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대나무 발이 걷히고(2)
호텔 플로렌스 맨 꼭대기 층, 가장 깊숙이 위치한 작은 집무실.
<문중회장실>이라는 팻말이 걸린 방 안에는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만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예, 예. 그럼요. 저야 늘 이사장님 결정을 존중해왔지 않습니까. 항상 현명하신 선택만을 하신 분이시니, 이번에도 믿고 따라야지요.”
자신이 문중회장이 아님에도 당연하다는 듯 중앙 상석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는 한덕술 명예 고문.
마치 복잡한 계산 공식을 푸는 듯한 모습. 가면을 쓴 노인의 대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문중회는 언제나 그룹의 영광만을 생각합니다. 반대 세력일랑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고요.”
내뱉는 말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표정.
이마 사이 가로로 팬, 그의 깊은 주름에 그늘이 드리울 때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허허허… 이렇게 신뢰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허면, 차후에 뵙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진 웃는 낯.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아들, 한형민 문중회장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혹시 방금 전화 서태후입니까? 드디어… 결정이 난 거군요!”
“그래. 한서준이로 한다는구나.”
“한서준! 히야… 어떻게 그 어린놈이 회장 자리에 다 앉고. 이거 할망구가 치매 끼가 단단히 드셨나?”
나이 마흔이 넘었음에도 경박한 언행을 일삼는 한형민 문중회장.
고작 스물다섯밖에 안 되는 한서준과 너무나도 비교되는 그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난 한덕술 명예 고문이 역정을 내었다.
“칠칠찮은 놈 같으니! 경망스럽게 유난 떨지 마라! 예상 범주 내에 있었던 일이거늘.”
“아니, 왜 또 화를 내고 그러시고… 아무튼, 잘됐네요. 아버지 생각대로 돌아가는 일 아닙니까.”
한형민 문중회장을 노려보며 애써 화를 가라앉히는 한덕술 명예 고문.
책상 앞, 차가운 얼음물을 들이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우… 되었다. 지금은 그저 바삐 움직여야 할 때다.’
당장의 불쾌한 감정 따위에 휘둘릴 때는 아니었다.
YSS정밀, 영일금속, BT화학. 탄약그룹 최대 하청업체 3곳. 집안의 재산 대부분이 세 회사 지분 투자에 들어간 상황.
여기에 한율산 전 간사가 이 사실을 알았으니, 시간은 더 이상 그의 편이 아니었다.
“상황은 좋다. 이긴 놈이 압도적이지 못하고 진 놈도 파멸되지 못했으니, 패자에게 거간꾼이 붙기에 가장 좋을 때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목소리.
자신의 아들에게 휴대전화를 내던진 한덕술 명예 고문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아버지?”
“한화기에게 연락해라. 지금쯤 전화허면 딱 알맞을 게다. 슬슬 나갔던 정신도 돌아왔을 것이고.”
“그러면… 제가 뭐라고 말하면 될까요? 저 작전 같은 건 못 짜는 거 아시면서…”
“기대도 허지 않았다. 넌 약속이나 잡거라. 전화로 모든 것을 논할 사항은 아니니, 우선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무능하고 한심한 외동아들.
한덕술 명예 고문은 알고 있었다.
아직도 마냥 어린 것만 같은 이 늙은 아이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깜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불쌍한 녀석… 그러니 이번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아니 될 터.’
분명 그의 사후, 자기 아들이 걷게 될 내리막길이 눈에 선했기에, 한덕술 명예 고문은 다시 한번 독한 마음을 먹어야만 했다.
어지간한 사고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반석을 만들어 물려줄 의지를.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쾌활한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 나가는 한형민 문중회장.
“아이고, 본부장님! 저 한형민입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저희 문중회 쪽에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한화기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듯한 못난 아들의 모습.
진땀을 흘리는 한형민 문중회장이 전화기를 붙잡은 채로, 제 아버지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사실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뵙고 싶다네요. 예? 아…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 맞춰서 준비하겠습니다.”
끊긴 통화.
