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대관식(2)
시간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흘렀다.
이사회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 동안, 손자를 데리고 몇 가지 회사 상태에 대해 정리하듯 짚어준 서명희 이사장.
“아무리 내 손주지만 대단한 놈이로군. 정말이지 제 아비가 죽기 전에 보였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다.”
고작 핵심적인 단어 몇 개만 툭툭 던지듯 나열한 것에 불과했거늘, 순식간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그의 손자.
의자 목받이에 머리를 기댄 서태후는 최근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 사업은 당장은 적자가 날지언정, 반드시 가지고 가야만 하는 것인 게다.’
‘아아, 공업용 로봇 산업 기술 개발이 벌써 이 수준까지 올라갔군요. 향후 독일제나 일제 자동화 시스템을 쓰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런 셈이지. 알고 있으면 되었다.’
마치 미래에서 미리 보고 오기라도 한 듯, 모든 내용을 마른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손자의 모습. 그녀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의구심에서 놀라움으로, 놀라움에서 대견함으로 변했던 감정.
그것은 이제 신뢰라는 이름의 듬직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자신의 후견 없이도 온전히 믿고 맡길 수 있을 법하게.
“이제 새로운 해가 뜰 때도 된 것인가 보구먼.”
어느새 아침이 밝아온 모양인지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 노랫소리.
저택 서재 책상 위. 흑색 상아로 만든 명패에 비친,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듯 만지던 서태후.
자개를 음각으로 박아 넣은 명패에는 탄약그룹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이제 이건 더는 쓸모도 없겠군.”
안도의 날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서태후. 카펫 위를 천천히 걸으며 장식장 쪽을 향하던 그녀의 눈에 은제 감사패 하나가 들어왔다.
-[탄약그룹 한씨 집안 문중회장 한형민]
그룹의 상징인 불꽃을 조각한 감사패. 그 일렁이는 곡선이 오늘따라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것은 서태후의 착각이었을까?
“분명 문중회에서 반발이 있을 법도 했거늘… 유달리 조용하구먼. 심지어는 내 아들놈까지 전부.”
아무런 반발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문중회뿐만이 아니었다.
회장 자리를 두고 손자와 경쟁하던 제 작은아들, 한화기.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는 것처럼, 그는 처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회장 자리는 네 것이 아닌 모양인 듯 허구나. 아쉬워하지도, 넘보려 하지도 말거라.’
‘…이사장님께서 결정을 내리셨으니,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금융 쪽 계열 분리로 만족했으면 한다. 이것이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니.’
무덤덤한 모습을 하던 작은 아들.
서태후는 알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을 숙인 채,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나간, 한화기의 얼굴에 서린 표정을.
그저 등골을 타고 오르는 묘한 기시감 내지는 찝찝함만이 그녀의 직감 어딘가에서 남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을 뿐.
“…이것이 최선이겠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으니.”
그런 질척한 기분을 애써 털어내려는 듯,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서태후.
때마침 들어온 그녀의 개인 비서.
이제 곧 출발할 시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이사장님. 준비 모두 끝났습니다.”
“서준이 녀석은?”
“곧 내려오실 겁니다. 같이 가실 수 있게 차량 대기해 두겠습니다.”
마침내 오늘.
이사회에서 최종 의결이 마무리된다면, 회장직 임명에 필요한 선결 조건은 마무리될 것이다.
이미 문중회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았기에, 주주총회는 크게 걱정이 없는 상황.
“슬슬 가지.”
소복이 쌓인 눈 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문밖을 나서는 서태후.
손자와 함께 차량에 오르는 순간, 그녀는 홀로 말없이 묵상에 잠겼다.
부디 이 젊은 피가 그룹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 * * *
“아주머니? 이거 너무 조이는 것 같은데… 그리고 제가 하면 됩니다만.”
“사모님이 꽉 매어 달라고 하셨는디… 지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어유.”
숫제 내 목 중간의 경동맥을 조를 기세로 넥타이를 세게 매고 있는 청주댁 아주머니.
막 피어오른 불꽃처럼 붉은색을 띤 넥타이는, 상당히 오래된 물건이었던 모양인지 표면이 거칠고 낡아 보였다.
흰 셔츠에 챠콜 그레이색 정장까지 갖춰 입은 내 모습.
전신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고정한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데, 문손잡이가 돌아가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머, 벌써 다 끝났어?”
“사모님 오셨구먼유. 시키신 대로 절대 못 풀게끔 아주 꽉꽉 조였슈.”
“응…? 어머! 어머! 아줌마, 잠깐만!”
어느새 벌겋게 된 내 목을 보고 놀란 엄마. 조금 답답하다 싶었더니, 어쩐지 너무 많이 조인 모양이었다.
“세상에! 어쩜 좋아! 내가 튼튼하게 매달라 했지 아주 숨도 못 쉬게 꽉꽉 조여 놓으면 어떻게 해요!”
“지는 그런 거 잘 몰러유. 식순이가 뭘 알아야쥬.”
“내가 아줌마 때문에 못 살아… 내가 다시 매야겠네.”
한 발짝 내 앞으로 다가온 엄마.
풀어헤친 넥타이에 어느새 주름진 엄마의 손이 닿았다.
웬일인지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한 채,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모습.
걱정되는 감정을 담아, 나는 조심스레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말없이 고개만 가로젓는 엄마.
내가 건넨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화답이 온 것은, 무언가 차오르는 듯한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은 후였다.
“이래서 내가 직접 안 하고 청주댁더러 해 달라고 한 건데….”
“엄마?”
“이 넥타이 말이야. 네 아버지가 즐겨 매던 거였거든. 오늘 같은 날이 오면 꼭 하고 갔으면 해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엄마는 떨려오는 손으로 간신히 넥타이를 매었다.
