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문중회(1)
지팡이를 휘두르던 괴팍한 노인. 그의 이름은 한율산 전 문중회 간사였다.
이제는 고인이 된, 선대 회장을 몹시 아끼고 수면 아래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자.
그는 마치 못난 아이를 훈육하듯, 한형민 문중회장을 향해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차후 주주총회 의결 과정에서 네놈이 무슨 헛짓거리를 하려고 드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을 게야!”
“아이, 참. 당숙 어르신.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사람들도 다 듣고 있는데, 창피하게….”
걸걸한 쇳소리 같은 목청으로 노기를 뿜어대는 한율산 전 문중회 간사.
그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한덕술 명예 고문이 뒷짐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아이고, 율산이 형님, 평소 얼굴 보기 어려우시던 분이 어인 일로 예까지 올라오시고.”
“하! 정녕 몰라서 묻는 게야?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검은색 두루마기 자락을 흩날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 한율산 전 간사.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성난 목청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는 위압감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덕술이 자네. 문중회 식구들에게 헛바람 집어넣었다지? 상하이에서 돈놀이하는 놈들 끼고 지분 가치 튀겨먹자고.”
“크흠….”
얼마 전, 자신의 아들 한형민을 문중회장으로 만든 한덕술 명예 고문.
그가 한씨 집안 문중에 내민 당근은 문중회의 그룹 지배력 강화였다.
상하이 사모펀드. 그들을 통해 저평가되어있던 지배 지분의 가치를 높이자는 제안.
자칫하면 그룹 지배 지분이 외국계 사모펀드로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 한율산 전 간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 들개 떼거리 같은 작자들하고 붙어먹으면, 그룹의 뿌리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 아나, 모르나!”
“허허… 형님도 참. 너무 예전 사고방식에 갇혀 계십니다.”
사람 좋은. 아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띤 채, 양손으로 지팡이를 든 팔을 잡은 한덕술 명예 고문.
그는 반드시 이 성난 사촌 형님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비록 힘 빠진 호랑이인 한율산 전 간사였지만, 아직 문중회 내부 영향력만큼은 상당했기에.
“잠시 힘을 빌리자는 겝니다. 한씨 집안 문중 전체가 좀 더 풍요로움을 만끽하게끔 말입니다.”
“말은 잘 허는군. 혓바닥 안쪽에 숨겨둔 날붙이도 시뻘겋게 독이 올라 있고. 사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넨 변한 게 단 하나도 없어.”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 탓일까?
조금 지친 모양인지 지팡이에 몸을 기대는 한율산 전 간사.
몸에 남은 모든 힘을 거의 다 쓰고 탈진해버린 것만 같은 모습. 부릅뜬 눈에 여남은 기력을 다한 그가 입을 열었다.
“내 경고하지. 문중회 의결권, 그걸로 세력 키워서 시답잖은 짓거리하려는 것, 내 다 알고 있다고.”
“아이고, 형님. 오해이십니다. 무슨 그런 황망한 말씀을….”
적당한 달램으로 위기를 넘기려는 한덕술 명예 고문.
그런 그에게 한율산 전 간사는 목소리를 낮춘 채로 비수 같은 말 한마디를 던졌다.
“YSS정밀, 영일금속, BT화학.”
“……!”
탄약그룹에 부품과 원재료를 납품하는, 중견기업 규모의 1차 하청업체 목록.
열거되는 기업 이름에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변한 한덕술 명예 고문의 얼굴.
애써 덧씌운 가면 위, 이마 자락부터 턱 끝까지를 가로지르는 실금 하나가 그의 어색한 미소를 갈랐다.
“세 회사 모두 대주주 지분율 변동이 있더군. 형민이 이 얼치기 놈이 문중회장이 되고 나서 곧바로.”
“…….”
“사모펀드 통해서 익명으로 작업하면 내 모를 줄 알았나?”
갑작스레 허를 찔린 한덕술 명예 고문. 길게 심호흡을 한 그는 곧 다시 정신을 차린 듯, 갈라진 가면을 다시 이어 붙였다.
“허허허… 이거, 참. 억울합니다, 형님. 저는 일절 모르는 일입니다.”
“헛소리! 분명히 말하지. 내 지켜보고 있다는 것, 절대 잊지 마라.”
찜찜하게 갈무리된 총성 없는 격돌. 두 노인의 눈에 비친 안광이 허공 어딘가에서 맞부딪혔다.
싸늘한 냉기가 맴도는 가운데 예의라는 겉껍질을 뒤집어쓴 결별.
“크흠, 그럼 저는 이만. 서로 말씀들 나누시죠.”
한덕술 명예 고문은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며, 이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침묵이 깃든 복도 안.
한율산 전 간사는 처음부터 이 갈등을 지켜보고 있던 서명희 이사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 * * *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사장님. 간만에 뵙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만.”
“저야 잠시 자리만 맡고 있을 뿐입니다. 후계자 선정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문중회 내부의 알력 다툼에 미간을 찌푸린 서태후.
비록 그룹 내부와 문중회는 상호 불간섭이 원칙이었음에도, 그녀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아직 후계자에 대한 확답을 듣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인지요?”
“…….”
그렇지 않아도 후계 구도 때문에 복잡하기 이를 데 없던 그녀의 머릿속.
귓가에 들려오는 한율산 전 간사의 뼈 있는 말에, 서태후는 현 상황을 정리할 여유조차 없어진 모양이었다.
결국, 장고 끝에 내뱉은, 유보의 뜻을 담은 발언.
“…어느 한쪽이 조금 우세하기는 합니다만, 무어라 확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약속한 날까지는 좀 더 지켜봐 주시죠.”
