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대관식(1)
여의도의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분명 남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바로 앞에 드넓은 한강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집.
그러나 누군가에게 저 풍경이 의미하는 바는, 무언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채, 속옷 차림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박한이 사장.
창가를 향해 손을 뻗은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옘병… 이대로 창문 바깥으로 쩜푸 뛰어서 물고기 밥이나 되는 게 낫나 싶다야. 다음 달 이사회에서 한서준이가 회장 되면 다 끝이여.”
“하! 거지 같은 소리 할 거면 나는 또 왜 불렀대? 아, 해결책 논의하자고 먼저 말한 사람이 선배 아니요!”
그런 그를 향해 갑갑한 듯 소리를 지르는 나덕술 사장.
이미 직위해제 후 대기 발령 상태인 박한이 사장은, 지난번 그룹 조간 회의 이후 반쯤 자포자기한 상황이나 다름이 없었다.
“답이 안 나와서 그렇지… 인자 깜빵 말고는 갈 데가 없어야.”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러니까 바로 한화기 앞에서 둘이 대가리 박고 싹싹 빌자니까! 살려달라고!”
“하이고, 이 모자란 인간아… 이라크 건 푸짐하게 싸 놓은 거 들켰는데. 그 양반이 우릴 살리겠냐?”
아직 한화기로부터 그 어떤 구원의 동아줄은커녕, 매서운 질책조차 받지 못한 두 사람.
그렇기에 불안감은 평소 다른 사고를 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어떤 처분이 이루어질지, 한 치 앞을 내려다볼 수 없는 상황.
“니기미… 성원식이 그 빠꼼이처럼 나도 줄이나 좀 갈아탈 걸 그랬나?”
박한이 사장의 입에 올라간 성원식 사장의 이름.
이미 지난 그룹 조간 회의에서 구석수 사장, 정철식 전무와 함께 한서준의 편에 붙은 것을 천명한 자였다.
외부 출신인지라 견제구도 많이 받아냈던 그였다. 이라크 건 또한 박한이 사장 자신 대신 가장 큰 리스크를 졌어야 했었거늘.
“원래는 성원식이가 주범으로 뒤집어쓰고 우리는 하꼬 공범으로 가는 건데! 그 배신자 새끼가….”
양 손바닥 가득 머리털을 쥐어뜯듯 움켜쥐는 나덕술 사장.
소파에 누운 성원식 사장은 그런 자기 후배를 보며 말했다.
“보니께 통수도 타이밍이여, 타이밍. 그러니까… 너나 나나 죽을 때 죽더라도.”
손가락으로 거실 장식장 안 고급 양주를 가리키는 박한이 사장.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짙은 갈색 술병을 꺼냈다.
“요로코롬 때깔 좋게 죽자고잉. 인자 당분간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니께.”
“잘나셨소, 정말. 다 포기했다 이거구먼.”
장식장 유리 바로 앞에 비친, 늘어진 메리야스 차림의 폐인의 모습.
목울대 너머로 흘러 넘어가지 못하고 입가에 흘린 술은 하얗던 메리야스를 금세 갈색으로 군데군데 물들였다.
“맛이 갔네. 사람이 맛이 갔어… 어어? 잠깐만, 이거….”
한심한 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덕술 사장. 갑자기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벨 소리와 함께 초록색 불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야, 드디어 시작했다냐? 아직 회장직 임명도 안 되았는데 벌써 단두대 올라가라는겨?”
“아, 선배! 그런 거 아니니까, 좀 가만히 있어 보라고! 입 좀 닫고!”
생각 밖의 인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던 걸까?
군기가 바싹 든 이등병처럼, 차렷 자세로 전화를 받는 나덕술 사장.
“하아… 예, 서호 도련님. 나덕술 사장입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한화기의 장남 한서호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함 섞인 질타는, 옆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잡음처럼 들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전부 저희 불찰입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죄송합니다.”
“옘병… 즈그 애비 회장 만들라고 무리 좀 한 건데, 죄송은 지들이 해야지. 끄흑!”
대낮부터 시작된 술주정. 그것도 중요한 내용을 듣는 중에 지껄이는 망언에, 곧바로 눈을 흘기는 나덕술 사장.
그러나 그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한서호의 말은 그의 두 눈을 왕방울처럼 휘둥그레지게 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제가 감히 그래도 될는지요?”
“얼레? 잠깐만, 잠깐만. 덕술아, 아니, 아니, 나 사장아. 나도 같이 좀 듣자야.”
질척이며 다가오는 주정뱅이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는 나덕술 사장.
그는 마치 바로 코앞에 윗사람이 있기라도 하는 양,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본부장님께 받은 이 은혜,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 갚아나가겠습니다!”
끊긴 전화와 함께 붉게 상기된 두 볼.
곧바로 다른 의미로 빨간 볼의 박한이 사장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질문했다.
“한서호여? 그 한화기네 큰놈?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자네가 그러는 것이여?”
“회장 임명… 문중회 끼고 뒤집을 수 있다고 하더이다. 선배, 일단 어찌어찌 살긴 산 것 같소.”
“뭣이라고! 자세히 말해 봐봐! 언능!”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한강 다리. 개미 떼처럼 수많은 자동차 불빛이 깜빡거리며 한참을 지나가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자기 턱을 매만지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 두 남자.
이미 술기운 따위는 어딘가로 증발해버린 지 오래였다.
“선배. 이거 마지막 기회요. 무조건 되게 만들어야 해.”
