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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37화 (3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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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 위에 올라간 한화기는 고개를 돌려 좌중을 훑어보듯 천천히 바라보았다.

불안한 눈빛의, 자신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임원들.

자신들을 이끌 목양견을 기다리는 양 떼 같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확신임이 분명했다. 설령 사납고 매서울지언정,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확신을.

그렇기에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오로지 피 냄새만이 진동하는, 제 조카가 앉아있는 곳을 향해 눈을 부릅뜬 채 응시하는 한화기의 모습.

‘기회는 한 번… 단숨에 끝낸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덤벼들 것만 같은 그의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내부 감사 결과. 유의미한 결론이 나왔습니다. 현재 탄약그룹이… 돌아가는 판을 바꿀 만큼.”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한화기의 목소리.

그를 둘러싼 임원진들은 첫마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전 패배 때와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직감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서로 귀엣말을 나누며 줄을 다시 옮겨 탈지 부화뇌동하는 양 떼들.

그런 웅성거리는 소리 따위는 일절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발톱을 세운 목양견의 날 선 송곳니가 입 밖으로 서서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저번 회의에서 전략실장이 말한 것처럼, 내부의 기생충을 색출해야 한다는 식의 자극적인 흑색선전 따위가 아닙니다.”

수풀 사이에서 걸어 나와 모습을 드러낸 한화기에게는 여유로움까지도 보였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제 조카가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더라도 순식간에 달려가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마치 앞발을 뻗어 튀어 나가듯, 그의 입에서 자극적인 문구가 연이어 나왔다.

“내부 감사. 고작 티끌만 한 오점을 찾아서 고깔모자를 씌우고 망신주기식으로 조리돌림 하는, 그런 불순한 의도였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

화를 내지도, 도망치지도 않은 채,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한화기의 말을 덤덤히 듣고 있는 그의 조카.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는 게 확실하다.’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

막연한 추론은 분위기를 타고 올라 곧 확신이 되어 그의 심장을 마구잡이로 뛰게 했다.

이윽고 둔탁한 기계음을 내며 내려오기 시작한 빔 프로젝터.

마침내 사냥감을 구석진 곳에 몰아세운 한화기가 밝게 빛나는 화면을 가리키며 높이 뛰어올랐다.

“재무 본부는 이번 기회에 현미경을 갖다 대듯, 탄약그룹이라는 이 대기업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의 추가 수주 계획과 자금 조달 상황이 적힌 흰 화면.

그곳에는 장황한 수식어 따위가 설 공간은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화면 속 가득 빼곡하게 채워진 숫자들의 나열만이 있을 뿐.

수천억 원. 아니, 조 단위 금액을 아득히 뛰어넘는 상상 이상의 예상 순이익.

“허어… 정말인가? 이게 가능하다고?”

“일단 은행 컨소시엄 대출이 나왔으니 타당성은 무조건 확보한 건데… 이거, 이라크 시장도 버리기는 아까운 것 같구먼.”

“잔고 증명에 필요한 자금 조달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고… 역시 한화기 본부장인가? 가만히 당할 사람은 아니구먼.”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임원들은 각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막대한 건설 사업. 필시 자신들의 이권까지도 충분히 그 틈바구니 어딘가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가리키는 것은 새로운 주인에 대한 충성이었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이번 내부 감사로 재발굴되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우디라는 불확실한 환상에 가려져 버려질 뻔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

매서울 만큼 날을 세운 송곳니가 그의 조카의 목덜미 가까이에 다가왔다.

의심의 여지를 찾아볼 수 없는 명분과 성과. 그리고 깎여나가는 경쟁자의 업적.

‘이겼다!’

기세를 잡은 한화기.

지난 한 달 반 동안 담즙을 삼키며 계획한 수가 이토록 최상의 결과를 보이기에, 관자놀이를 지나가는 혈류가 마치 해일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향후 탄약그룹의 방향타는, 그저 아마추어에 불과한 얼치기의 행운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이 자리에서 드리고자 합니다.”

고요함이 깃든 정적.

