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대나무 발이 걷히고(3)
“아이고, 똑 닮았구먼, 선대 회장 젊은 시절허구 붕어빵이유. 안 그려유, 영감?”
“크흠, 쓸데없는 소리 허지 말고. 거, 임자는 좀 가만히 있어 보라니까!”
“회장 자리 물려받을 사람 앞에 두고서 괜히 심술보는… 그쯤 허구 인자 주시구랴. 그 비밀번호.”
나를 앞에 둔 채, 다짜고짜 자기들끼리 100분 토론을 열어나가는 두 노부부.
심지어 같이 온 김원철 아저씨는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다.
한율산 전 간사가 방해된다며 갑자기 읍내로 막걸리를 사러 보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허! 여편네가 재촉은… 주든 말든 일단 사람 됨됨이부터 좀 보자고!”
“뻔한 걸 가지고… 그럼 실컷 보시구랴. 나는 들어가 있을 터이니.”
미닫이문을 열고 나간 김복희 여사. 감사하게도, 내가 회장직에 오를 것이 내정되었다는 말에 이미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흐음….”
반면, 남은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고심하는 한율산 전 간사의 모습. 미간에 깊은 밭이랑을 만든 이 노인의 얼굴에는 고뇌라는 씨앗이 잔뜩 뿌려진 모양이었다.
여전히 날 반대하는 걸까?
분명 전해 듣기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숙부를 지지했다고 하는 한율산 전 간사.
아직 눈앞에 이 영감님의 정확한 생각을 모르기에, 조용히 입을 닫고 반응을 보며 답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분명 부족하기에,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우회 따위 하지 않는, 정공법이라는 결단을.
“백 마디의 장황한 말보다, 한 마디의 함축된 문장이 낫다고 했습니다.”
“뭐라?”
분명, 아버지가 비자금 계좌의 비밀번호를 믿고 맡길 정도의 사람.
그는 오로지 탄약그룹과 한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움직이는 자였다.
그런 한율산 전 간사가, 단지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숙부를 지지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짧지만 분명한 세 기업의 이름과 함께 내가 내민 서류뭉치 하나.
“YSS정밀, 영일금속, BT화학.”
“……!”
문중회를 위해. 아니, 문중회를 넘어 그룹 전체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움직이는 한율산 전 간사.
그가 내게 보고 싶은 것, 그리고 내가 그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은 결국 거울에 비친 상(相)처럼 똑같은 존재가 마주 보는 것이었다.
문중회를 업고 전횡을 일삼으려 하는 한덕술 명예 고문과 상하이의 중국계 사모펀드.
탄약그룹의 회장은, 이들의 머리 위에서 이들을 능히 저지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기업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재무와 회계라는 도구를 통해서.
“직접 분석해보았습니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그랬더니… 제법 재미있는 내용이 튀어나오더군요.”
“네 녀석 눈에… 이게 보였단 말이더냐?”
“모든 장부에는 발자국이 있으니까요. 눈 덮인 설원처럼 새하얀 종이 위에 새겨진 자본이라는 발자국 말입니다.”
마치 돋보기를 들어 눈길에 찍힌 발자국이 가리키는 방향을 분석하듯, 나는 손가락으로 최근 대주주 변동 내역을 가리켰다.
육중한 몸뚱이를 움직여 자신이 지나간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돈의 흔적을.
“기관과 외국인 비율이 지나치게 높아졌습니다. 매집 패턴으로 보아 쩐주들이 작전용으로 작업 치는 건 아니고요.”
“…계속 들어 보지.”
“시세 차익을 노리고 단타로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매우 급하게 해당 세 회사의 의결권이 필요했던 상황인 거죠.”
나는 서류뭉치를 넘기며 주가 그래프를 분석한 것을 한율산 전 간사에게 보여 주었다.
부둣가에 들이닥치는 거센 파도처럼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푸른 막대.
