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35화 (35/300)

35화자폭 버튼(4)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서산의 밤공기. 어느새 반쪽이 된 달빛을 맞으며 한율산 전 간사는 원을 그리며 마당을 걷고 있었다.

“아니, 영감은 아닌 밤중에 웬 달맞이라도 하는 거유? 탑돌이도 아니고 왜 자구 뺑글뺑글 돌고 그런디야?”

안채 창호를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 김복희 여사. 그녀는 답답한 듯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한서준이가 맞다니까. 영감이 되도 않는 똥고집 부려서 이러는 거 아니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걸음만 허구….”

“말하는 것 하고는… 고민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 할멈은 일찍일찍일찍 자라니까! 쓸데없이 벌레 들어오게 문 열었다 닫았다 허지 말고!”

김복희 여사의 말에 성질을 버럭 내려다가 마는 한율산 전 간사.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반쪽 달이 떠오르는 하늘.

이제까지만 해도 저무는 달처럼 보이던 탄약그룹이었건만, 며칠 전, 김원철과 나눈 대화를 생각하자니 이제는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로 보이고 있었다.

“한화기가 적임인 것은 맞는데… 왜 자꾸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겐지, 원.”

“아이고, 영감 직감이 맞는 거유. 혹시 몰라? 한화기가 나중에 한덕술이하고 붙어먹을지도?”

“어허! 택도 없는 소리!”

“택도 있는 소리유. 영감 말대로 닳고 닳은 재무통 아니유? 아예 해 먹으려면 작정하고 할 수 있다니까….”

며칠 전부터 남편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김복희 여사.

분명 한율산 전 간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말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는.

한서준.

행보로 봐서는 도저히 애송이가 할 수 없는 업적을 세운 핏덩이.

분명 뒤에 영의정 노릇이나 하려 드는 김원철의 작품인 줄만 알았거든. 그 모든 것이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라니.

“만약의 경우는 대비해야 하는 겐가…?”

“하이고, 이제야 좀 우리 영감 가는귀가 뚫린 모양이네.”

“크흠, 시끄럽고! 알겠으니까 잔소리나 좀 그만 허지!”

섬돌에 신발을 벗고 다시 안채로 들어간 한율산 전 간사.

자존심이 조금 상했던 걸까?

솜이불 속에 누운 그는 눈을 감으며 김복희 여사에게 말을 건넸다.

“임자.”

“왜 불러유.”

“한화기 말이야. 아무리 생각헌들, 이놈이 망할 거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가 않는다.”

괜한 고집을 부리듯,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는 한율산 전 간사.

이불을 뒤척인 그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놈이… 정말 제 모가지에 스스로 날붙이를 들이대지는 않을 노릇 아니던가? 암, 그렇고말고.”

* * * *

“이건 기회야…. 아버지한테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거야. 난 할 수 있어.”

어디 옛날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웅얼거리는 한서호.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손에는 며칠 전, 여동생 한서희로부터 전해 들은 공을 세울 만한 비책이 쥐여 있었다.

단시간에 1,150억 원을 곧바로 뽑아낼 수 있는 간단한 보고서 한 장.

탄약 증권의 팀장 자리에. 아니, 실제 부여받은 권한은 임원급 이상이었던 그였다.

그렇기에 뉴욕 현지 법인의 인력들을 닦달해 쥐어짜듯이 뽑아낸 구체적인 방안은 단시간에 받아볼 수 있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고작 한 달 반. 한 달 반만 넘기면 된다.”

목이 바싹 타기라도 하는 모양인 듯, 유리잔에 담긴 물을 들이켜는 한서호.

제멋대로 떨리는 두 다리를 애써 손으로 움켜잡고 있는데, 한화기의 개인 비서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도련님.”

“벌써? 정철식 전무가 방에 들어갔다고 한 지가 10분도 채 안 되지 않았었나?”

“현재 논의 중인 사안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시겠다고 하십니다.”

“같이 이야기하겠다고? 그… 자금 조달 건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비서를 보자마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감추지 못한 한서호.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버지에게 혹여나 자신이 인정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어서 가지! 어서!”

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한화기의 집무실. 평소 이곳에 올 때마다 마치 저산소증에 걸린 산악인처럼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혔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 발뒤꿈치에 닿는 이 딱딱한 대리석 바닥마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드디어… 나도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건가?”

문 앞에 선 채, 손에 쥔 보고서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한서호.

평소 앙칼진 성격 탓에 일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의 여동생 한서희였지만, 오늘만큼은 예전 아기 때처럼 사랑스러운 감정마저 들 정도였다.

“서희 그 계집애가 이렇게나 도움이 될 줄은 또 몰랐네. 나중에… 토사구팽 할 때도 손에 현금이나 몇 푼 쥐여주고 쫓아 보내야겠어.”

자신이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헛물만 켜고 있는 한서호.

그것도 한서희로부터 직접 당하는 것이 아닌, 그 뒤 누군가의 계책에 당한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그였다.

-똑똑!

심호흡을 토해낸 후, 희망을 가득 담아 두드린 나무문.

한서호는 알지 못했다.

지금 그가 선택한 이 현실이 차후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인지를.

“아버님, 서호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 * * *

한화기의 집무실 내부.

바스락거리는 서류 자락 넘기는 소리와 함께 피곤한 얼굴의 한화기가 질문을 던졌다.

“이건 이 정도로 마무리하지. 감사 쪽은 어떻게 되어 가나?”

“현재 그룹 재무 본부 내에서도 별도로 확인 중입니더. 다만… 아직까지는 감찰팀 결과랑 큰 차이는 없네예.”

