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대관식(3)
탄약그룹 본사 소회의실.
스무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을 사용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이사회 참석자의 수는 적었다.
이사장 자리에 앉은 할머니, 양택수 부회장, 한형민 문중회장.
그리고… 재무 본부장인 숙부, 여기에 나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의 그룹 핵심 수뇌부.
참석자 모두가 자리에 앉고 나서도, 제각기 다른 고뇌를 하는지, 무거운 안개처럼 내려앉은 침묵이 한참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후우, 전부 모였으니 시작들 허지. 다들 알다시피 금번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은.”
손가락으로 금속 안경테를 고쳐 쓴 할머니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마지막까지 빙판 위를 걷듯 신중한 듯한 태도. 마침내 대나무 발이 걷히고 옥좌 뒤편에 앉은 서태후의 모습이 드러났다.
“현재 공석인 탄약그룹 회장직 선출안. 그리고 그 대상으로는.”
팔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은 황금 의자.
수렴청정의 끝을 선언한 서태후의 손에는 형형색색의 면류관 하나가 들려 있었다.
탄약그룹이라는 거대한 왕국,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휘두를 수 있는 지배권을 뜻하는 면류관이.
“한서준 현(現) 전략실장으로 함이 적절할 듯싶구먼. 전부 기탄없이 속에 있는 의견들이 있으면 어디 말해들 보시게나.”
얼어붙어 있던 공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듯, 회의실 내부를 감싸고 있던 긴장감이 내쉰 숨과 함께 조각난 상황.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각자 의중을 파악하고 있는 그때, 해맑은 미소를 띠고서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이 있었다.
한형민 문중회장이었다.
“에… 우선, 저희 문중회 측에서는 찬성의 입장을 밝히는 바입니다.”
“흐음….”
제 아버지의 꼭두각시 노릇을 도맡은 한형민 문중회장.
스스로 이 자리에 앉기에 과분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무언가 잊은 것이 있다는 양 뒤에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맞다! 그렇지! 아까 말씀드린 동의는 어디까지나 금융 쪽 계열사의 분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해야 할 숙제를 마친 어린아이라도 되는 듯, 뿌듯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한형민 문중회장.
자리에 걸맞지 못한, 한심한 모습이었으나 오히려 내게는 유리했다.
어리석은 목각인형은 별다른 심문 없이도 그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내뱉는 법이기에.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헌데… 그룹 일부가 쪼개지는 상황인데, 문중회 측에서 찬성표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 그야! 저희 쪽 지분이 희석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계열 분리로 인해 오히려 주가가 상승한다는 전망도 있지 않습니까.”
금세 얼굴이 빨개져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한형민 문중회장.
줄에 매달린 어설픈 어릿광대가 내뱉은 변명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핵심이 되는 것은 당황한 듯한 반응. 그리고 애써 의혹을 부정하려 드는 과격한 손짓. 그 모든 것들이 그가 모르는 사이 내게 실마리를 건네고 있었다.
“문중회에서 그렇게 다각도로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 됐든, 지지해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크흠, 뭐… 뭘 이 정도 가지고.”
꼭두각시의 어설픈 허세가 끝나고, 바로 다음으로 손을 든 양택수 부회장.
아버지의 비자금 계좌 ID를 건네준 사람답게, 그는 이 자리에서 나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했다.
“이 늙은이 역시 찬성입니다. 부디 신임 회장님께서 그룹을 잘 이끌어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력을 부탁드립니다.”
“허허…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요. 분명 잘하실 겝니다. 혈통도, 역량도 충분하신 분이니….”
봄바람이 불 듯, 언제 얼어붙었냐는 것처럼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할머니와 한형민 문중회장, 여기에 양택수 부회장까지 회장 선임에 동의했기에 확정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렇게 만장일치로 해결될 것만 같은 분위기 속, 갑자기 날 선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충분한 혈통이라. 기가 막히군.”
“뭐라? 지금 자네 지금 뭐라 했는가!”
서태후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마치 조소하듯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리는 숙부.
멸시와 혐오감, 두려움과 증오가 뒤섞인 그 눈빛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하긴, 충분치 못한 것은 혈통뿐만이 아니겠군. 역량도 마찬가지겠어.”
“이봐, 재무 본부장! 이미 사전에 합의한 바가 있을 터인데? 설마 이제 와 말을 바꾸려는 겐가!”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에, 강가 위에 낀 살얼음이 순식간에 균열이 일듯 산산조각이 난 분위기.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팽팽하게 당겨진 상황 속.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라도 하는 듯,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의 숙부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한씨 가문의 ‘적자’로서 탄약그룹의 영원한 발전을 바랄 뿐입니다. 설령, 그것이 잠시 찢어진 상황이라고 한들.”
“허어, 그래도 네놈이!”
“적절한 의지만 있다면, 언제고 다시 붙일 수는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리 멀리 떨어진 일만은 아닐 겁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숙부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분노와 경멸, 혐오의 감정을 가득 담은 시선. 그 끝이 닿은 곳은 내 목에 걸린, 아버지의 붉은 넥타이였다.
“…첩 자식이 가소롭군.”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눈을 흘기는 숙부.
거칠게 의자를 밀고 일어난 그는 일어선 채로 탁자 위에 손을 짚고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언정, 조만간 기회가 닿는 대로 갈기갈기 찢어 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찬성표는 드리겠습니다. 그 반쪽짜리 혈통으로 그룹 운영에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대의 유지를 이으신 한서준 신임 회장님.”
“크흐흠, 그…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본부장님. 같이 좀 가요, 같이.”
자리를 파하고 나서는 숙부. 그리고 그 뒤를 애완견처럼 따라가는 한형민 문중회장.
과격하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다.
