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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34화 (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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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희의 집.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유리창에는 그녀의 굳은 얼굴이 비쳐 보였다.

평소와 달리 연한 화장을 한 한서희. 미소 속에 감춘 독약처럼, 그녀는 이제부터 마주칠 사람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싶었다.

“웃어야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

그녀는 양손의 손가락으로, 미처 끝까지 올라가지 않는 미소를 끝까지 집어 올렸다.

만들어진, 그러나 고정된 미소.

이 우스꽝스러운 광대와 같은 모습은 며칠 전, 그녀의 사촌 동생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서희 누나. 황태자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보장받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갑작스레 질문 하나를 던지던 그녀의 사촌 동생.

해답을 찾지 못한 한서희가 머리를 갸우뚱거리자,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는 곧바로 정답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는 거야. 적통을 가진 장남이 개국공신이기까지 하면, 감히 어느 누가 딴죽을 걸 수 있겠어.’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한서희 자신의 앞쪽을 향해 몸을 숙인 사촌 동생.

양손을 들어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올린 그가, 만들어낸 웃음을 얼굴에 걸쳤다.

‘봤지? 이 만들어진 웃음. 지금부터 내가 말할 내용을 서호 형님에게 직접 누나가 설득해 줘. 오빠를 생각하는 야심 찬 여동생의 얼굴로.’

그 의심 많은 서호 오빠가 평소 그토록 시답잖게 생각하던 여동생의 말을 듣겠냐며 반문하던 한서희.

그러나 이내 그녀의 사촌 동생으로부터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 난 그녀는 곧이어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양모 카펫처럼 잘 짜인 각본. 분명 이대로라면 한서호는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설령 미심쩍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고 한들 아무런 상관없어. 결국… 이 제안은 받을 수밖에 없거든. 반드시.’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그녀의 집 파우더룸 거울 앞에 앉은 한서희.

연한 분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며 그녀는 홀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진짜 영악한 녀석이라니까.”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뒤로 모여져 한데 묶였다. 그와 동시에, 거울 속에 비친 비장한 그녀의 얼굴.

“그래. 오히려 잘된 거지. 서준이 그 녀석하고 척 지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이렇게 증명되었으니까.”

모든 준비를 마친 채로 스툴 의자에 앉은 한서희.

떨리는 손에 쥔 립스틱 뚜껑을 닫고 있는데, 때마침 그녀의 개인 비서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가씨. 서호 도련님 오셨구먼유.”

“…들어오라 하세요. 아까 전부터 쭉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는 복도는 오늘따라 유독 황량한 무대처럼 느껴졌다.

다시금 손가락을 입가에 댄 한서희. 그리고 어설프지만, 마치 희극 속 배우처럼 만들어진 미소는 확실하게 얼굴 위에 올라갔다.

“오랜만이네, 서호 오빠. 어서 와.”

* * * *

한 달 만에 여동생과 마주한 한서호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

최근 동생 한서후가 유배를 가듯 나이지리아로 떠난 다음부터, 그는 최대한 언행에 주의를 기했다.

‘괜히 나섰다간… 아버지의 눈 밖에 날 수 있다.’

어떤 행보를 보여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한 한서호.

식욕마저 없어진 걸까?

차려진 식사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은 그는, 그저 유리잔의 붉은 포도주로 가볍게 입을 적시기만 했다.

“배가 별로 안 고픈가 봐? 오빠가 좋아하는 것으로 차리라 말했는데. 좀 들지 않고?”

“영 입맛이 없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 서희 네가 나를 따로 보고 싶다니?”

“글쎄….”

말꼬리를 잡아끌며 한서호의 물음에 즉답을 주지 않는 한서희.

전채 요리로 나온 음식을 먹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요새 오빠가 너무 스트레스받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룹 일 때문에.”

“서론이 길다. 빙빙 돌리는 것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지 않나?”

“쌀쌀맞네. 너무 모질게 대하지는 말고. 가끔 이렇게 하나밖에 없는 오빠하고 같이 식사하는 게 얼마나 좋아.”

“하나밖에… 없는?”

“그럼. 오직 하나뿐인 우리 오빠.”

아예 둘째 오라비 한서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말.

그의 손에 쥔, 유리잔에 담긴 와인이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찰랑거렸다.

‘무슨… 뜻이지? 설마 서희 이 계집애가 그룹 내부 권력 투쟁에 들어오겠다는 건가?’

불안했다.

마치 뱀의 눈을 보고 석상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한서호의 굳은 얼굴.

그리고 자신의 입술 언저리가 떨리는 것을 보소서, 의미 모를 미소를 짓는 그의 여동생.

살얼음판 같은 그룹 후계 구도에 또 다른 돌 하나가 던져지는 불확실성 때문이었을까?

꽉 쥔 나이프는 누가 보더라도 눈에 띌 정도에 떨림이 있었다.

“긴장 좀 풀지 그래? 내가 긴장할 법한 말을 던지긴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일단 그러니까… 작은 오빠라고 하기도 뭣한 한서후씨 이야기부터 하자면.”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채, 몸을 기대는 한서희.

이제부터, 그녀의 사촌 동생으로부터 배운,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지리라.

거울 앞에서 그토록 반복했던 표정을 얼굴에 띄우고, 무대 위에 그녀가 올랐다.

“그 바보는 스스로 파멸을 자처했다지만, 마흔 살까지 나이지리아 유배라니. 형벌이 과하지 않아? 아버지 의중이 무엇인 것 같아?”

“…….”