머쓱한 얼굴의 한형민 문중회장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오늘 밤에 바로 보자는데요? 한화기 그 양반도 어지간히 급한가 봅니다.”
“그럴 수밖에. 형민이 네 녀석도 이번에 잘 배워 두거라.”
“아버지. 뭘 어떻게 하시려고….”
책상 위에 놓인, 탄약그룹의 상징인 불꽃 모양 조각상을 매만지는 한덕술 명예 고문.
방계이기에 경영 일선에 직접 나설 수는 없다. 무대 위, 환한 빛을 받으며 관중 앞에 나서는 것이 허락되는 것은 오직 직계뿐.
“인형극은 말이다. 그림자에 숨어 실체를 움직이게 만든단다.”
하지만, 연극을 총괄하는 무대장치는 항상 무대 바깥에 있는 법.
깜깜한 어둠 속, 남들이 볼 수 없는 가장 구석진 곳에 선 조종사는 인형의 팔다리에 실을 묶는다.
“줄을 쥐는 법부터 당기고 밀고 자빠트리는 법까지. 오롯이 네 것으로 만들도록 하거라.”
품 안에 손을 넣어 새로운 휴대전화를 꺼내 든 한덕술 명예 고문.
조그마한 액정에 비친, 한글도 영어도 아닌 문자와 숫자의 조합.
해외 번호로 걸린 전화가 연결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你好。你近来怎样?
(안녕하십니까.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유창한 발음의 중국어.
간단한 인사말이 몇 마디 오간 후, 마침내 한덕술 명예 고문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我与您联系是因为您可能对某些事情感兴趣。
(관심 있으실 법한 것이 있어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다가올 재벌가의 전쟁, 그리고 이를 위한 자금줄의 확보.
눈을 부릅뜬 노인의 망막에 사모펀드 하나의 이름이 비쳤다.
-<상하이 캐피탈>
한덕술 문중회장이 YSS정밀, 영일금속, BT화학 세 회사의 지분을 취득하는 데에 도움을 준, 중국계 사모펀드.
금단의 열매임을 알면서도, 주름진 노인의 손이 사과나무에 매달린 과실로 향했다.
“弹药集团的主导地位。这不值得吗?
(탄약그룹의 지배권. 충분히 가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 * *
탄약그룹 본사. 한화기의 집무실.
책상 앞에 선 유지원 감찰팀장. 평소 들려오던 고함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집무실에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한화기의 앓는 소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했다. 손쓸 수도 없이, 처참하게.”
“본부장님… 그래도 아직 기회가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비자금을 향한 내부 감사가 모조리 수포가 된 상황에서, 분명 한화기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아 보였다.
실적과 명분. 두 가지 무기를 양손에 쥔 채, 그의 정적인 조카가 걸어둔 수를 되쳐 버린다는 그림.
그러나, 코를 찌르는 듯한 비릿한 피 냄새에 이끌려 발을 디딘 곳은, 뾰족한 가시나무를 꽂아 놓은 함정이었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대답하는 한화기.
“회장 자리는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계열사 일부라면 몰라도 그룹 전체까지는….”
완벽한 패배.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의 조카를 데리고 말없이 어디론가 가버린 서태후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분명 다음 달 열리게 될 이사회에서 회장 임명안이 상정될 터였다.
‘하아, 내 팔자야. 줄을 서도 꼭 이렇게 개떡같이 서서….’
제 주인의 탈진한 모습을 바라보는 유지원 감찰팀장.
운이 좋아 계열사를 분봉 받는다 한들, 그 역시 곁가지로 분류될 것이 분명할 터였다. 책임을 뒤집어쓸 박한이 사장이나 나덕술 사장 꼴이 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
‘하여간 구석수, 정철식, 성원식 요 세 미꾸라지는 진짜… 언제 줄을 바꿔 탄 거지? 아주 빠꼼이가 따로 없네.’
배신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표정을 찡그린 유지원 감찰팀장.
그 순간, 다가올 불쾌할 미래를 상상하던 그의 귓가에 무언가 진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어? 분명 무음으로 했던 것 같은데… 아, 내 게 아니구나.”