“그라제. 이번에 뒤집는 것이여. 한서준이 발모가지가 잘릴지, 우덜 모가지가 잘릴지. 어데 한번 해보자고.”
핏발 선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그들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살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노라고.
* * * *
호텔 플로렌스 꼭대기 층.
통화 종료음과 함께 한서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랫것들 두 놈은 명하신 대로 따르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네가 수고가 많았다. 이제 어른들끼리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너는 잠시 나가 있거라.”
제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방문 밖으로 나서는 한서호.
그는 비슷한 나이대인 한형민 문중회장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마치 중요한 결정은 어르신들끼리 하라는 듯이.
“허허허… 일이 잘 풀리는구먼. 그러면 슬슬 정리해 볼까?”
푸근한 인상의 한덕술 명예 고문.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속내의 그가 한화기에게 말을 건넸다.
가운데 놓인 탁자 위에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주고받은 흔적이 종잇조각의 형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충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일단 이사회에서 한서준이의 회장직 임명안이 통과되면, 곧바로 문중회에서 주주총회를 열자고 할 걸세.”
손에 쥔 만년필로 도식을 그려 나가는 한덕술 명예 고문.
안쪽에 ‘이사회’라고 쓰인 동그라미 안에는, 후계자 지명권이 있는 서태후의 이름이 한서준과 함께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이름 위에 덮이듯 그려진 가위표시 하나.
기존의 모든 구조를 무의미하도록 만들, 그들의 반란에 필요한 무기는 중국계 사모펀드의 자금이었다.
“그러면… <상하이 캐피탈> 쪽에서 돈을 움직일 게야. 자네가 일러준 그룹의 약한 고리. 거기에 집중적으로 자금이 투입될 걸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계열사 간의 사슬 어느 한 곳에 만년필 펜촉이 향했다.
적은 자본으로 공룡과도 같은 재벌그룹을 움직일 수 있는 순환출자 구조.
가장 비밀스럽게 보호받아야 할 약한 고리는,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에 의해 굳게 닫힌 성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이거야 원, 순환출자 구조. 평소 불안했던 것이었거늘. 반대 입장이 되니 지금 와서는 만만해 보이는구먼. 허허허.”
“한 가지 더, 어르신께서 잊지 마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은회색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탕한 척 웃는 노인. 한화기는 그런 그에게 손가락 하나를 펴며 말했다.
“문중회 구성원들에게 한서준 그놈이 첩 자식이라는 사실 또한 퍼트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정적인 조카에게 족쇄처럼 달린 혈통 문제.
첩 자식이라는 반쪽짜리 혈통에 분명 문중회 내부에서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야 마땅히 해야 허는 것이지. 아무 걱정 말게나. 그저 자네가 따로 신경 써야 할 것은.”
노련한 도박사처럼, 원하는 것을 테이블 위에 올린 채 싱긋 웃고 있는 한덕술 명예 고문.
노인은 한화기에게 덤덤한 어투로 세 회사의 이름을 읊어나갔다.
“YSS정밀, 영일금속, BT화학.”
“…아까 들으신 대로, 우선 중공업과 건설에서 필요한 발주 금액을 다섯 배로 늘리라 지시했습니다. 단가에도 여유를 붙여서.”
“장기공급계약 건도 유념토록 허고. 위약금 조항은 최대한으로 잡아 놓을 걸세.”
“염려 마십시오. 뜻하신바 이룰 수 있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그제야 만족한 듯, 한덕술 명예 고문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마침내 충족된 서로 간의 이해. 어느덧 바깥에 깔린 차가운 밤공기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미처 말하지 못한 찝찝한 느낌과 함께.
“그리고… 상하이 놈들이 원하는 것 또한 잊지 말게. 뭐,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 * * *
상하이.
양쯔강 삼각주가 내려다보이는 사무실 안에서는 팩시밀리가 기계음을 내며 종잇조각을 내뱉었다.
-발신처: 탄약그룹 문중회
-수신처: 상하이 캐피탈
곧바로 내용을 확인한 직원. 그는 다시 검은색 결재판에 팩스 종이를 넣어 자기 상사에게 올렸다.
“제임스 왕 이사님. 한국의 탄약그룹 문중회에서 결론을 낸 모양입니다.”
“이리 다오. 내 직접 보겠다.”
비교적 세세한 내용까지 전부 적힌 문서.
순환출자 기업집단이기에 손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생각보다 자금이 더 많이 드는 모양이었다.
제임스 왕 이사라 불린 그는 흑갈색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이내 짙은 연기를 내뿜었다.
“최소 50억 위안은 들어가겠군.”
“반대급부를 많이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하 직원의 말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제임스 왕 이사.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던 그는, 결재판에 낀 팩스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넣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족할 것이다. 불필요한 부분은 도려내고, 핵심만 가져간다.”
“허면, 지시하신 내용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옆구리에 가지고 온 결재판을 그대로 끼고 방문을 나서는 부하 직원.
긴 복도를 지나는 그의 팔이 앞뒤로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끼워진 서류는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툭!
마침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진 팩스 서류.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워 든 직원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대로 다 얻어낼 수 있다면… 북부전구 군을 쥐고 있는 우리 쪽 세력이 더 강해지겠군.”
은은한 복도 전깃불에 비친 팩스 문서. 중앙부의 거칠게 갈겨쓴 손글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핵심 방산 기술이전
-해외 자원 개발권 염가 매각
“하늘이 도왔다. 저쪽 집안싸움 덕분에 주인께서 대어를 낚게 생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