한참을 밑으로 내려가던 거래량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갓 분출된 붉은색 용암처럼 위쪽으로 솟구쳐 올랐다.
“탄약그룹 하청 업체인 세 회사 모두 타이밍이 같습니다.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 해답은 거기에 있더군요.”
어서 내가 찾은 해답을 말해 보라는 듯, 내 눈을 지그시 응시하는 한율산 전 간사.
꿀렁거리는 노인의 목울대 너머로 무언가 희망 또는 가능성 비슷한 것이 넘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보았느냐?”
“탄약그룹이 하청회사에게 주는 발주 금액이 증가할 것이라는 확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룹 수뇌부의 통제권, 또는.”
서류 끝자락을 꽉 쥔 내 손.
마치 종잇조각이 탄약그룹 전체라도 되는 듯, 절대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저 고집 센 노인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의지의 표명 바로 다음으로 이어질 사항. 그것은 한율산 전 간사가 그토록 염려하는 사항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문중회와의 연관성. 전자는 회장 자리에 오를 제가 허용 안 할 테니, 남은 것은 후자 아니겠습니까?”
* * * *
한율산 전 간사의 한옥 바깥, 도보로 5분여 거리에 있는 소나무 군락.
바닷바람을 마주한 푸른 솔잎이 흔들거리는 소리가 꼭 마라카스 같은 체명악기를 연주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소나무 사이, 사람 너덧 명은 충분히 앉을 법한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 하나.
“겨우 읍내 갔다 오는 걸로 무슨 놈의 시간을 이래 잡아먹나! 퍼뜩 안 오고 뭣 하는 게야?”
“하이고, 어르신. 저번에 갔던 마트가 망해서 뺑뺑 돌았다니까요.”
양손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입이 삐쩍 나온 채 툴툴거리는 김원철 아저씨.
“그리고 그냥 집에서 드시면 되지 뭘 예까지 나와서 분위기나 잡을라 하시고….”
“어허! 아직도 이 철딱서니가 정말…!”
“아, 또 지팡이로 때리시려 한다. 진짜.”
약간의 소동이 끝나고, 바위에 앉은 한율산 전 간사가 술통 뚜껑을 따,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고즈넉허지? 여기 분위기.”
“좋네요. 소나무 사이로 지는 해가 바다에 잠기는 것처럼 보이고요.”
“여 있으면 저 거센 바닷바람도 좀 덜 맞고 좋지. 그저 달랑 나무 한두 그루만으로는 막지 못하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불어오는 해풍.
허옇게 센 머리칼을 흩날리며 노인이 말했다.
“이 늙은이는… 숲이 타지 않았으면 했다. 탄약그룹이라는 소나무 숲이.”
“아까 보여드린 모습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시는지요?”
“아니, 차고도 넘친다. 능히 회장으로서의 일을 잘할 게다. 다만, 우려되는 점이 있을 뿐.”
잠시 말을 아끼는 한율산 전 간사. 그는 바위 바로 옆에 심어진, 나이를 얼마 먹지 않은 어린 소나무 줄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무언가 우려와 불안함이 섞인 목소리.
“금융 계열 분리. 애써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이려 하다가는, 이 녹진한 송진에 금세 불이 붙고 말 터.”
벌써 탄약 증권을 필두로 한 금융 계열사의 분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한 한율산 전 간사.
뒤이은 그의 말에, 나는 비로소… 그가 왜 나를 이 자리에 앉게 했는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분으로 타버린 그룹은, 더는 바닷바람을 막지 못할 것이다.”
“제가 도망쳐 나간 숙부의 등에 칼을 던지리라 생각하십니까?”
“도화선을 쥔 녀석에게 성냥을 줘야 하는 심정인 게지. 줄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일평생을 걸고 지킨 것이 행여나 바스러져 없어질까 불안해하는 노인.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백기를 들고 내게 말을 덧붙였다.
나름의 안전장치를 달아 둔, 천 조각 위에 조건이 쓰인 백기를.
