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상하이 캐피탈(1)
-삘릴리리리리리!
요란한 전화벨 소리.
이사회가 끝난 후, 최근 며칠 동안 나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나이 스물다섯의 탄약그룹의 신임 회장. 궁금증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터.
비록 주주총회의 최종 의결이 남았지만, 여기저기 줄을 대려는 사람들 탓에 유세나 과장의 업무가 폭주할 정도였다.
밥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은 전화벨 소리가 조금 잦아들 때쯤, 파티션 너머 유세나 과장이 내게 물음을 던졌다.
“회장님? 그럼 상공회의소 쪽은 패스하고, 국방부 차관 면담도 미루면 되겠습니까?”
“일단 주주총회 전까지 누구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회장 아니라니까요. 제발 그렇게 부르지 좀 마세요.”
회장. 정확히는 회장 내정자.
아직 이 칭호로 불리는 것이 익숙지 않다.
단순히 주주총회 전까지 몸을 낮춘다거나 하는 정도의 이유도 있지만, 뭔가… 회귀 전, 빼앗겼던 것을 되찾기까지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유세나 과장. 그녀는 재미와 당혹스러움이 반반 섞인 웃음을 지으며 내게 대답했다.
“음… 김 부실장님께서 미리 회장이라 부르는 것 연습해두라고 하셨는데.”
“김원철 부실장님이 그랬다고요? 그분 지금 외근 나가셨죠?”
쓸데없는 지시를 해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김원철 아저씨.
고개를 돌려 빈자리 쪽을 보고 있는데, 제 이야기를 하자마자 곧바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속담 속 호랑이도 아니고.
“YO! 회장!”
“…범인이 여기 있었네요. 유세나 과장? 일단 오늘 남은 자잘한 미팅은 다 부실장님 쪽으로 돌려주세요.”
갑자기 쏟아진 업무 폭탄.
탕비실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시던 대머리 아저씨가 사슴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방금까지 이 더운 날 바깥에서 노예처럼 일하다 온 사람한테 뭘 또 시키려고.”
“저도 바쁩니다. 여기 유세나 과장하고 같이 나가야 할 곳이 있거든요.”
나는 무심하게 검은색 서류철 하나를 김원철 아저씨에게 건네며 말했다.
필수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외부 인사 몇 명의 리스트가 적힌 문서.
그러나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내 설명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
무슨 일인가 싶어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갑작스럽게 김원철 아저씨가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듯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밝은 백열전구 하나를 띄웠다.
“으흥. 그렇구먼. 이제 좀 이해가 가네.”
“뭐가 말입니까?”
“참으로다가 좋을 때인 것이여. 나도 왕년에 머리털 풍성하고 그랬을 때는 주위에 여자들이 아주….”
이상한 착각 버튼을 누른 대머리 아저씨.
행여 누가 들을세라 나는 최대한 빨리 부정의 의사를 표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상한 상상은 추억 속에 고이 넣어두셨으면 하고요.”
“준비 다 되었습니다. 회장님. 아니, 실장님.”
때마침 시의적절하게 차량 준비를 마친 유세나 과장.
졸지에 일거리를 넘겨받은 미운 50대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내게 푸념을 시작했다.
“아, 나만 빼놓고 둘이 어디 가려는데? 괜히 또 서럽게시리.”
“들으시면 안 가고 싶어지실 겁니다. 좋은 기억보다는 무서웠던 기억이 더 클 테니까요.”
“무서웠던 기억? 그게 뭔 소리여?”
구석에 앉아 조용히 웃음을 참는 유세나 과장.
분명 기억하고 있겠지.
그날 장식장에 놓인 칼 한 자루가 꺼내져 내 목 앞에 겨누어졌을 때, 김원철 아저씨가 보였던 깜짝 놀란 반응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꺼내 입었다. 몇 달 전 늙은 늑대를 사냥하러 갔던, 그날처럼.
“명동. 유세나 과장 아버님 뵈러 명동으로 갑니다.”
* * * *
남산자락에 조용히 파묻힌 듯한 명동의 주택가.
산기슭으로부터 불어오는 선선한 가을바람은 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은 이 남자 또한 시류의 바람에 올라타 무언가를 몰아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잘 쓰지도 않는 투박한 종이 통장 하나를 찻잔 옆에 무심히 올려놓으며, 유태촌이 입을 열었다.
“약속했던 투자액이오. 600억 원. 너무 늦지는 않았나 모르겠네.”
“서로를 믿고 일을 진행하기에는, 왕관을 손에 넣은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 아니겠습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내가 조용히 말속에 뼈를 담았다.