“차차기 후계에 도움이 안 될 놈은 유배지에 박아두겠다는 거고, 오로지 큰오빠에게만 집중하겠다는 뜻 아니겠어?”

여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긴 한서호.

언뜻 듣기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말투. 그러나 그 안에 숨은 본질적인 내용에 그의 마음은 이미 동한 지 오래였다.

차차기 후계자.

요즘 같은 매서운 분위기에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단어.

가까스로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다잡은 그가 다소 점잔을 빼며 말했다.

“크흠, 멍청한 그놈보다는 서희 네가 보는 눈이 있군.”

“그래서 요 며칠 큰오빠가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해. 그런데… 이제는 불안해할 시간 자체가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시간이… 없다고? 내가?”

폭신한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던 기분이 순식간에 꺼져버린 한서호.

아랫입술을 깨문 그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스스로 반추하고 있을 때, 한서희의 연이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개국공신 출신 황태자가 되고 싶은 거잖아? 그러려면… 뭔가 공적이 있어야 공신이 되지 않겠어?”

“……!”

공적.

그 한마디 단어에 불과한 말에 한서호는 가슴이 터질 듯이 다급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의 심장을 움켜쥔 한서희의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생각해둔 게 있어. 오빠가 개국공신이 될 수 있는 카드 한 장. 물론 공짜는 아니야.”

* * * *

전략실.

사무실 내에서 업무를 보던 김원철 아저씨는 연이은 과음에 아직도 속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한 번에 요구르트를 들이마신, 숙취에 시달리는 불쌍한 중년은 기지개를 켜고는 내게 말을 건넸다.

“어우야, 죽겄다. 내가 서산을 괜히 가서….”

“뭐, 나름 성과는 있지 않습니까. 일단 비자금 건은 얼추 해결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좀 찝찝하다 이거지. 내 말은.”

비자금 계좌의 비밀번호는 받았지만, 한율산 전 간사의 전폭적인 지지는 받지 못한 상황.

심지어 생활비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그 옹고집 영감님은 내가 후계 구도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듯했다.

“어쨌거나 회유 방안은 계속 생각해두어야겠어. 하… 영감탱이 정말, 성질하고는.”

“그냥 두시면 될 거 같은데요?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이, 문중회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 일일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여?”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띄운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원철 아저씨.

나는 검은색 보드마카를 잡고서 화이트보드 앞에 선 채, 문중회의 대략적인 조직도를 그렸다.

“한덕술 명예 고문, 그리고 그의 아들인 한형민 문중회장. 두 사람 목적은 1차 하청업체 지분으로 그룹의 고혈을 빨아먹는 거잖습니까.”

문중회 조직도 옆에 그려진, 화가 잔뜩 난 모습의 노인 캐릭터.

나는 빨간색 마커로 두 집단 사이에 긴 선 하나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한율산 전 간사. 지독한 원칙론자인 이 영감님은 여기 두 사람이 문중회를 앞세워 전횡하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고요.”

“그렇지. 그래서 그 영감님이 재무통인 한화기 밀어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거고.”

답답하다는 듯한 어투의 김원철 아저씨. 숙취 때문에 그런지 아직 감이 잘 오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문중회 조직도 바로 옆에 그룹 본부의 직함 두 개를 써넣었다.

하나는 재무 본부장, 다른 하나는 전략실장.

“그러면 간단한 일 아닙니까? 한덕술 명예 고문이 숙부를 지지하게 된다면, 반대로 한율산 영감님은 대타로 저를 밀겠지요.”

“야, 그게 말이 쉽지. 한덕술 그 양반이 뭣 하러 한화기를 지지해? 아니, 애초에 한화기가 한덕술 힘이 필요할 이유가….”

그 순간, 마치 뿅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별 하나가 눈앞에 떠오르는 것만 같은 표정의 김원철 아저씨.

이제야 무언가 머릿속에 흩뿌려져 있던 점들이 연결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있구나. 한화기가 한덕술과 손잡아야 하는 이유.”

“정확히는, 이제 있게 되겠죠. 잘 빠진 그림이 나올 겁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때마침 걸려온 전화.

액정에 표시된 발신인은 탄약 증권의 구석수 사장이었다.

“시작된 것 같네요. 네. 구 사장님. 말씀하세요.”

“전략실장님? 일전에 말씀하신 대로… 지금 탄약 증권 미국 법인에서 대량의 주택 관련 파생상품이 매물로 올라왔다는 보고입니다.”

탄약 증권 팀장 자리에 있는 한서호의 지시에 따라, 서브프라임과 관련한 금융상품을 만들어 팔아치웠다는 보고 내용.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건의 대출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1,150억 원의 자금.

아마 한서호는, 그리고 숙부는 모를 것이다.

이렇게 너무나도 손쉬워 보이는 자금의 조달 방향이 내가 의도한 바에 따른 것임을.

그리고… 그 방향은 두 사람을 깊은 산속 낭떠러지를 향해 몰이사냥을 하는 쪽이라는 사실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해당 물량은 <코코아 뱅크> 쪽으로 매입할 예정이니 티 안 나게 마사지 부탁드려요.”

“예. 전략실장님.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백하게 용건만 주고받고 종료된 통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해당 내용을 전부 들은 김원철 아저씨가 어벙벙한 모습으로 나를 향해 헛웃음 짓고 있었다.

“진짜… 너는 난놈이여. 난놈.”

“과찬이시네요. 서희 누나가 말을 잘했나 봅니다. 한서호가… 의도한 대로 사고를 단단히 쳤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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