탄약그룹의 회장, 그 왕관의 주인이 자신임을 명백히 천명하는 말에 좌중 모두의 입술은 얼어붙은 듯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

“…….”

하나둘씩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느 줄에 설지를 고민하는 상황.

그리고 양 떼들의 침묵이 깨진 것은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의 자리로부터 들려오는 굴종의 박수 소리부터였다.

-짝짝짝!

“크하… 증말, 증말 훌륭하십니다! 이게 바로 진짜 사업이여! 사우디 왕자네 복권 한 번 당첨되고 헬렐레 거리는 게 아닌, 진짜 제대로 된 일을 하는 사업!”

울타리를 넘은, 양 한 마리의 외침에 이내 다리를 덜덜 떨던 다른 양 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둘씩 한화기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감격스럽습니다. 본부장님! 방금 보여주신 인사이트… 제가 감히 절반이라도 흡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지요!”

건설의 나덕술 사장이 곧바로 그 뒤를 이었고.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임직원 교육용 자료로 따로 작업해서, 인사팀 통해서 쫙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적극 동의합니다! 신입사원부터 고위 임원까지, 전부 머릿속에 새기고 가슴속에 간직해야지요!”

나머지 눈치 빠른 임원들은 마치 먹이 경쟁을 하듯 제각기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

그리고 냉철한 모습을 유지한 채, 이 모든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

‘추가 넘어갔군.’

* * * *

금속 안경테 너머 차가운 눈으로 권력을 향한 움직임을 바라보는 서태후.

내심 자식보다 더 기대했던 서자 출신 손주라는 카드. 그러나 외통수에 걸린 이상 살아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상황.

그녀는 한낱 먹잇감으로 전락해가는 손주를 못내 아쉬워했다.

‘작은아들놈이 프레임을 잘 짰다. 예전 사우디 건 성과가 크긴 했지만… 그걸 그저 초심자의 행운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 시켜 버린 게로군.’

한순간에 뒤집힌, 기울어진 운동장 한가운데 심판 옷을 입은 서명희 이사장. 이제 목에 걸고 있는 호루라기를 불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안타깝다. 그러나… 원칙대로 가야 한다.’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거나 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한화기의 말을 잘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서태후.

반대쪽을 돌아본 그녀는 마치 사형수에게 마지막 유언을 듣기라고 하려는 것처럼, 손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어디 전략실장 자네는 할 말이 있는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등 뒤로 여실히 느껴지는 살기.

분명 그녀의 작은아들은 이 스물다섯밖에 안 되는 정적을 살려두지 않을 터였다.

‘이대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다면 내 유배 선에서 어떻게든 무마해주마. 다시는 한국 땅을 밟을 수는 없겠지만….’

비록 이번 권력 투쟁에서는 패배했지만, 그녀에게 충분히 영민함을 보여주었던 손자.

그렇기에 서태후는 이미 세상에 없는, 자신의 큰아들을 쏙 닮은 이 손자가 담담히 결과에 승복하기만을 바랐다.

어디까지나, 그의 뒤이은 말을 듣기 전까지는.

“글쎄요. 너무 심각한 헛소리의 나열이라 뭐부터 논박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 * * *

찡그린 눈에 올라온 주름.

내가 내뱉은 단호한 말에 할머니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에 한계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셨겠지.

끝내 항복하지 않은 자에게 새로운 권력은 한없이 잔인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크흠, 전략실장님께서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철부지 티는 좀 벗으심이 어떤지요?”

그리고 곧바로 임원들로부터 들려오는, 마치 누군가가 나를 향해 신호탄이라도 쏜 것처럼 시작된 힐난의 말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거, 철 좀 들으세요! 전략실장님!”

“하이고, 내가 말했잖나. 한서준 전략실장… 출신부터가 좀 그렇다니까. 무슨 딴따라 배에서 나온 서자가 회장이 된다고….”

흘리는 척, 실수하는 척,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척. 그러나 명백히 내게 쏟아지는 날 선 비난.

상관없다. 괜찮다.

그저 잔챙이들의 울음소리 따위에 일절 영향받지 않았다.

