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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33화 (33/300)

33화자폭 버튼(2)

-찌르르르르! 찌르르르르!

한적한 시골의 여름밤.

정원 소나무 등허리에 매미 한 마리가 붙은 모양이었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김원철은 한율산 전 간사가 따르는 막걸리를 두 손으로 받았다.

“아이고, 어르신. 저 어제 끝내주게 마셨었는데. 여기서 더 마시면 위장 박살나게 생겼거든요?”

“쓰흡! 어디서 엄살을! 내가 네놈 주량을 모른다면 또 모를까?”

벌써 다섯 통째.

다짜고짜 한율산 전 간사에게 끌려 들어간 이후 계속 연이은 막걸리 순례였다.

“아유, 영감. 적당히 멕여유. 당신도 작작 좀 마시구.”

하얀색 막걸리 통이 평상 위에 너저분하게 굴러다닐 때쯤, 주방에서 나타난 김복희 여사가 술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두 남정네 전부 고주망태 되면 일 얘기도 못 혀유. 입가심으로 화채나 좀 드시구랴.”

얼음을 띄운 사이다에 수박을 썰어 넣은 화채.

큼지막한 국자로 퍼낸 사발 하나를 두 사람에게 건넨 김복희 여사.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원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선대 회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행했던 사람이자 탄약그룹의 장자방이라 불리던 남자.

한동안 낚시나 하는 듯하더니만, 최근 갑자기 후계 구도에 조력자 역할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기에 김복희 여사는 김원철에게 반드시 들어야만 했다.

이 남자가 모시고 있는 주군이, 과연 남편이 가지고 있는 비자금의 비밀번호를 가질 가치가 있는 자인지를.

“그래, 나이 어린 새 주군은 좀 어떤감? 모실 만은 허구?”

“어허! 임자는 몰라서 묻나? 보모 노릇이나 하겠지, 보모! 그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는 어린놈이 뭘 안다고….”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김복희 여사의 질문을 중간에 자르는 한율산 전 간사.

언짢은 표정의 그는 호통을 치고는 눈을 감은 채 팔짱을 꼈다.

“아이고, 영감은 좀 가만있어 봐유. 뭔 말을 못 허게 하고 그러남?”

“아,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나!”

옹고집을 부리는 노인. 화기애애하던 여름밤 시골집의 분위기가 한겨울의 강가처럼 얼어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봐, 김원철이! 말 나온 김에 시원하게 털어놔 보게! 자네 대체 무슨 생각인 게야?”

그러던 중 대뜸 김원철에게 손가락질하며 묻는 한율산 전 간사.

이참에 평소 가슴속 어딘가에 묵혀두던 것을 꺼내어 물을 생각인 듯했다.

“아니, 어르신. 제가 뭔 생각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전 그냥 바보예요. 가끔 침도 질질 흘리는.”

“무슨! 구미 화약 공장 건허구 그 사우디에서 벌인 일. 전부 자네 작품 아니던가! 설마 영의정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 게야?”

술로 벌게진 한율산 전 간사의 얼굴에 실망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서렸다.

생각해보니, 그룹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이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누구라도 할 법한 오해이기도 한 상황.

김원철은 황급히 양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며 부정의 표현을 했다.

“그… 일단 오해입니다. 어르신이 말씀하신 그 두 개 전부 한서준 전략실장 머리통에서 튀어나온 작품이거든요. 전 시다만 했고요.”

어느새 끝자락까지 타들어 간 회오리 모양의 녹색 모기향.

한참의 시간이 지나, 마당 흙바닥 위에 회색 재가 그림자처럼 남고 나서야 그의 해명이 마무리되었다.

“솔직한 말로 선대보다 영민해요. 회장 자리에 오르면 잘할 겁니다. 재무 본부에서 엉덩이만 무거우신 누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말입니다.”

연이은 해명을 들어도 한율산 전 간사는 영 미심쩍은 듯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습관처럼 긴 수염을 쓸어 만진 그는 짤막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크흠….”

“그래서 여기 김 여사님께서 오늘 낮에 저한테 전화하셨을 때 깜짝 놀랐걸랑요.”

“놀랄 이유는 또 뭔가? 이 여편네가 자네더러 뭐라고 하데?”

“그게 사실은… 저도 두 분께 긴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 말이죠.”

* * * *

한율산 전 간사의 눈치를 본 김원철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분명, 이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영감님은 그의 주군인 한서준에 대해 고집 섞인 불호의 감정을 가진 상황.