아마도 숙부의 방금 저 반응은… 절반은 진심, 나머지 절반은 연출일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애송이가 기어코 자신을 넘어 왕좌를 꿰찬 것에 대한 불쾌감은 진심.
그리고 연출에 해당하는 것, 과격한 모습을 보여 무언가 감추고 싶은 내용.
그것은 필시, 문중회의 실질적 지배자인 한덕술 명예 고문, 그리고 <상하이 캐피탈>과의 유착일 터.
“잘 되었네요. 이런 식으로 나와 준다니 오히려 고마울 따름입니다.”
“……!”
그렇다면 나 역시 이런 선전포고를 듣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리에 앉은 그대로 내뱉은 나의 말 한마디.
회의실 문손잡이를 잡은 숙부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대관식 예행을 망친 것까지는 눈감아드리겠습니다만, 그다음은 없습니다. 부디 자중하시길.”
나지막이 내뱉은 마지막 경고.
내 목에서 나온 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스산한 감정이 회의실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당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밑바닥 없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그 욕망의 끝은… 분명 파멸일 것이니.
“…말은 잘하는군. 감히 네놈이 어쭙잖게 협박이라도 하는 것인가?”
결심을 굳힌 듯 앙다문 입가.
황동으로 만들어진, 둥글게 굴곡진 문고리 장식물 정중앙으로 서서히 빨려들어 가는 듯한 숙부의 손아귀.
떨려오는 그의 어깨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 말 한마디를 던졌다.
“생각하시는 바가 무엇이 되었든, 경거망동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통제되지 못한 욕망이 스스로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 * * *
호텔 플로렌스 꼭대기 층.
탄약그룹의 신임 회장이 선출됨에 따라 문중회 역시 촉각이 곤두선 상황.
호텔에 모인 한씨 집안 사람들은, 다가올 주주총회 때 결정될 최종 임명안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형님은 어찌 생각하나? 한서준이 정도면 그래도 적통에 능력도 괜찮지 않수? 나이는 어려도 잘 하겠더만.”
“글쎄… 뭐, 서명희 이사장님이 어련히 잘 고르셨을까. 그리고 어차피 문중회 의결권은 형민이에게. 아니, 덕술 삼촌에게 있으니.”
“서자라는 설도 돌기는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낭설 같기도 하고.”
활짝 피어난 이야기꽃.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번잡함을 지나 복도 가장 깊숙한 곳에는 육중한 문 하나가 있었다.
바깥과 철저하게 단절된, 그렇기에 내부의 논의가 새어나가지 않을, 그들만의 철문이.
“이런 한심한 놈! 그래서, 한화기를 따라서 그대로 도망쳐 나왔다고? 아직도 네가 어린 앤 줄 아느냐!”
“아니, 아버지. 얼마나 살 떨렸는지 아십니까? 그게 상황이 진짜 오줌 쌀 뻔했다니까. 어우, 괜히 날 문중회장 시켜서….”
마치 질렸다는 듯이 두 손을 절레절레 휘젓는 한형민 문중회장.
며칠 전, 처음으로 참석했던 이사회.
평소 별다른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그에게 있어, 그런 살벌하고 피 튀기는 분위기는 도저히 적응을 못 할 법한 것이었다.
“서태후도 그렇고 한서준이도 그렇고… 하여간 본가 쪽 사람들 성깔이 왜 이렇게 개 같은지 모르겠다니까요.”
“이놈 자식이 그래도…!”
“아, 몰라요. 인제 그런 자리에 나 좀 꼭두각시로 세우지 좀 마요. 난 무슨… 도사견한테 팔다리째로 물어뜯기는 줄 알았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외동아들.
지금 한덕술 명예 고문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모든 일이 전부 저를 위한 것이거늘, 마치 공포탄 소리를 듣고 땅에 머리를 박은 꿩 같은 꼴에 한숨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못난 놈… 내 이러니 너를 두고 눈을 감을 수가 없는 게다.”
갑갑한 마음에 노인은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 망치로 몇 차례 두들겼다.
분명 이대로라면, 저 아무 생각이 없는 외동아들은 신분 하락의 미끄럼틀에 올라탈 것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그 미끄럼틀 위에는 못난 아들놈뿐만이 아닌,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손자까지 같이 있을 것이기에.
마음을 다잡은 한덕술 명예 고문.
흰 머리칼을 뒤로 넘긴 그가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이번 건… 반드시 성공시켜야 허지.”
“아, 맞다. 그리고 한화기 그 양반이 묻던데요. 그 상하이 돈놀이꾼들 언제쯤 움직일 수 있냐고.”
조금 주눅이 든 목소리로 입을 연 한형민 문중회장.
마침 <상하이 캐피탈>에서 약속한 날짜가 거의 다가온 상황. 달력에 적힌 일정을 확인한 한덕술 명예 고문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마침 잘 되었다. 슬슬 연락할 때도 되었지.”
귓가에 울리는 통화 연결음.
기다림은 생각만큼 길지 않았다. 비서를 통하지도 않고, 곧바로 연결된 낮은 목소리의 사내.
한국어에도 능통했던 것일까?
밑의 실무 직원과는 달리, 그는 추가로 통역을 거치는 일 없이 곧장 입을 열었다.
“딱 알맞게 전화를 주셨군요.”
“아… 혹시 제임스 왕 이사님 되십니까?”
“중한 일이라 직접 챙기고자 합니다. 제 쪽에서 연락드릴 참이었는데, 이렇게 된 것, 곧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군더더기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극히 업무적인 대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메마른 모래사막 같은 목소리가 잠시 쉼표를 찍고 다시 노인의 귀에 들려왔다.
“자금 조달은 완료되었습니다만, 따로 급히 논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