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사냥꾼(3)
-딩동! 딩동!
많이 다급한 듯 연달아 울리는 초인종 소리.
하기야, 나 같아도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건에 대해 가장 책임이 큰 성원식 사장이니까.
“애간장 좀 더 녹여 볼까요?”
“너무 또 사람을 궁지에 몰게 되면 괜히 다른 생각 한다니까? 슬슬 열어 줘라.”
일부러 1분여 정도 문을 늦게 열었다. 충분히 애가 타도록 만들기 위해서.
문 앞에 선 성원식 사장.
오다가 비라도 맞은 모양이었나 보다. 그의 양복 어깨 양쪽이 젖어 있었다.
“들어오시죠.”
“…감사합니다.”
때마침 타이밍도 적절하게 배달된 족발.
김원철 아저씨는 언제 넣어둔 건지 냉장고에서 소주 네 병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하이고, 어서 오십쇼. 저희는 또 투항군에게 맨입으로 뭐 무리한 거 해라 어째라, 그러지는 않습니다.”
김원철 아저씨의 찰진 손목 스냅에 생긴 소주병 속 회오리.
앞에 놓인 잔이 가득 채워지고, 그 안에 성원식 사장의 얼굴이 비쳤다.
고뇌에 파묻힌, 그래서 고통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이.
“특대로 시켰으니까 일단 좀 들고 이야기합시다. 보니까 오늘 식사도 못 하신 것 같구만.”
“…잘 먹겠습니다.”
일부러 굿 캅(Good Cop) 역할을 자처하는 김원철 아저씨.
타는 속에 술이 연거푸 들어가자 성원식 사장의 양 볼이 붉게 올라왔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고 나서야, 비로소 떨림이 줄어든 그의 손. 이제야 좀 차분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빈 소주병을 아래로 내리며 성원식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여기 오신 것만으로도 교도소 창가에 목이 매달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놀람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듯한 그의 표정.
동시에 낯빛에 비친 의구심.
과연 자신 앞에 앉아있는 내가 제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성원식 사장이 따르는 잔을 받으며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당장 올 한 해 분식 회계 처리한 분만 500억 원이 넘지요? 부실 공사야 말할 것도 없고.”
순간 단번에 술이 깨기라도 한 듯, 하얗게 질린 그의 낯빛.
잔을 쥐고 있는 내 손은 흘러넘친 술로 인해 차갑게 젖어버렸다.
이내 정신이 든 성원식 사장. 술병을 다시 바로 세운 그가 황급히 내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례했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상관없습니다. 닦으면 그만이니까요.”
나는 티슈 몇 장을 뽑아 손에 묻은 술을 닦아내며 성원식 사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세운 자신만의 방정식을 포기하는 듯한 그의 모습.
조금은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쉰 그가 내게 진정한 백기를 들었다.
“후우… 이미 전부 알고 계셨군요.”
“내 숙부님 되시는 분이 이라크에 추가 자금 집행을 고려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회장으로 가기 위한 치적을 쌓으려는 숙부.
겉으로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그 길이, 실상은 지옥으로 가는 가시밭길이라는 걸 모를 터였다.
성원식 사장은 아예 술을 자작하기 시작했다.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에 취기를 빌리지 않으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연거푸 석 잔을 비운 후에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부끄럽습니다. 사실 이라크 사업은 해당 지역의 리스크가 너무 컸습니다. 애초에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고요.”
“알긴 아시네요.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부실을 키우셨습니까?”
“…책임의 문제는 늘 행랑아범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1년 전, 탄약그룹으로 자리를 옮긴 성원식 사장. 외부인 출신인 그에게는 서로를 이끌어줄 선후배도, 등을 맞댈 동지도 없었다.
그렇기에 느껴지는 숨 막히는 실적 압박. 분명 어찌할 수 없는 부실이 눈에 밟혔음에도, 그는 손을 털고 일어날 수 없었다.
마치 전 재산을 탕진한 도박꾼이 그러하듯이.
“이번 건만 넘기면 된다. 다음번에 복구한다면… 해결될 일이라 여겼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조차 송구스럽습니다.”
“됐습니다. 어차피 이라크 관련 사업은 전부 손절 대상입니다. 그건 이제 제가 알아서 할 일이겠고요. 문제는….”
어차피 조만간 창궐할 ISIL(이슬람 국가) 때문에라도 이라크에서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출구전략으로 일관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 아까운 것이 있었다.
생각보다 영민한 성원식 사장. 내 쪽으로 노선을 정하고 나니, 이제야 본격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느낌이다.
객관적인 능력이야 외부에서 이미 검증이 끝난 상황.
부족한 내 인재 풀(talent pool). 이대로 숙청의 칼날로 베어버리기엔 아까운 남자다. 다만, 내 패로 쓰기에는 아직까지 확신이 부족한 그의 충성심.
나는 성원식 사장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쥐구멍. 성 사장님이 이제부터 들어가게 되실 쥐구멍에 대한 부분 아니겠습니까?”
“…….”
기어코 올 것이 왔다며 체념하는 듯한 성원식 사장.
쥐구멍. 최악이라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제외하고, 온전히 내게 자신의 처분을 맡기는 것.
마치 단두대 밑, 형틀에 묶여 목을 내뺀 사형수처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말없이 집행관이 내릴 판결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저는 꼭 이게 해외 도피나 집행유예 같은 누추한 옵션만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전략실장님?”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 성원식 사장.
해외 도피, 집행유예. 어쩌면 성원식 사장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단기 징역까지도 고려해 보았을 그였으니까.