아버지.
내게는 가깝고도 먼 사람.
무언가 매일같이 바빴고, 좀처럼 집 안에 계신 적이 없기에,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매우 흐릿했다.
거기에… 서자라는 굴레 탓에 내가 쉬이 마주하기도 힘들었고.
“서준이 네 아버지는, 음… 뭐라고 해야 할까? 항상 무언가 쫓기듯이 사셨거든.”
“쫓겨요? 아버지가?”
“일에 쫓겨 산 셈이지. 너무 젊은 나이부터 어깨 위에 짐이 가득 올려져 있었으니까. 그래서 항상 듬직하다가도 불쌍해 보이곤 했어.”
멍하니 아버지와의 추억을 반추하는 엄마의 시선은, 이내 내 뒤편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향했다.
그리고 입가에 지어진 씁쓸한 미소. 마치 사진 속 아버지를 향해 이야기하듯 엄마가 말했다.
“다 됐다. 그 사람이랑 똑같네.”
“…….”
“오늘 잘하고. 이사회 다음에는 주주총회가 있으니까, 앞으로도 조심하고… 물론 우리 아들이 어련히 잘하겠냐만.”
내 손을 잡은 엄마의 손.
아직 주름 따윈 없는 그 손을 보자마자 문득 내 머릿속에 기억 조각 하나가 도드라졌다.
회귀 전. 억울하게 감옥에 있을 당시, 늘 꼬박꼬박 면회를 왔던 엄마의 모습.
녹슨 철창 사이, 구멍 뚫린 아크릴판에 올린 한쪽 손바닥은 거칠었다.
깜빡거리는 전등 아래, 잡지 못할 손을 맞대며 미소 지었던 그때의 기억.
“아직도 손이 예쁘시네. 역시 우리 엄마 미모는 세상이 알아줘야 해.”
“얘는… 그렇게 아부해도 얻을 거 없어.”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 이제 더는 차디찬 교도소 면회실 아크릴판 따위로 가로막히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잘하고 올게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엄마를 바라보는 나.
까끌까끌한 아버지의 붉은색 넥타이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엄마 아들은 다시 얻은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 * * *
탄약그룹 본사.
한씨 가문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른 임직원들에게 있어 양택수 부회장의 집무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의미했다.
겉보기에는 푸근하고 인자한 인상. 그러나 철저히 현실에 뿌리를 둔 냉철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 반드시 그에 따른 평가와 책임을 묻는 사람이기에.
그리고 지금, 털털한 모습으로 그 집무실 소파에 앉은 사람.
한씨 집안 사람이 아님에도, 편한 마음 상태로 스틱으로 커피를 휘젓고 있는 김원철이 양택수 부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르셨다면서요?”
“그래, 김원철이. 자네 웬일로 먼저 와 있었구먼.”
“제가 또 새 나라의 어른이 아닙니까. 그나저나 커피 좀 좋은 거 드시지. 맨날 믹스만 드시고… 요샌 신입사원도 원두 좋은 거 먹는다니까.”
“되었네. 어차피 이번 건만 끝나고 고향 내려갈 사람이 비싼 것 맛 들이면 좋을 것 없다네.”
윗입술에 묻은 커피를 셔츠 소매로 닦아낸 김원철.
방금 들은 말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놀란 얼굴의 그가 양택수 부회장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니, 사표 쓰시겠다는 말씀 하시려고 부르신 겁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옳지 않던가? 늙은이가 남아 있어 봐야 길만 막히는 꼴이지. 그리고.”
초연한 모습의 양택수 부회장.
그는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끝마치기라도 한 기분인 듯했다.
“한율산 전 간사 말일세. 그 비자금 비밀번호가 서산에 있었던가?”
“흐흐… 귀신이셔, 증말.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애써 보려 하지 않아도 자네 행적이 말해주더구먼. 그분 설득까지 끝난 거라면 내 역할이 더 있을까 싶네만?”
“음….”
“거기에 성원식, 구석수, 정철식이까지 포섭이 끝났고… 문중회장 지지에 한화기 본부장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더군. 그렇지 않은가?”
문중회장 한현민과 한화기 재무 본부장.
두 사람에 대해 낙관적인 예측을 하는 양택수 부회장. 그 모습을 본 김원철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이게 참, 말씀드릴지 말지, 지금도 고민되기는 하는데. 하, 사표 내신다는 얘기만 없었어도, 진짜….”
“허어, 김원철이 이 친구. 자네 혹여 사고라도 친 게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양택수 부회장.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양쪽 관자놀이를 엄지로 빙글빙글 돌리던 김원철이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그건 아니고요. 부회장님. 이사회 끝나도 당분간 자리 좀 지키고 계셔야겠습니다. 댁에서 손주 못 보셔요. 전쟁터 가셔야 하거든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 늙은이더러 계속 남아 있으라니?”
“아까 부회장님 말씀하셨던 것 중에, 마지막 부분이 틀렸습니다. 문중회랑 한화기… 지금 조용히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마치 어느 극화풍 만화책에서 본 듯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김원철.
역시 세상에 통용되는 진리는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거 사실 페이크입니다. 무릎을 꿇은 이유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고요.”
“…내가 알아채지 못한 악재가 있는 모양이로구먼.”
당혹스러운 모습의 양택수 부회장. 그러나 언제 시곗바늘이 그리도 바삐 움직였는지, 길게 앉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다급해진 느낌을 가슴 속에 담은 채로.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사표는 잠시 접어두시고. 오늘 이사회 끝나고 진행되는 일들 같이 좀 보시죠. 머리 아플 일이 생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