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자폭 버튼(5)
“아이고, 성 사장. 요새 너무 바쁘신 거 아닌가 모르겄어. 처리할 일이 그렇게 많으신가?”
“뭐… 워낙에 많기는 합디다.”
탄약그룹 본사 근처의 모 일식집.
다다미가 깔린 방 안, 들뜬 모습의 박한이 사장이 젓가락을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기야, 조선 해양 쪽이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메인이니까 정신없긴 하겠네.”
들뜬 모습의 박한이 사장.
그와 대비되는 성원식 사장의 얼굴에는 철제 투구를 쓴 사무라이와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칼을 거꾸로 쥔 채, 다가올 그날만을 기다리는 상황.
“…자금 집행 시작하고 그러다 보니 좀 바빴소. 그나마 탄약 증권 쪽에서 활로를 열어서 다행이지.”
복잡한 내면의 감정을 정리한 후, 곧바로 적당한 대답을 내뱉은 성원식 사장.
이왕 줄을 바꿔 탄 이상, 의심받지 않으면서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돗쿠리 잔 하나를 비운 그는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흘리듯이 일 이야기를 꺼냈다.
“은행 컨소시엄에서 요구하는 잔고 증명이 해결되었다나? 뭐, 이쪽은 자금 수혈만 되면 그만이니까.”
“아아, 그 무슨 미국 증권가에다가 부동산 기반 뭐시기냐… 파생상품 팔아먹은 거 말하는 거요?”
그룹 내에서 마당발 노릇을 자처하는 박한이 사장인 만큼, 벌써 자세한 내막을 건너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자기만 아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몰래 이야기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사실 그거, 나도 들었거든. 그거 재무 본부장네 큰아들놈이 아이디어 냈다면서?”
툭 튀어나온 허리띠처럼 가슴속 긴장까지 풀어버린 모습.
박한이 사장은 성원식 사장을 완전히 같은 편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빈 술잔을 다시 하나 가득 채운 그는 웃음보를 터트리며 하던 말을 계속해나갔다.
“끌끌끌… 골치 좀 썩힐 일이었는데 잘 풀렸소잉. 거, 한씨 집안 인간들이 지랄 맞긴 해도 능력은 있는가벼.”
“능력… 많긴 하지요. 너무 많아서 문제 아니겠나 싶기도 하고.”
“얼레? 그건 또 무슨 쌩뚱맞은 소리쇼?”
이미 성원식 사장의 귓가에 더는 들려오지 않는 박한이 사장의 말.
술잔 위에 일렁이는 자신의 모습을 마셔버린 전향자는 말을 아꼈다.
그러고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무언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모습.
“이쯤 하고 정리합시다. 갈 데가 있어서.”
“에이… 거, 사람 참. 그렇게 일만 하고. 너무 열심히 사는 거 아니요?”
“한순간도 방심할 수는 없는 겁니다. 계산은 내가 하지요. 다음에 봅시다. 다음이… 있다면.”
급히 인사를 마친 후, 미닫이문을 닫고 나가는 성원식 사장.
얼떨떨한 표정의 박한이 사장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술이 올라 벌게진 얼굴로 목청을 높였다.
“걱정도 팔자여! 아무리 내부 감사 계획이 맛탱이가 갔다지만, 이라크 건으로 공적 세우면 한화기가 스무쓰하게 이긴 데두!”
공허한 외침에 복도를 타고 메아리쳐 돌아온 자신의 말.
어쩌면 박한이 사장은 본능적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묘한 기시감을 떨쳐내기 위해 호방한 척을 했을지도 모른다.
점원을 불러 정종 한 병을 가져오게 한 박한이 사장. 그는 작은 술잔 대신 큼지막한 물컵에 정종을 넘치도록 가득 부었다.
“참, 나. 저 양반도 영 맹탕이여. 내가 무슨 탬버린 흔들어 재끼라는 것도 아닌디, 술이나 마저 먹지….”
무더운 여름날 얼음물을 들이켜듯 물컵 가득 따른 정종을 한 번에 털어 마신 박한이 사장.
