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대나무 발이 걷히고(1)
평창동 저택.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톱을 질겅질겅 씹는 김성혜.
불안감에 질린 그녀에게 있어, 예쁘게 칠한 네일아트는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청주댁… 어떻게 하지? 우리 서준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거 아닌지 몰라. 어쩌면 좋아….”
“손톱은 먹는 거 아니에유. 괜히 그러지 마시구 밥이나 좀 잡숫지….”
끼니도 거른 채 종일 하나뿐인 아들 걱정뿐인 김성혜.
정신이 반쯤 가출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청주댁의 실없는 소리에도 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오늘 아침 평소처럼 자산 관리를 위해 유세나 과장과 통화하던 중에 일어났다.
‘…그러면 부동산 쪽도 자기가 상황 봐서 처분했으면 해. 아, 그리고 우리 서준이한테 넘겨준 주식. 자산운용은 잘 되어가고?’
‘전략실장님 지시대로 안전 자산 위주로 투자 중입니다. 시장수익률 이상으로 결실을 거두고 있고요.’
‘자기만 믿을게. 그나저나 혹시 회사에 무슨 일 있었어? 본사 대회의실에서 큰 소리가 났다던데…’
집안 운전기사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건너 전해 들었던 김성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유세나 과장은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그녀가 모시는 나이 어린 주군이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적지에 걸어 들어가기는 했으나, 그 안에서는 한화기의 날 선 공격이 오롯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떼어 김성혜에게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일단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모님. 그래도 다 계획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
‘저… 사모님? 말씀이 없으시네. 통신에 좀 문제가 생겼나…?’
그 뒤로 점심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김성혜는 아들 걱정에 앓아누운 상황.
의자에 기대듯이 몸을 걸친 그녀에게, 청주댁은 얼음물 한 잔을 가져다 내밀었다.
“일단 드셔유. 속에 불난리 난 건 끄고 봐야쥬.”
“내가 이거 마셔서 뭐 해… 마실 자격도 없어. 아들내미한테 도움도 못 주는 엄마인데.”
“아이구, 또 시작이시구먼.”
멍한 모습으로 눈에 초점마저 사라진 김성혜.
그녀는 한화기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차가움, 신중함. 그리고 잔인함까지.
그렇기에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 아들에게 발톱을 드러내었다 함은, 반드시 숨통을 끊겠다는 확신이 있다는 뜻일 터.
“내가 괜한 걸 바랬나 봐….”
눈가에 핑그르르 맺힌 눈물.
그 눈물 때문일까?
흐릿했던 초점이 잠깐이나마 돌아온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벽 한쪽에 걸쳐져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선대 회장이 자신의 옆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가족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가족사진.
“우리 서준이가 당신처럼 되길 바랐는데….”
충격으로 쌓인 긴장감이 한 번에 풀어져서인지,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온 김성혜.
잠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도둑처럼 찾아온 불쾌한 악몽이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하나뿐인 아들이 누명을 써 감옥에 간 모습. 있어서는 안 되는 그 끔찍한 현실이 코앞에 아른거리는 그녀.
“안 돼… 우리 서준이…!”
“사모님! 사모님! 인자 좀 일어나 봐유!”
다행히 악몽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해 기억 너머로 사라지는 꿈의 내용.
귓가에 들려오는 청주댁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김성혜의 눈이 조금씩 부셔왔다.
“청주댁? 지금 몇 시… 아니, 우리 서준이는? 따로 연락 온 것 없고?”
“오후 네 시여유. 연락은 온 건 없구, 대신에 여기….”
옆으로 몸을 옮긴 청주댁.
손으로 눈을 조금 비비자 흐릿했던 초점이 조금씩 맞추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고인이 된 자신의 남편과 꼭 닮은 아들이, 번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엄마?”
“서준아! 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니. 그 전에, 회사에서 큰일이 났다면서!”
다급한 김성혜의 목소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황급히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금방 꾸었던, 이제는 기억 속에 묻혀버린 묘한 악몽의 잔상까지 더해졌기에.
“우리 아들… 어쩌면 좋아.”
“괜찮아요? 걱정 많이 했었나 보네. 이젠 염려 안 해도 돼요.”
그 순간, 투박하게 다가와 자신을 안아주는 아들.
거친 손으로 등을 토닥이며 자신을 안심시킨 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엄마, 다 잘 풀렸어.”
“어떻게 된 건데, 서준아?”
“그러니까… 지금 시간이 없어서 길게는 말 못 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한서준이 이 녀석! 빨리 안 오고 뭘 뭉그적거리는 게냐! 당장 올라오너라!
갑자기 방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서태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녀의 시어머니 또한 같이 귀가한 모양이었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은 아들. 남편을 쏙 빼닮은 그가 다시 방문을 나서며 웃음 지었다.
선물처럼 내뱉고 간 말 한마디와 함께.
“아무래도 엄마, 나 회장이 될 거 같아.”
* * * *
반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한 2층 서재에는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굳은 모습의 할머니. 이 탄약그룹의 여제는 그룹 조간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를 따로 불러내더니, 의사 따윈 묻지 않고 곧장 차에 태웠다.
“…….”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그 어떤 말조차 꺼내지 않았던 할머니.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저 푸른 눈빛 어딘가에 담겨 있는 흔들림은, 분명 무언가 큰 결심을 했다는 것을.