차마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하기가 난망한 김원철.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옆자리에 앉은 김복희 여사가 무언가 결심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부른 이유나 자네가 온 이유나, 둘 다 서로 같은 이유인 모양인가 보구먼.”

“여사님?”

“자네가 예까지 온 까닭이 비자금 비밀번호 때문이지? 여기 고약한 영감탱이 호주머니에 있네. 그냥 오늘 받아 가면 되겄어.”

-탕!

둔탁한 소리와 함께 쇠젓가락이 반상 위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에 불이 켜진 한율산 전 간사.

“어허! 이 사람이 정말!”

“한화기로는 안 되유. 그치는 큰 재목 노릇을 못 헌다니까.”

“임자가 뭘 안다고! 지금 그룹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데!”

“아이고, 이노무 영감탱이는 정말… 서울 갔다 와서 점점 옹고집이 되어가니….”

두 노부부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본 김원철.

분명 얼마 전 서울을 갔다 왔다 함은, 문중회 내부에 무언가 변화가 있음을 의미했다.

“그, 어르신. 혹시 문중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말도 마라! 내가 아주….”

앞섬에서 담배 한 갑을 통째로 꺼내 든 한율산 전 간사.

점점 수북이 채워져 가는 재떨이 안. 그의 답답한 감정으로부터 토해낸 회색 구름이 달무리처럼 하늘 위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놈이다. 그룹 등골이나 빨아먹으려는 기생충이 제 아들놈을 꼭두각시로 부리는 게지.”

“하… 그게 그렇게 된 거였네요. 어쩐지 갑자기 문중회장에 한형민이라니. 한덕술 그 영감님도 진짜 어지간히 징하네.”

“내 그래서 회장 자리는 한화기가 가져가야 한다는 게야. 한덕술이 같은 놈들을 휘어잡으려면 일단 재무통을 올려야 해. 그리고….”

표정을 찌푸린 한율산 전 간사.

맨정신으로는 차마 하기 어려워서일까?

언제 가지고 온 건지, 씁쓸한 술을 한 사발 들이마신 그가 조심스레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첩 자식 아니던가. 한서준이 고놈은.”

“…….”

“반쪽짜리 혈통을 회장으로 올리면, 문중회에서 무슨 반발이 나올지 상상도 허기 싫구먼.”

-찌르르르르! 찌르르르르!

고뇌가 불러온 침묵 속에는 오로지 매미 우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마지막 담뱃불이 꺼지고, 한율산 전 간사가 연기 대신 긴 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할멈이 오늘 계속 떽떽거린 이유가 있긴 했나 보군.”

김복희 여사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는 한율산 전 간사.

노인이 스스로 보고 듣고 내린 고집 섞인 판단. 그리고 바로 옆 두 사람으로부터 들려오는 진심 어린 설득.

그의 머릿속 양팔 저울 위에 올라간 후계자 두 사람. 저울 중앙에 놓인 추는 좌우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내려진 타협안 하나.

“선대의 유고도 있고 허니, 내 비밀번호는 넘겨줌세. 허나.”

“어르신?”

“서명희 이사장님이 후계자를 확정하고 난 후. 그때 넘겨줄 것이야. 기껏 해봐야… 생활비로나 쓰도록 말일세.”

결국, 휘청거리던 저울의 추가 가까스로 자리 잡은 곳은, 양팔 사이 어느 어중간한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확신이라는 열쇠가 부족했던 노인이 내릴 수 있는, 내려야만 하는 결정.

“어르신….”

“미국이든 유럽이든… 제 숙부 눈에 들지 않게 안전한 곳으로. 그게 내가 한서준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걸세.”

* * * *

“네. 알겠습니다. 일단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길을 찾아봐야죠.”

부재중 전화가 여덟 통이 찍힌 밤늦은 시간.

분명 오늘 휴가라고 말한 양반이 서산까지 자발적인 출장을 가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김원철 아저씨.

비자금 계좌의 비밀번호를 온전히 얻어내지도, 그렇다고 아예 얻지 못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난처한 모양이었다.

“안 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후계자로 지지만 못 하신다는 거니까요. 제가 숙부를 넘어서면 또 계산식이 달라질 겁니다.”

술 좀 적당히 드시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나.

한율산 전 간사.

비록 김원철 아저씨는 이번 출장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괜찮았다. 적어도 숙부에게 이 비자금이 향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내부 권력 투쟁을 피상적으로 보시는 건가… 옹고집 원칙주의자 같은 사람이라더니 확실히 맞는 것 같네.”