책상 옆 옷걸이에 걸린 한화기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진동.
제 주인이 손짓한 대로, 유지원 감찰팀장은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내어 조심스레 한화기에게 내밀었다.
“그… 한형민 문중회장 전화입니다만. 어찌할까요?”
“한형민…?”
죽어가던 눈을 다시 부릅뜬 채 액정에 표시된 이름을 바라보는 한화기.
꼭두각시는 직접 손발을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분명… 문중회장. 아니, 그 뒤에 있는 한덕술 명예 고문 역시 오늘 일에 대해 알고 있을 터.
한화기가 그 숨은 뜻을 유추해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받아봐라. 아니, 이리 줘라. 내가 직접 받지.”
낚아채듯 가져간 전화.
가벼운 인사말이 한두 차례나 오갔을까?
그는 곧바로 답답하다는 듯, 귓가에 들려오는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일축했다.
“나는 서론을 길게 가져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만 묻지요. 지금 문중회장님께서는 결정권을 가지고 계십니까?”
전화기 너머 진땀을 빼는 꼭두각시의 대답. 한덕술의 존재가 뒤에 있음을 확인한 한화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짧게 통보하듯 말했다.
“오늘 밤에 바로 뵙지요. 끝나는 대로 호텔 플로렌스로 가겠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꺼진 모니터 화면에 비친 한화기의 얼굴에는 마치 모자이크로 이어 붙인 듯, 수많은 표정이 혼재되어 있었다.
“끝인 줄로만 알았건만… 모를 일이군.”
분명 손쓸 수 없는 타격을 받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기적처럼 내려온, 가면 아래 내려진 한 줄기 구원의 손길.
설령 그 손에 든 성배에 독이 있다 하더라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
결단을 내린 한화기가 유지원 감찰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봐, 유지원이. 그룹 순환출자 구조. 바로 정리해서 가지고 와.”
* * * *
충청남도 서산.
뻘밭 바로 뒤편, 매섭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막기 위한 소나무 사이에 놓인 바위.
그곳에 걸터앉은 백발의 노인 한 명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하니, 이사장님께서 한서준이 그 어린놈을 회장 자리에 올리실 줄이야….”
혼잣말을 내뱉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한율산 전 간사.
그의 복잡한 머릿속에는, 마치 표류 중인 뗏목처럼 키워드 몇 개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서준, 한화기, 회장 자리, 비자금. 그리고… 아마 계열 분리까지.”
까끌까끌한 소나무 껍질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는 한율산 전 간사.
문득,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그의 눈가에 들어왔다.
아직 작은 키에 얇은 둘레의 소나무. 그러나 분명 뻗어진 가지 모양으로 유추해 볼 때, 분명 시간이 지나면 탄탄한 재목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마치… 신임 회장직에 내정된 한서준처럼.
“그래. 네놈이 재목이기는 허나, 충분한 성장이 필요하다. 거기에… 이 씨앗돈이 외려 도화선이 될지는 또 모르는 법.”
혼잣말을 내뱉는 한율산 전 간사. 그는 집안 구석 금고에 고이 잠든 비자금 계좌의 비밀번호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금융 쪽 계열사의 분리가 점쳐지는 상황. 자칫 거액의 비자금은 자본에 의한 재통합을 야기할 수 있었기에.
“숲을 모조리 태워서는 아니 되는 법이지.”
한율산 전 간사의 눈에 들어온 소나무 군락.
그저 싹이 훌륭한 어린 소나무만을 잘 키워야 하는 것이 아닌, 해풍을 견뎌낼 숲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결론.
그 순간,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다잡는 고집 센 노인의 눈에 멀리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딱 맞춰 오는구먼.”
저쪽에서도 한율산 간사의 모습을 본 듯, 손을 흔드는 두 사람.
평상복 차림의 빛나는 대머리 하나와 이제 갓 어린 티를 벗은 청년 하나.
바위 위에 앉은 노인이 모시 두루마기 자락을 흩날리며 소리쳤다.
“젊은것들이 무슨 그리 발이 느린가! 빨리 오지들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