이사회에서 내가 회장직 신임을 받고 난 후에야 투자액을 조달한 유태촌이었기에, 조금 늦지 않았냐는 질책 섞인 대답이었다.
“한배를 타기로 한 사람들끼리 너무 출항 일자를 빡빡하게 신경 쓰면 골치가 아파서요.”
“하하하! 부드러운 말씀에 날카로운 잔가시를 그리 집어넣으면 되겠소? 그리고.”
빙그레 지은 내 웃음에 진 그림자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애써 호기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유태촌.
“아직 손에만 쥐고 있는 그 왕관. 머리 위에 올라갈지는 불확실한 것 아니오? 그렇지 않은가?”
“뭐, 그렇게 보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이해는 허지. 허나.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자산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걸었다는 점. 부디 잊지 않기를 바라오.”
주주총회를 통과할 일이 남지 않았느냐는 함의를 담은 늙은 늑대의 그르렁거림.
서로 하고 싶은, 꺼내야만 했던 말을 모두 마치고 나니, 불어온 가을바람만큼이나 조금 분위기가 쌀쌀해졌다.
서로 간에 노려보는 일 따위는 없이, 그저 찻잔에 든 씁쓸한 향을 나누며.
“여하간에, 이제는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도 없는 노릇. 그저 풍파가 없기만을 빌 뿐이오.”
“리스크가 큰 곳에 투자하신 점은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일부러 말끝을 흐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기왕 돕는 것, 한 번 더 도와주시죠. 아, 정확히는 제가 도움을 청한다기보다는.”
“…….”
“상호 간 이익이 될 법한 이슈가 있다… 정도로 정의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만.”
“이익이라.”
유태촌의 오른쪽 눈썹 아래쪽 길게 내려앉은 흉터 자락.
그의 주름진 눈가가 씰룩거림에 따라 길게 팬 세월의 밭이랑은, 마치 사마귀의 더듬이라도 되는 양 내 모든 언행을 감지하는 것만 같았다.
대답을 아끼는 유태촌. 눈짓으로 어서 본론을 꺼내라는 그의 표정에,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남은 탄약 증권의 지분, 어차피 정리하실 생각이시지요?”
“시장 상황을 보는 중이오만.”
“볼 것 없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꾼들을 통해 전부 매각하십시오. 그것도 대놓고 소문을 내면서.”
내 말을 들은 유태촌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격자무늬 창호 위쪽, 서까래에 걸린 현판을 향해 옮겨진 그의 시선.
[복수의 이자는 복리로 붙는다]
그 흑단 나무에 멋들어지게 쓰여 있는 가훈을 통해 나를 향해 경고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만있자… 우리 회장님이. 아니, 아니. 전략실장님이 계산에 어두우신가 보오. 이건 이익이 아닌 것 같은데?”
현시점, 탄약 증권의 주가는 유태촌이 매입한 금액에서 15%가량 손해인 상태.
그가 나와 <코코아 뱅크> 건으로 얽힌 후에도 차마 정리하지 못한 이유이다.
나는 불쾌함이 가득 담긴 그의 눈을 그대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 시장가에 곧바로 풀면 그렇겠지요.”
“브로커를 끼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대체 무슨 확신으로?”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여의도에 요란하게 소문만 내십시오. 명동 악바리 유태촌이 탄약 증권 지분 전액을 매각한다고.”
고민하는 유태촌.
나는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나와 온전히 손을 잡고 큰 그림을 그릴 의향이 있다면, 분명 내가 내뱉은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
“북 치고 장구 치고, 여의도 증권가에서 소음 민원이 들어올 때까지 신나게 소문을 내시길 바랍니다.”
“소문을 낸다라.”
“그렇게만 하신다면… 아마 지금 가격 대비 최소 20% 어쩌면 30% 이상의 이윤을 가져가실 수 있을 겁니다.”
까끌까끌한 짧은 회백색 수염을 손으로 매만지는 유태촌.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긴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똑딱거리는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가득 찬 사랑채 안, 마침내 피 냄새를 맡은 늙은 늑대가 웃음 사이로 송곳니를 보였다.
“뭔가 꾸미는 게 있으시구먼.”
“이거 하나만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지고 계신 탄약 증권 주식, 어차피 지금 아니면 못 파실 것입니다. 영원히.”
“흠. 소문, 소문이라….”
주식에서 소문으로 옮겨진 방점.
그는 내가 말한 내용을 정확하게는 알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직감적으로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탄약 증권. 탄약그룹의 순환출자 구조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
현재의 순환출자 구조를 설계한 김원철 아저씨와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쉽사리 알아채지 못한 내용.