소매 춤으로 입술을 닦아낸 그는 성원식 사장이 앉아있었던 빈자리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마치 비어 있는 저 자리만큼을 자신이 가져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잘 되았어. 어차피 유지원이도 아웃이고, 성원식이 저 양반도 저래 딱딱하게 굴면 더 높이 올라가긴 글렀으니께.”
얼마 전, 결국 내부 감사에서 비자금의 흔적을 쫓는 데 실패한 유지원 감찰팀장이 문책을 당했다 들은 그였다.
나름 충실한 개를 자처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한 유지원에게 푸대접이 돌아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상황.
“그려. 이번 기회에 한서준이 고놈만 이쁘게 모가지를 쳐 버리믄… 확 치고 올라가는 것이제.”
평소보다 붉은 기가 올라온 목뒤를 물수건으로 닦아내는 박한이 사장.
그의 눈에는 벌써 회장 한화기의 바로 옆을 호종하는, 부회장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욕망이라는 벅차오름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앞서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흐흐흐… 인자 얼마 안 남았구먼. 부회장, 내가 탄약그룹 부회장이라 이 말이여.”
그렇게 깊어만 가는 서울의 밤.
음주 가무로 시끌벅적한 골목길을 지난 성원식 사장. 모퉁이 너머 따라오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전략실장님. 성원식 사장입니다. 보고 올리겠습니다.”
어느새 조금 쌀쌀해진 밤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신 그가 하늘 위로 날숨을 내뱉었다. 마치 이제까지의 모든 근심, 걱정을 허공으로 날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쪽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낌새조차 느끼지 못한 것 같으니 계획대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 * * *
전략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그룹 조간 회의 때 뵙겠습니다. 들어가시죠.”
담백하게 필요한 말만 주고받고는 그대로 마무리된 통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의 김원철 아저씨 또한 때마침 전화 통화를 끝마친 모양이었다.
“오케이. 구 사장님도 증말 수고 많으셨어. 나중에 끝나고 우리 실장님하고 낚시나 같이 갑시다. 양평에 쏘가리 매운탕 잘하는 집 있어.”
통화를 마치고 이름 모를 트로트 풍 콧노래를 부르는 김원철 아저씨.
일이 잘돼서라기보다, 끝나고 양평 낚시터에 다시 갈 생각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마 자기 나름대로 워크숍 비슷한 계획을 머릿속에 세워 두었겠지.
“아니, 잠깐만요. 저도 가는 겁니까? 그 양평 낚시터에?”
“에헤이. 한번 속는 셈 치고 같이 가보자니까. 진짜 남자라면 낚싯대에서 올라오는 손맛이라는 게 뭔지를 알아야 하거든.”
낚시 때문에 이혼당하고서도 아직도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고 불타오르는 김원철 아저씨.
이놈의 낚시 이야기가 나오면 한세월이다. 나는 황급히 대화 주제를 일로 돌렸다.
“하…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요. 아까 구석수 사장은 뭐랍니까?”
“아아, 그거?”
얼굴에 음흉한 미소를 띤 대머리 아저씨가 양손의 두 검지를 들었다.
그러고는 무슨 만화에 나올 법한 변신 로봇이라도 되는 것처럼 엑스(X)자를 그리며 서서히 교차하는 손가락들.
“흐흐흐… 하나도 못 잡아냈단다. 유지원이 고놈은 한화기한테 또 죽살나게 깨졌고.”
“예상대로네요. 8888계좌, 그거 단기간에 잡아내기 힘들 것 같긴 했습니다.”
“그래서 내부 감사는 유야무야 덮는 꼴이고, 결국 그쪽 선택지는 하나인 거지.”
내 쪽을 바라보며 눈빛을 빛내는 김원철 아저씨. 마치 자신이 끝맺지 못한 말을 나더러 하라는 듯한 표정이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번 큰 그림의 설계자답게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이제 자기 발로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읏차, 다음 주 월요일에 한화기 반응이 궁금해서 어떻게 기다린다냐. 이거 뭐, 제 손으로 휘두른 칼에 자기가 죽는 꼴이네?”