“이사장님 안목이야 월등하시니 어찌 결정되든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만, 염려되는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끝자락에 단서를 붙이는 한율산 전 간사.
분명 그는 문중회의 이익보다는 그룹 전체의 생존을 중요시하긴 했다.
그러나 최근 그룹 내부 사정에 어두웠기에, 그 염려가 가리키는 방향은 다소 어긋난 곳을 향하는 듯했다.
“그룹이 바람 앞에 놓인 촛불 꼴이 된 작금의 시기. 이 늙은이 생각에 불필요한 모험은… 굳이 필요한가 싶더군요.”
“…….”
“크흠, 이거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으시고 부디 괘념치 마십시오.”
서명희 이사장의 권한을 다소 침범했다 느끼기라도 한 모양일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한율산 전 간사. 그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서태후.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녀가 전화기를 꺼내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다.
“차량 준비하게. 지금 가지.”
자동차 뒷좌석에 올라탄 서태후.
한강 다리 너머 탄약그룹 본사를 향해 가는 동안, 차 안에는 오직 고뇌로 칠해진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마음은 손주 쪽으로 기울고 있었건만, 선택을 내리기엔 제반 여건이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
손을 턱에 괸 채 바깥 풍경만을 보던 서명희 이사장.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입에서 탄식에 가까운 말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후우… 손주 놈 앞길에 순 가시밭길만 깔려 있구먼.”
* * * *
확실히 성원식 사장은 영민했다.
내게 백기를 든 후, 그가 가장 먼저 내보인 것은 곧장 탄약 조선 해양의 모든 장부를 정리한 것이었다.
오피스텔에 오기 전, 미리 준비해둔 자료들.
‘급한 대로, 제가 기존에 알던 부분만 우선 모아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버지가 만든 비자금이 해외로 향할 때, 최종 관문으로의 역할을 한 흔적들.
자칫 외부로 흘러나갔다면, 내게도 심대한 타격이 있을 뻔한 내역이었다. 당장이라도 확인해야만 하는 상황.
‘일단 저희 쪽에서 처리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장부는 따로 건들지 마시고 지시가 있기 전까지 그대로 두십시오.’
그렇게 나와 김원철 아저씨는 그 즉시 성원식 사장을 보낸 후, 곧바로 예정에 없던 밤샘 작업을 시작했다.
모든 판단이 마무리되고 얼추 방향성에 대한 결론이 나온 것은, 새벽녘 이슬이 창가에 맺힐 때쯤이었다.
“그래서 이건 8888계좌 쪽으로 감추면 된다 이거야. 폭파 두어 번 거치고 나면 깨끗하게 기록이 세탁될 겨.”
“좋습니다. 이따 출근하시는 대로 유세나 과장 쪽 통해서 진행하라고 지시해 주세요.”
“어우야, 눈만 붙이고 바로 또 나가야겠네. 아마 시급으로 따지면 난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것일 거다.”
악덕 고용주와 함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하루.
나 또한 피로감이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한 상황.
나는 보고 있던 장부를 탁자 위에 내려두고는 그대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직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비자금 때문에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레? 내부 감사 가지고 한화기 발목에 올무 씌우자던 계획을 누가 생각했드라?”
“…그러게요. 사서 고생하는 거라 할 말이 없네요.”
어느새 김원철 아저씨의 배 속으로 사라져 버린 특대 사이즈 족발.
나는 냉장고에서 남은 소주병 하나를 마저 뜯고는 술로 타는 속을 달랬다.
“크흐, 그나저나 슬슬 비밀번호 쪽도 공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숙부가 비자금을 타깃으로 삼았으니 빨리 손을 쓰는 게 나을 텐데요.”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했는데… 조금 문제가 있어서. 이게 나도 골치 아프다야.”
아버지가 남긴 비자금, 그 남은 반쪽 조각인 비밀번호.
술잔에 소주를 가득 채운 김원철 아저씨가 무언가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문중회 알지? 너희 한씨 집안사람들.”
“여러모로 피곤하신 분들 아닙니까. 문중회 내부에서 복닥거리시느라 공사가 다망하시고요.”
회귀 전, 내가 허수아비 회장 자리에 올랐던 당시. 문중회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있었다.
아무리 고기 방패로 쓸 일회용품 애송이일지언정, 회장이라는 왕관의 무게를 버틸 재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그 판단은 지극히 타당했고.
“지금도 아마 차기 회장 자리에 누가 오르느냐에 관심이 지대하실 겁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들 하시겠지만.”
“크흐, 벌써부터 자기들끼리 김칫국 마셔가며 난리도 아니지. 일단, 문제는 말이다….”
소주잔 가득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켠 김원철 아저씨.
옷소매로 젖은 입을 훔친 아저씨가 난감하다는 듯이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하필이면 그 문중회 김칫국 영감님들 중 하나가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걸랑.”
“포섭이 쉽지 않으신 분인가 봅니다.”
“일단 문중회 쪽은 내 영향력이 한계가 있거든. 아무튼, 이래저래 여러 루트로 알아는 봤는데, 좀 꽉 막히신 분이야. 일종의 뭐랄까, 왕 꼰대? 괴팍한 훈장님?”
나는 머릿속으로 문중회에 영향력이 있는 영감님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비자금 비밀번호를 받았을 정도라면, 분명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일 가능성이 클 터.
“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나, 마땅히 이렇다 하고 떠오르는 사람은 없는 상황.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스물다섯밖에 안 되는 네가 영 탐탁지 않은 거지. 어쩌면 한화기 쪽을 더 선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야.”
“일단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영감님이 누굽니까?”
“그 양반의 이름은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