“…비자금 계좌 비밀번호는 곧바로 넘겨주마. 단, 그 돈으로 한화기 몫의 회사를 삼키려 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지못해 마음을 정한 한율산 전 간사.
그의 눈은 내가 아닌 소나무 숲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선택이, 미래의 후회가 되어 다가오지 않기만을 바란다는 듯이.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인의 그 선택은 필시 옳을 것이다. 내가 옳게 되도록 만들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약속드리겠습니다. 숙부 몫의 금융 계열사, 다시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분으로 그룹이 망하는 일 또한 없을 겁니다.”
“…약조하면 되었다.”
바닷바람이 부는 늦여름의 저녁. 찌그러진 놋쇠 잔 세 개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비자금을 가지고 오기 위한 모든 퍼즐 조각이 모였다.
그리고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들 사이로, 나에게만 들릴 듯 말 듯 한 김원철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흐… 우리 전략실장. 저, 저, 약아빠진 거….”
* * * *
다음날.
김원철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은 자동차 안에서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신이 중얼거렸던 말을 기억하냐며 먼저 운을 띄운 김원철 아저씨.
창문 너머 사이드미러에는 내 묘한 표정이 비쳐 보였다.
“약아빠지다니요. 저는 그저 그룹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르신께 진심으로 대했을 뿐입니다.”
“낄낄낄. 분사되는 금융 계열사. 그 속에 폭탄 채워서 껍데기만 넘길 거면서. 한서호 그 바보가 독인 줄도 모르고 좋다고 원샷했다지?”
그저 부처님같이 얼굴에 미소만 띤 채로 휘파람을 부는 나.
그런 내 모습이 조금 얄미운 모양인 듯, 김원철 아저씨는 오른쪽 팔꿈치로 나를 살짝 건드리며 물음을 던졌다.
“<코코아 뱅크>. 이미 탄약증권이 발행한 파생상품 매입 끝났다지?”
“유세나 과장이 일을 참 잘합니다. 소리 소문 없이 말이죠. 그리고….”
어차피 계열 분리를 시작한들, 폭탄만이 가득한 그 금융 계열사들을 내가 다시 찾을 필요 따위는 전혀 없다.
한율산 전 간사가 우려하는 일도, 내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지도 않는 해답은 이미 마련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조금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조수석 창문을 올린 내가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 한덕술 문중회 명예 고문 건 캐면서 알게 된 그 중국 쪽 사모펀드. 자꾸 눈길이 가더라고요.”
“그 뭐냐, <상하이 캐피탈> 걔들? 근데 금마들은 캐도 영 정보가 안 나오데. 좀 아는 사람이 없나 싶드만.”
무언가 답답한지 셔츠 맨 윗단추를 풀어헤치는 김원철 아저씨.
그럴 법도 하다. 상하이 캐피탈… 지금으로서는 흑막 속에 감추어진 놈들일 테니.
-딩동! 전방 100m 앞 서울 방면으로 수락산 터널 입구입니다.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음성과 함께 어두컴컴한 터널로 들어선 차량.
순간, 코팅된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에는 씻어지지 않을 정도의 분노가 서렸다.
“…이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뭐를? 중국집 애들을 실장님이? 어떻게?”
어떻게 알긴.
회귀 전, 탄약그룹이 망하고 갈기갈기 찢어졌을 때. 방산 부문을 떼어간 상하이 캐피탈.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잊힐 리가.
“그러게요.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놈들인데.”
“응? 무슨 소리인지, 원…”
터널 속 어둠 사이로 은은한 오렌지색 불빛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예전 감옥 안에 있던 시절, 흘러가는 기억을 되짚어보며 빛을 기다리던 그 기분이 묘하게 떠오르는 지금.
터널 끝자락에서 다가오는 빛줄기가 다가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정리했다. 해이해져 버렸을 수도 있는 마음을 다잡으며.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큰 뿌리까지 캐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