마치 망가진 전투기 위에 올라탄 조종사처럼, 이제는 내리려야 내릴 수 없는 숙부.
자신의 실책으로 불이 붙은 엔진에 매서운 경보음이 귓가를 파고들 듯 울리는 상황에 보이는 빨간 버튼.
“아마 그게 유일한 비상 탈출 버튼인 줄 알고 있을 겁니다. 도저히 신나서 누르지 않을 수가 없죠.”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분명 ‘긴급탈출’이라 적힌 이 버튼이 미심쩍기도 했을 터.
그러나… 묵직한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측근들의 목소리.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한데 섞인 그 목소리는, 어서 빨간 버튼을 누르라 말하고 있었다.
이제 두툼한 장갑을 낀 숙부의 손가락이 향할 곳은… 오로지 하나뿐일 터.
-톡톡!
의자 팔걸이에 오른팔을 걸친 내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책상 끄트머리를 치며 말했다.
“탈출 버튼인 줄 알고 누른 게 자폭 버튼이면, 그 일그러진 모습. 아마 볼만할 겁니다.”
* * * *
“이사장님. 회의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잠시 후에 나감세. 준비할 터이니 기다리고 있게나.”
마치 함박눈이라도 내린 듯한 흰 머리칼의 서명희 이사장.
근래 들어 고심이 많았던 그녀의 눈빛은 다시 서태후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차갑도록 빛나고 있었다.
‘결정권을 쥔 자가 약한 마음을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게지.’
그룹을 짊어질 후계자에 대한 고민. 그리고 문중회에서 하나둘씩 튀어나오는 잡음과 압박.
이런저런 변수에 휘둘릴 법한 위치에 선 그녀였으나, 서태후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직 단 하나. 그녀가 처음 집어 든 엄정한 잣대만을 들고 정해진 대로 재단하기만 할 뿐.
‘원칙대로 간다. 오늘 두 놈이 보이는 결과물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질 터.’
금속 안경테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안광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가족사진에 닿았다.
이제는 작고한 큰아들, 예전부터 아픈 손가락이었던 작은아들. 그리고 그 가운데 앉은 서명희 이사장 자신.
하필이면 제 아버지를 붕어빵처럼 쏙 빼닮은 손주였기에, 서태후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했다.
-탁!
그리고 그런 기분을 단칼에 끊기라도 하듯, 서태후의 손으로 직접 쓰러트린 액자.
책상 바닥에 닿은 채, 뒷면만을 보이는 가족사진을 쓰다듬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비서. 이동하지.”
탄약그룹 본사 맨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를 지나던 직원들은 양옆으로 선 체,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가볍게 손짓으로 인사를 받은 서태후. 마침내, 발아래의 붉은색 카펫이 향하는 끝자락이 닿은 문이 열리고 회의실 내의 사람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대로 앉아들 있어. 뭣 하러 일어나나?”
정중앙에 앉아 회의실 전체를 바라보는 서명희 이사장.
이제 이 자리에 앉는 것도 오늘을 기점으로 점점 없는 일이 되어갈 것이다.
“…….”
극명하게 갈린 회의실 내부.
서로 칼만 안 들었을 뿐, 왼쪽에 앉은 작은아들과 오른쪽에 앉은 맏손주는 당장이라도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회장 자리를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
어느 한쪽이 죽더라도 탄약그룹의 안주인인 그녀는 반드시 누군가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야만 했다. 수십만 명의 인원을 책임질, 미래의 재목을 위해.
“회의나 시작허지. 불필요한 식순 이런 거 아무 쓸모없다는 것 다 알 테고….”
잠시 말꼬리를 흐린 채, 왼쪽으로 향하는 서태후의 눈. 그녀의 손가락이 한화기 쪽을 향했다.
“그래, 재무 본부장. 자네부터 말해 봐. 준비한 것도 많을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