머릿속에 적힌 그의 이름.

그 옆자리에는 동그라미 표시까지는 아니었지만, 애매한 세모 하나가 그려졌다.

적어도 협상의 여지가 전무한 가위표는 아니니 일단 그걸로도 만족할 만한 상황.

그렇게 소파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기고 있는데, 문득 내 뺨 한쪽에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아, 서희 누나.”

“그 만능 대머리 아저씨도 못 하는 게 있네?”

나는 서희 누나로부터 건네받은 차가운 맥주를 들이마시고는 대답했다.

“그러게 영감님이 아주 쇠고집이라나. 아무튼,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만남의 광장이 된 내 오피스텔.

벌써 연속 이틀째, 냉장고에 새로운 술을 채우자마자 방문한 사람은 서희 누나였다.

내게 <코코아 뱅크> 관련 사항을 보고하는 누나. 그녀의 업무 진행 능력은 상당했다.

“서준이 네가 짠 컨셉대로 하니까 확실히 깔끔해. 원래는 개발자들이 PC 화면 식의 구성을 하려고 했거든.”

-치익!

맥주캔 뚜껑 따지는 소리와 동시에 서희 누나의 목젖이 위아래로 꿀렁거렸다.

한숨에 500mL짜리 맥주캔 하나를 비워버린 서희 누나. 시원한 탄성과 함께 누나가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크하, 그런데 네 말대로 스크롤식 구성으로 바꾸니까 훨씬 더 직관적이야. 개발자들도 호평 일색이더라.”

“잘하고 있네.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건 보안이니까, 숙부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게만 조심하고. 그러면….”

어느새 진지한 모습으로 바뀐, 창가에 비친 내 얼굴.

나는 찌그러진 맥주캔을 탁자 위에서 모조리 치워버리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 모인 본론을 슬슬 꺼내 봐야겠지?”

고개를 끄덕인 서희 누나.

확실히 영민한 사람답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도 오늘 들었어. 은행 PF 건. 세상에 어떻게 금융기관들이 기본적인 리스크 관리도 안 하나 모르겠네.”

“탐욕으로 눈이 가려졌으니까. 그렇게 어둠 속에서 방향도 모르고 달리다 보면.”

나는 오른손을 들어 탁자 위에 손가락 두 개를 올려 두었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산업.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해 한발 한발 아무 생각 없이 내딛다 보면 도달하는 곳은 까마득한 절벽 끝자락 낭떠러지 앞일 터.

마치 사람이 걸어가는 것을 흉내 내듯, 내 검지와 중지로 이루어진 두 다리.

눈이 가려진 듯, 갈팡질팡하던 두 다리는 탁자 끄트머리 바깥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나락. 저 깊은 무저갱 어딘가로 굴러떨어지는 거지. 자기 발로.”

“흐응. 그래서 우리 아빠한테 눈가리개까지는 씌우셨다?”

괜히 고양이처럼 가느다란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서희 누나.

일부러 그 가벼운 놀림에 넘어가는 척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누나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안 넘어가는구만, 한서준이 이거.”

“흐흐흐, 나도 숙부랑 문중회 쪽 영감님들이 누나를 어떻게 대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

대를 이을 수 없기에, 탄약그룹 본부의 중책을 맡을 수 없는 서희 누나.

이에 더해, 사촌 형인 한서후의 몰락은 서희 누나가 내 편으로 완전히 돌아서는 데에 쐐기를 박는 치명타 역할을 했다.

“작은오빠는 아예 나이지리아에서 나이 마흔 될 때까지 돌릴 생각인가 보더라.”

“단순 징계치고는 좀 센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차차기 후계 구도도 미리 정리해두겠다는 것도 있을걸? 장남인 서호 오빠가 황태자가 되면, 차남의 존재는 걸림돌밖에 더 되겠어?”

“음….”

벌써 차차기 구도까지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숙부의 눈은 가려진 모양이었다.

자신이 탄약그룹이라는 산속 깊은 곳을 호령한다고 착각하는 숙부.

이제 가장 익숙하다 여긴 그 산길에서 발을 헛디딜 일만 남았다.

내가 내지른. 아니, 정확히는 내가 내지르게 만든 고함 탓에.

“아무튼, 그래서. 눈가리개 다음은 뭐야? 낭떠러지로 몰아가려면, 어흥 소리라도 내야지 내달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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