“저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 편하실 때 언제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것 아니라는 듯 찡긋 눈웃음을 지었다.
기가 찬 듯한 표정의 할머니. 그 표정은 무어라 쏘아붙이려는 듯 매서웠으나, 이내 다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뜸을 들인 후, 입을 연 탄약그룹의 여제.
“그간 고민이 많았다. 서준이 네 녀석을 어찌해야 할지.”
상당한 고뇌 끝에 내려진 결론.
나는 귀를 열어 진지한 모습으로 할머니의 말 한마디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후계자 낙점. 단순히 그룹 내부의 일만을 신경 쓸 것이 아니다. 특히나 문중회 쪽의 압력이 그러하고. 허지만…”
가볍게 내쉰, 여러 의미가 들어간 듯한 한숨.
고작 한나절 만에 훨씬 나이가 든 것만 같은 할머니는 희끗희끗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지금 탄약그룹이 필요로 하는 재목은 네 녀석 같더구나.”
“……!”
“원칙대로 가겠다. 그게 옳다. 다음 달 이사회에서 차기 회장으로 서준이 네 녀석을 지명하도록 하마.”
회장직.
탄약그룹의 왕관을 내 머리에 씌워주겠다는 그 말에, 온몸에 돋아난 솜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회귀 전, 뭣도 모르고 허수아비 고기 방패로 앉았던 자리가 아닌, 오로지 내 능력을 입증해 만들어낸 자리.
기어코… 온전히 내 손으로 들어오게 했다.
“내 할 수 있는 모든 조력을 아끼지 않을 터. 부디 훗날 이 선택이 옳은 것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꽉 쥔 주먹 속 터질 것만 같은 손가락.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다.
간신히 얻은 기회. 다시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후회 따위 일절 남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차디찬 감옥, 창살 안쪽에서 그토록 눈물 흘리며 바라던 지금 이 순간.
마구잡이로 벅차오르는 내 심장은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탄약그룹. 제가 최정상의 기업으로 만들겠습니다. 반드시.”
옥좌 뒤, 대나무 발 너머 수렴청정을 마친 서태후의 모습.
그저 불빛에 비친 그림자로만 보였던 그 모습에는, 만족스러움과 시원섭섭함, 그리고 선택에 대한 확신까지 서려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주름진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지긋이 잡고, 여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서태후.
마치 봄날 아침 햇살에 녹아 무뎌진 얼음송곳처럼, 할머니는 내게 지극히 인간적인 조건이자 부탁을 내걸었다.
“…서준이 네가 한 가지 받아들여야 할 사항이 있다.”
* * * *
손주를 내보낸 후, 서재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긴 서태후.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는 방금 있었던 일을 회상이라도 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간신히 내려진 후계자 낙점. 그러나 그녀는 뒤따를 후폭풍이 얼마나 거센지 알고 있었다.
‘서준이 네 입지는 아직 약한 것이 사실이다. 자칫 허면 제대로 뜻을 펼치기도 전에 내부 분열로 멸망할 수 있고. 이 점 동의하느냐?’
잠시 말을 아끼던 그녀의 손자이자, 이제는 후계자인 한서준.
그 영민함이 어디 가지는 않은 것일까?
애써 에둘러 말했건만, 그는 그 안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아챈 모양이었다.
‘숙부의 존재가. 아니, 그 존재로 인해 칼을 휘두를 제 모습이 신경 쓰이십니까?’
‘…그저 어미와 아들 간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말해 두마.’
예견된 피바람.
권력의 칼자루를 쥔 쪽은 늘 패자에게 그 어떤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서태후 그녀의 손자 또한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필시 막내아들 쪽에서 생존을 위한 반발이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
‘계열 분리. 금융 쪽 계열사 몇 개 정도는 양보할 생각을 해 다오.’
‘탄약 증권, 탄약 손해보험, 탄약 캐피탈 3사 말씀이십니까?’
‘여기에 카드사와 신용정보사까지 넘겼으면 한다. 이만하면… 퇴로는 마련되었으니, 궁지에 몰린 쥐가 너를 물지는 않을 게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의 손자.
감았던 눈을 뜬 그는, 뜻 모를 말 한마디를 덧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숙부가 그걸로 만족한다면, 그다음에 하려던 것은 일단 중단토록 하지요.’
고개를 뒤로 젖힌 서태후. 회상을 마친 그녀가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후우… 할 수 있는 최선을 만든 게야. 그룹도 살리고 어리석은 아들놈 목숨줄까지도 살려두었으니.”
고개를 떨군 서명희 이사장.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름 모를 신에게 올릴 기도뿐이었다.
부디, 작은아들이 이 결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엉뚱한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일단 그러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끝내야 할 터.”
앙다문 아랫입술을 깨문 서태후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통화 대기음. 영원 같이 이어진 찰나의 순간 끝에, 마침내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허허… 이사장님? 웬일로 제게 전화를 다 해주셨는지요?”
“문중회 쪽에서도 긴히 아셔야 할 일이 생겨서요. 아무래도 문중회장에게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상왕 격이신 분께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겠지요.”
“그저 제 자식놈이 불민할 따름입니다. 헌데, 무슨 일이시길래….”
자신의 결정에 쐐기를 박으려는 서태후.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한 이 통화가 불러일으킬 미래가 무엇인지를.
“후계자가 결정되었습니다. 대상은 한서준 전략실장. 조만간 이사회 결의가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