고개를 숙인 채, 한화기에게 보고를 올리는 재무 본부의 정철식 전무.

이미 한서준이라는 동아줄을 잡은 이상, 그에게 거짓 보고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아무래도 직접 현장은 확인 못 하고… 이 장부만 보다 보이, 재검토 이상의 역할은 못 하고 있심더. 면목이 없습니더.”

“상관없다. 재무 본부의 역할은 유지원 그 멍청한 놈이 하는 일에 교차검증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니.”

최근 자신의 심복인 유지원 감찰팀장의 능력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듯한 한화기.

비록 한서준과 김원철 콤비가 만든 8888계좌의 존재 때문에 내부 감사가 어려워진 상황이었으나, 오명은 모조리 유지원이 덮어쓴 상황이었다.

“그, 일단 보이까 대략적인 흐름은 잡히긴 합니더. 해외 반출 부분만 중점적으로 골라내믄 어찌어찌 데드라인에 맞추기는 할 거 같네예.”

“후우… 유지원 그놈이 아주 머저리가 아니길 바래야겠군. 다른 보고사항은 없나?”

“아, 그라고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 자금 조달 있잖습니꺼?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건….”

일부러 한화기의 호기심을 이끌기 위해 말끝을 흐리는 정철식 전무.

목소리를 조금 낮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150억 원. 이래저래 검토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남들 모르게 빼돌리는 식은 힘들 것 같심더.”

“방법이 아예 안 나오나?”

“은행 야들이 잔고 증명할 때 출처까지 다 보내랍니더. 대출은 그래 쉽게 해놓고서 꼭 이런 건 깐깐시럽게….”

굳은 표정의 한화기.

마치 신기루를 손에 쥐려고 하는 것처럼, 그는 무언가 일이 이어질 듯 말 듯 변죽만 울리는 꼴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사재라도 헐어서 급하게 자금을 마련해야 하나 고민하는 한화기.

그런 그에게 대뜸 상황에 맞지 않는 함박웃음을 짓는 정철식 전무가 갑작스럽게 뜬금없는 소리를 시작했다.

“그래가. 축하드립니더. 큰아드님께서 참으로 영민하시네예.”

“…내가 뭘 들은 건지 모르겠군. 이봐, 정철식이. 자네 지금 무슨 소리인가?”

“그게 말입니더. 지 같은 빡대가리는 상상도 못 할 일을, 서호 도련님이 딱 아이디어를 내셨다 아입니꺼.”

“서호가…? 자금 확보 수단을 그 녀석이 마련했다는 건가!”

말만 앞설 뿐, 실적이 없었기에 그렇게까지 미덥지 못했던 큰아들.

차차기 후계 구도 때문에 둘째를 유배 보내듯 날려버렸으나, 첫째 역시 한화기의 마음에 온전히 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익살스러운 경상도 사투리로 들려오는 큰아들에 대한 찬가는 후계자로서의,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한화기의 심장을 울리는 데 충분했다.

“하모예. 지금 바깥에서 기다리신다는데, 우째, 직접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꺼?”

“당장 들어오라고 하지. 같이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낯빛에 반색을 띤 한화기.

그 모습에 겸손한 아랫사람을 연기하는 정철식 전무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한화기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닌, 자기도 모르게 지어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히야… 이 한서준이 말대로 착착 되아가네. 내는 그냥 바람잡이만 했는데, 우째 이래 판떼기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고?’

* * * *

“…따라서 미국 주택 MBS(유동화증권)에 기반한 단기 파생상품 판매 대금으로 자금을 형성하면 됩니다.”

제 아버지 앞에서 브리핑을 마친 한서호는 자기도 모르는 새 메마른 아랫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마치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간 뮤지컬 배우가, 극이 끝나고 난 뒤 관객들의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그의 모습.

“…….”

자신을 앞으로도 무대 위에 서게 할지를 결정할, 유일한 청중이자 비평가인 제 아버지의 침묵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한서호.

객석의 불이 켜지고, 다가온 커튼콜의 시간. 마침내,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그의 브리핑을 듣던 한화기가 입술을 떼었다.

“대견스럽구나. 역시 장남은 다르군.”

“아, 아버지….”

“서후 녀석을 오지에 보낸 보람이 있다. 모든 역량을 네게 집중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화기.

평소 부자간의 감정 표현 따위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집안이었기에, 한서호는 그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부여잡은 그는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리스크 관리 쪽도 고려해 보았습니다. 아닌 말로 올해 9월 이내에 미국이 망하거나 하지 않는 한, 절대 손해를 볼 수 없는 상품이고요.”

“9월… 그렇지. 그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비록 미국 내부 경제의 위험도를 인지하고는 있는 한화기였으나, 그는 이내 희망 회로를 돌리며 낙관적인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의 정적이자 조카인, 한서준이 그룹 조간 회의에서 주장했던 미국발 금융위기설.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시기를 명백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데이터 또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아른거리는 탄약그룹의 로고가 조각된 왕관의 신기루.

한화기와 한서호. 두 부자 모두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발밑의 낭떠러지는 보지 못한 채, 오로지 왕관만을 쫓고 있었다.

“좋다. 이대로 가겠다. 서호 네가 정말 큰일을 했구나.”

“저는… 그저 아버지께서 알아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쁩니다!”

눈가리개로 가려진, 캄캄한 시야. 견고한 디딤돌이 있기라도 한 듯, 모든 체중을 싣고 발을 내딛는 한화기.

사냥꾼의 모습을 한 조카의 몰이인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뾰족하게 날을 세운, 파멸로 향하는 함정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