그리고, 곧이어 성원식 사장의 귓가에 들려오는 내 목소리.
사형수의 손발에 묶인 쇠사슬이 풀리고, 벌겋게 부어오른 팔목에 기회라는 바람이 불어와 내려앉았다.
“수동적 투항이 아닌,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협력을 바랍니다. 성과를 내십시오. 그렇다면 그 쥐구멍. 제법 화려하게 꾸며 드릴 테니까요.”
“…구체적인 부분을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정확히 자신에게 어떤 것을 약조하겠냐며 묻는 성원식 사장.
나는 즉답 대신 그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제가 처음으로 이사장님께 꼭 집어 말씀드린 계열사들입니다. 왜 하필 이 셋이었을까요?”
가볍게 낸 시험 문제 하나.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듯, 성원식 사장이 망설임 없이 내게 대답했다.
“그룹 구조조정. 곧 다가올 돌풍에 대비하실 생각이셨겠지요. 일전에 말씀하신 미국발 금융위기. 그리고… 그로 인한 산업 구조 재편까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
성원식 사장이 가진 판단력에는 이의를 제기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그저 필요한 것은, 그를 내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통제력뿐.
이제 고삐를 씌울 차례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계열사 간 합병부터 불필요한 사업부 매각까지. 한꺼번에 도맡을 컨트롤 타워가 필요합니다.”
“전략실장님?”
나는 마지막 술병을 열어 빈 잔을 채웠다.
그저 무색무취의 투명한 술뿐만이 아닌, 형형색색을 띤 그의 욕망까지도.
“제게 충성심을 보여주십시오. 그 컨트롤 타워의 수장. 충분히 성 사장님이 되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 * * *
호텔 플로렌스.
맨 꼭대기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명희 이사장이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복잡한 듯한 그녀의 표정. 서태후는 일전에 있던 그룹 조간 회의에서의 모습을 떠올리자 곧 미간을 좁혔다.
‘한서준이 이놈이 무슨 생각인 게지? 단순히 아직 제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것인가?’
갑작스럽게 칼춤을 추려고 들던 손자. 가장 이상했던 부분은 KS 산업 건을 포함한 그룹 내부의 감사 시도였다.
분명 실익을 따져 덮기로 했던 것이었던 것만큼, 대뜸 그것을 다시 꺼낸 것 자체가 이상했던 상황.
아무리 제 숙부가 궁지에 몰렸다고 한들, 너무나도 어설픈 상식 밖의 공세였다.
‘골치가 아프군. 이리된 이상 내 막내아들 놈에게도 기회를 줄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손주의 급발진에 간신히 국면 전환의 기회를 잡았던 한화기.
재무 본부장 직위에 있는 만큼, 그룹 내부 감사를 둘러싼 전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 상황.
천천히 카펫 위를 걸어가던 서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서준이 이놈이 조급함에 이끌려 무리수를 둔 게로군. 허나, 그것 또한 제 실력일 터. 이 늙은이는 그저… 원칙대로 정하면 그만이다.’
무언가 찝찝함이 남은 채 내려진 판단.
당장 있을 문중회 일정 탓에 깊게 고민할 겨를이 없는 서명희 이사장은 단편적인 판단을 내렸다.
자신이 보지 못한, 좀 더 큰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그저 막연한 직감으로만 느낀 채로.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간만에 뵙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내실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서태후. 그녀의 귓가에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가슴팍에 문중회장 배지를 달고 있는, 마흔 정도쯤 되어 보이는 남자.
얼마 전, 문중회에서 새로이 선출된 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자는, 특유의 어리석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제 문중회장 씩이나 되는 사람이 뭣 하러 굳이 미리 나와 있나?”
“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셨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그룹의 기둥 그 자체라고요.”
뒤이어 서태후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
피로 짜인 실뭉치로 허수아비 아들을 조종하는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이사장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룹 내부가 바삐 돌아간 만큼, 문중회도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요.”
“그리 보입니다. 이렇게… 본인 대신 아들을 문중회장 자리에 올리실 줄도 몰랐고요.”
한덕술 문중회 명예고문.
분명 예전에 비해 힘을 잃었다고 판단되었던 자였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인 같은 그는, 서태후 자신에게 차기 회장 선택에 대한 압박을 넣고, 뒤로는 서서히 문중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허허… 문중 어른들이 저희 큰놈을 어여삐 봐주신 모양입니다. 철식이 이놈, 이제 네가 한씨 가문에서 큰일을 맡아야 하는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룹 지배 지분의 약 4분의 1가량을 쥐고 있는 문중회.
비록 소유권은 문중 구성원 개개인이 가지고 있었으나, 중요한 의결권의 경우 문중회 대표가 이를 도맡아 행사했기에 그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막대했다.
그룹 안팎의 일로 머리가 복잡해진 서태후.
그렇지 않아도 후계 구도 때문에 심란했던 차에, 문중회의 의사결정권자마저 변해버렸다.
고차방정식으로 변한 계산 공식. 자리에 앉아 대응 방법을 고심하던 그녀의 눈에 또 다른 변수 하나가 들어왔다.
“제까짓 게 최선을 다해봐야 뭣 해? 쓸데없이 사고 칠 바에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
흰 수염을 늘어뜨린 채, 검은 두루마기 한복을 입은 노인장.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의 그는 지팡이를 들어 풋내기 문중회장을 가리키며 푸짐한 독설을 이어나갔다.
“파업해도 좋으니 훼방이나 놓지 마라! 한형민이 네놈은 문중회장보다 말단 노조원 자리가 더 어울린다, 이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