분명 한화기가, 그리고 그의 뒤에 선 문중회와 <상하이 캐피탈>이 찾고 있는 곳일 터.
나는 이곳에… 지뢰를 묻을 것이다.
다리 한쪽을. 아니, 주변에 선 적들의 몸통까지도 통째로 날릴 수 있는 지뢰를.
“허어… 내 폭탄을 계속 들고 있을 뻔했구먼. 허허허!”
“숨은 그림을 찾으신 것 같으니, 이제 믿고 맡겨도 될는지요?”
호방하게. 아니, 거칠게 웃음소리를 내는 유태촌. 결심을 마친 그가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한 번 내리치고는 내게 대답을 건넸다.
“알겠소. 내 우리 한 회장님이 일러준 대로 허지. 아주 떠들썩하게 소문을 내 달라 했으니, 윤중로 저잣거리가 들썩이도록 만들어 보겠소.”
* * * *
“이상하다… 이게 대체 머선 일이여?”
휴대전화에 온 메시지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한형민 문중회장.
집안 하나는 훌륭했기에, 증권가 쪽에 인연이 닿은 사람들은 그에게 속칭 찌라시라 불리는 내용을 수시로 전달해 주고는 했다.
“아, 씨. 또 왜 유태촌 이 양반은 난리인 건데. 안 그래도 머리통 터지게 신경 쓸 일 많은데.”
“왜 그러느냐?”
“아, 아버지. 있잖아요, 그 여의도에서 돈놀이 쁘로커 하는 친구 놈한테 급하다고 연락이 왔는데요.”
툴툴거리며 설명을 시작하는 한형민 문중회장. 말주변이 부족했던 탓에, 그는 아예 휴대전화를 다시 켜 제 아버지에게 건네었다.
“유태촌이가… 탄약 증권 지분 매각을 하겠다?”
“진짜로요. 죽은 자식 부랄마냥 꼭 쥐고 있던 탄약 증권 지분 아닙니까. 영감탱이 이해가 안 가네. 그걸 왜 갑자기 놓는다는 거지?”
무언가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 한덕술 명예 고문. 그는 모든 가능성을 하나하나 되짚기 시작했다.
“계열 분리 때문은 아닐 터… 그렇다고 유태촌이가 급전이 필요한 자도 아니고.”
“그러니까요! 아주 그냥 사방팔방이 똥싸개들로 가득하다니까! 이놈의 문중회장 감투, 머리통 아파서 못 쓰겠어요, 정말.”
“이 철없는 놈이… 꼭 말을 해도!”
늘 그러하듯, 제 아들에게 화를 내려던 한덕술 명예 고문.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눈앞에 무언가 섬광 같은 것이 번쩍였다.
“잠깐, 잠깐. 있어 보거라.”
“네에?”
올린 손을 그대로 멈춘 채 생각에 잠긴 노인.
그는 며칠 전 있었던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이사와의 전화 통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탄약그룹 순환출자 구조. 우리 쪽에서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 문중회는 알고 계셨는지요?’
‘그건… 재작년쯤 한번 지배구조 변화가 있었던지라….’
‘실탄이야 이미 조달했습니다만, 약한 고리를 모르면 우리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재작년. 선대 회장의 지시로 급히 바뀐 탄약그룹 순환출자 지배구조.
워낙 극비리에 이루어진 탓에, 그리고 비선 조직을 통해 진행되었기에, 한화기를 비롯한 재무 본부에서도 이에 대해 완전히 숙지한 자가 없는 상황.
‘확실한 표적을 알아 오십시오. 거액의 자본은 포악한 사냥개 같아서… 사냥감이 보이지 않으면 누굴 물어뜯을지 예측이 안 되어서 말입니다.’
‘…주주총회 전까지 준비해두겠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중국계 자본의 경고와 함께,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 하나.
목젖 너머로 삼켜진 공포가 촉매 역할이라도 한 것일까?
한덕술 명예 고문의 머릿속에 널브러진 퍼즐 조각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이거였나!”
“아부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들놈 따위는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재빨리 전화기를 들어 한화기에게 연락을 취하는 노인. 그의 반대쪽 팔은 간신히 책상 위를 붙잡은 채로 전신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길고 긴 통화연결음의 끝에 들려오는 한화기의 목소리.
안부 인사를 생략할 만큼 급한 어투로, 한덕술 명예 고문이 곧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나 한덕술일세. 지금 급히 논할 이야기가 있네. 최대한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