“줄타기나 하시는 분들이 말이 참 많으십니다. 충성 경쟁은 더 안 하셔도 이미 편이 갈렸으니 좀 입을 닥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저! 닥치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오로지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숙부의 얼굴뿐.

마치 다 잡은 먹이를 어떻게 하면 더 처참한 몰골로 만들지 생각하는 그 모습은, 벌써 자신이 탄약그룹의 주인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 있었다.

“재무 본부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나 가만히 앉아 들어는 보았습니다만. 들을수록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추잡스럽군. 전략실장 직함을 달고 한두 번 운이 좋았던 게, 아직도 제 실력인 줄 착각하는 것인가!”

점잖은 척 애써 유지하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내게 발톱을 겨눈 숙부.

연단 중앙에 내려온, 백색의 빔 프로젝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마치 저녁 해를 등진 사나운 들짐승의 안광과도 같아 보였다.

“능력도, 출신도 전부 미천하기 짝이 없는 놈이, 어딜 감히 탄약그룹의 회장 자리를 탐내나! 네놈 욕심 탓에 이라크 사업이 묻힐 뻔했다!”

연단에서 한 발짝씩 내려와 나를 향해 걸어오는 숙부의 모습.

양옆과 뒤쪽 모두 절벽으로 가로막힌, 더는 달아날 곳이 없는 곳에 사냥감을 몰아넣은 그 모습에 다른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

‘조금만 더… 바로 지금!’

마지막 한 발자국.

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생각에 희열마저 표정에 비친 그의 모습.

왕관의 찬란한 빛에 이끌리듯 뛰어오른 숙부가 나를 향해 시퍼런 발톱을 내질렀다.

자신이 착지할 그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로.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그룹의 명운이 걸린 이 일을 감히 네놈이 뒤엎으려 했는가!”

“그룹의 명운이 걸렸기에 뒤엎으려 한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시나 봅니다. 재무 본부장님.”

“뭐라…?”

움푹 꺼진 땅.

그리고 뾰족한 가시나무 창살이 박힌 함정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숙부의 한쪽 발.

생각지도 못한 역습에 당혹스러워하는 숙부를 바라보며, 나는 회의 진행을 맡은 직원에게 미리 언급한 자료를 틀라고 지시했다.

함정에 빠진 맹수의 숨통을 단칼에 끊어버릴, 숙부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진짜 장부를.

“부실 사업. 그것은 탄약그룹의 장기 깊숙이 자리 잡아 생명을 갉아먹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팟!

순식간에 바뀐 화면.

거기에는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대참사가, 그리고 눈앞의 목표를 보느라 오히려 눈이 멀어버린 숙부가 내린 오판의 흔적이 적혀 있었다.

“이건… 너무 심하잖아. 아직도 공사 진행이 10%대라고?”

“쓰레기 같은 저질 부품을 썼구먼. 저러니 설비 시범 운행에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허지.”

“허어… 이게 사실이라면 분식회계 이슈까지 터질 터! 이사장님! 외부에 새어나가기 전에 빨리 막아야 합니다!”

정반대로 뒤집힌 회의실의 분위기. 양 떼 같은 임원들의 웅성거림은 권력의 추가 다시 내 쪽으로 이동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왜 재무 본부장님께서 이 썩은 늪과 같은 곳에 조 단위의 은행 대출을 투입하려 했는지를 말입니다.”

“이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뱀의 눈을 잘못 보아 석상이 되어 굳어버린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얼굴의 숙부.

이제 내 차례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깊은 함정 속 상처 입은 그를 향해 나는 무덤덤하게 창을 던졌다.

숨통을 끊기 위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도, 출신도 미천하기에 저는 잘 모르겠더군요. 왜 본부장님이 이런 쓰레기 사업을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지.”

그날, 나는 스스로의 손으로 내 머리 위에 왕관을 올렸다.

탄약그룹 회장 자리라는 왕관. 그리고 시작된 대관식.

“알았다면 공범이고 몰랐다면 무능이라 합니다. 사실 둘 다인 것 같기는 한데… 혹시 정답을 아신다면 좀 알려주시죠. 미천한 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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