 수도 있다니까?”
들판에 붙은 불처럼, 점차 확신으로 번져가는 추론.
머리끝에서 시작된 확신이라는 불꽃은 서서히 그들의 몸뚱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쩌면 박한이 사장과 나덕술 사장은 내심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자의든 타의든 끝까지 달려야만 한다는 것을.
억지로 들이킨 자기 최면에 취해 양손의 주먹을 꽉 쥔 박한이 사장.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는 앞자리의 나덕술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튼, 인자 우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 타부렀으니께, 앞으로 내리는 일은 없는 것이여. 강제로 떨어진다면 또 모를까.”
“하… 그래. 선배 말대로 합시다. 끝까지 한화기한테 붙다 보면 사고 친 거 덮을 기회라도 주겠지.”
“그렇지! 우리가 회장 배지 달아 주면, 1등 공신 아니겄냐? 절대 무시 못 할 것이여. 아무 걱정 말어.”
손바닥에 맺힌 땀을 양복바지 허벅다리에 닦아낸 박한이 사장.
힐끗 옆자리를 바라본 그가 동의를 갈구하듯 물음을 던졌다.
“허면, 성 사장은 어쩔 것인가?”
“…….”
“성 사장?”
대답이 없는 성원식 사장.
무언가 고민에 잠긴 듯,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박한이 사장의 팔꿈치가 그의 오른팔에 닿고 나서부터였다.
“무신 놈의 고민을 그렇게 하고 그러슈?”
“아아, 잠시 다른 생각을… 뭐라고 하셨소?”
“아, 한화기여 한서준이여? 여기서 책임질 것도 제일 큰 양반이 넋이라도 가출한 것처럼 왜 이런다냐?”
겉모습으로는 고심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원식 사장.
박한이 사장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오늘따라 유독 강단 없이 우유부단한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은 사정을 모르는 이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후… 이제 와 돌이킬 수 없는 문제 아니겠소. 박 사장님 말이 맞겠지.”
간신히 입 밖으로 꺼낸 대답.
그 모습을 지켜본 박한이 사장은 무언가 결심이 선 것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경쾌하게 내리친 그가, 조금 높아진 톤의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오케이. 그럼 각자 돌아가서 장부 싸악 정리합시다. 그 비자금인지 뭐시긴지 하여간 꼬투리만 잡았다 하믄, 내 바로 한화기한테 일러바칠 것이여.”
* * * *
비밀리에 이루어진 자리가 파하고 집에 돌아온 성원식 사장.
늦은 밤. 가족사진만이 덩그러니 걸린, 텅 빈 거실 너머의 베란다.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아가며 그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1,000억 원….”
작년 이맘때 즈음, 몸담고 있던 컨설팅 업계를 그만두고 탄약그룹으로 자리를 옮겼을 당시.
당시 회사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장부를 들여다보던 성원식 사장.
그때부터 지금까지 묘한 의문점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 비자금의 마지막 국내 정거장 노릇을 한 곳이… 탄약 조선 해양의 계좌였던 건가?”
그룹 내의 불필요한 계열사 간 거래의 흔적. 그 자금의 움직임은 국내에서 벗어나려 한 모습을 보였다.
때로는 외국 고객사에 지급해야 할 용역 대금으로, 또는 해외 자회사의 투자금 명목으로.
성원식 사장의 눈에 비쳤던, 자본이 이동한 흔적을 남긴 발자국.
마치 뱃사람을 홀린다는 인어처럼, 기억 속에 남은 그 발자국은 지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당장 타고 있는 배의 방향타를 정반대로 돌리라고.
“박한이나 나덕술은 선택권이 없지만… 나는 협상 카드가 있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그려 보는 성원식 사장.
한화기와 한서준. 두 개의 동아줄 가운데 단 하나만을 잡아야 한다.
보상과 위험성. 성공과 교도소 두 개를 저울에 올렸다 뺐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졌다.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노랫소리처럼 자신의 귓가를 스쳐 지나갈 때쯤, 마침내 결심을 마친 그가 줄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나온 오른손에는 어느새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후우… 성원식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곧장 받은 전화.
미리 기다리기라도 한 것일까?
상대방의 목소리에는 당연히 자신에게 연락할 것이라는 듯한, 어떤 확신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예. 맞습니다.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떨리는 목소리의 성원식 사장.
마침내, 고개를 떨군 그의 입술 사이에서 투항을 뜻하는 선언이 새어 나왔다.
“목이 매달리는 것보다는 쥐구멍에 들어가는 게 낫지 싶습니다. 아무쪼록… 직접 뵙고 말씀 나누었으면 합니다.”
* * * *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
전략실장 자리에 오른 후, 나는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서른아홉 평짜리 집을 하나 얻었다.
주거용은 아니고 주로 휴식 공간으로 쓰거나, 또는… 지금처럼 비공식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소파에 누운 채로 통화를 마친 나는, 탁자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백기 들고 항복한다네요. 역시 셋 중에 제일 똘똘한 양반이긴 합니다.”
“거, 봐. 내 예상이 맞았지? 얼른 만 원 내놔.”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미는 김원철 아저씨.
내기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자기가 이겼다며 우기고 있다.
“아니, 성원식 사장이 전화할 거라고 예상한 건 부실장님하고 저, 둘 다였잖습니까.”
“에헤이. 제일 빨리 말한 사람이 선인 거 몰라?”
“모릅니다. 그런 거. 그리고 내기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고요.”
“흐… 너무하네, 진짜. 만 원 주기 싫으면 야식이나 좀 시키던가. 여긴 근무 조건이 너무 가혹해서 문제야.”
마침 자정도 넘었고 배도 조금 출출하던 차였다.
모범 고용주를 지향하는 만큼, 나는 냉장고에 붙은 배달 광고지 몇 장을 김원철 아저씨에게 내밀며 말했다.
“성원식 사장 오는 대로 뭐라도 하나 시키십쇼.”
“족발 대짜 시킨다? 소주도 같이.”
“특대로 드셔도 됩니다. 아무튼… 오늘 조금 무리하긴 했는데 성과가 나와서 만족스럽네요.”
성공이 불러온 혈기.
그것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한 채, 자만심에 사로잡힌 어설픈 모습.
내가 한화기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었던 모습은 제법 잘 연기된 모양이었다.
“사실 난 한화기보다 우리 마귀할멈 반응이 더 걱정이었어.”
탁자에 광고지를 내려놓은 김원철 아저씨가 무언가 조금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딱 보니까 네 평판이 조금 깎인 느낌이더만. 조급해하는 연기가 지나치게 잘 먹혔다니까.”
분명 나를 보던 할머니의 눈빛에는 약간의 실망감이 담겨있기는 했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는, 모두를 속여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했던 리스크.
비록 위험성은 높았으나, 과실은 달콤했다.
“대신 튼튼한 덫을 놓았으니까요. 내부 감사 준비하면서, 숙부는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건도 알아차릴 겁니다.”
아버지의 비자금.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이 두 뜨거운 감자는 탄약 조선 해양이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질 거예요. 어찌 되었든, 재무 본부장 직위에 있으면서 횡령과 분식회계를 못 잡아낸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화기가 이라크 건을 대놓고 덮을 것이다?”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에 추가 자금 집행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덮을 겁니다. 그때쯤 된다면….”
그 순간,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제 주인이 가진 불안감이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커져 오던 발소리가 멈추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에 망설임을 한껏 담아 누른, 경쾌한 사냥의 알림음이.
“뭐, 본인도 알게 되겠죠. 이게 함정이었다는 것을. 올무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