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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45화 (45/300)

45화상하이 캐피탈(2)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태원 인근 미술관 앞. 회백색 콘크리트 외벽에 색유리를 덧붙인 형이상학적인 건축물이 아름답기는커녕 오늘따라 유독 을씨년스러웠다.

은색 장식품이 붙은 처마 밑에 선 한화기. 비서 없이 홀로 움직인 그는 펼친 우산을 다시 접어 빗방울을 털어냈다.

습습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지나 불 꺼진 어둠 사이로 스며들어 가자,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그들이 멈춘 지점은, 송나라 시대 장강 일대의 산수화가 걸린 모퉁이 바로 앞이었다.

“바쁜 와중에 움직여주어 고맙네. 요새 호텔 플로렌스에 워낙 보는 눈이 많아야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한화기.

산수화 앞에서 희미하게 발산하는 전등 빛에 그림자가 졌다.

“그날 이사회 이후 문중회에 말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자꾸 들락거려서 문젤세.”

“이해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히도 나를 부른 겁니까?”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들려오는 천둥소리.

동시에 한덕술 명예 고문의 낯에 비장함이 스쳤다.

“유태촌이가… 탄약 증권 지분 전부를 매각하려 한다는구먼.”

“유태촌이?”

창밖에 거세게 불어오는 비바람.

창틀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 앞에 전시된 산수화가 몇 차례 번개 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깜빡거렸다.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고 나서야 또렷하게 들려오는 한덕술 명예 고문의 말.

“여의도에 브로커 놈들이 코를 널름거린다는군. 어쨌거나 그놈들이야 수수료만 먹으면 그만이니.”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아랫입술을 깨문 한화기. 비릿한 피 내음이 삽시간에 입안에 번졌다.

‘유태촌… 무슨 생각이지? 뭘 원하기에 하필 이 시점에 그런 행보를 보이는 건가.’

찝찝함. 그리고 당혹스러움.

그토록 탄약 증권에 목매고 있던 늙은 사채꾼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한화기에게 불쾌함까지 안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쾌함은, 자신 앞에 선 노인이 이어 나간 말 한마디에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건 내 추정이네만, 탄약 증권이 약한 고리가 아닐까 싶으이.”

“약한 고리? 설마 순환출자 말입니까?”

“유세나였나? 그 유태촌이 딸년이 한서준 그놈 밑에 있더군. 분명… 김원철에게 뭔가 들은 것이 있겠지.”

김원철.

재작년 하루아침에 탄약그룹의 순환출자 구조를 뒤집어버린 자.

당시 선대 회장의 명으로 인해 재무 본부 그 누구도 핵심 내용에 접근하지 못했기에, 그 자세한 구조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었던 상황.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 쥔 한화기.

무언가 손아귀에 들어오려 할 때마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허망함이 분노로 바뀌는 듯했다.

마치 이 세상 풍경인 듯, 이 세상 풍경이 아닌, 자신 앞에 걸린 산수화처럼 이죽거리는 듯한 조카의 얼굴이 그의 눈에 선했다.

“이건 내 추론이네만… 한서준이는 이번에 금융 쪽 계열 분리로 끝날 것이라 여길 것 아니겠는가.”

조심스레 자기 생각을 말하는 한덕술 명예 고문.

바깥에서 더 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낱 체스 말처럼, 그는 가로세로로 구분된 체스판 위에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니, 유태촌이가 지분을 매각하려는 시도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지. 만약 계산 공식이 그렇게 된다면….”

칼집 옆, 길게 치렁거리는 수염을 늘어뜨린 늙은 나이트.

당장이라도 타고 있는 말에 채찍질해 돌진하려 하는 그는, 옆에 선 킹에게 어서 앞으로 나아가자며 외치고 있었다.

“오히려 기회의 열쇠는, 우리 쪽에 있는 것 아니겠나? 놈들은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잖나.”

“계열 분리 이전의 타이밍을 노린다라….”

“그렇지. 유태촌이의 그 탄약 증권 지분, 전부 <상하이 캐피탈>을 통해서 매입하면, 그룹 지배권 싸움에서 고지를 점할 수 있네.”

체스판 가장자리, 가장 안전한 중심부에 자리한 채 대국을 지켜보던 킹.

검은 상아를 깎아 만든, 그 존재만으로도 묵직한 킹은, 정면에 선 하얀색의 또 다른 킹을 응시했다.

방해물 없이 훤히 뚫린 앞. 조금만, 그저 조금만 자신이 움직인다면 이 험난한 승부가 결정되리라 믿는 한화기.

-번쩍!

빗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다시 비친 섬광. 자리에서 발걸음을 뗀 한화기의 얼굴에 체크메이트를 향한 웃음이 비쳤다.

“주주총회. 앞으로 2주가량 남았다 들었습니다.”

“결심을… 한 겐가?”

“촉박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지요. 어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어르신 또한 가교 역할에 충실해 주시길.”

* * * *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 바로 위 상공. 충분히 고도가 오른 비행기 내부는 수평이 된 것인지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탄탄한 복근이 있던 배에 지방을 축적한 나와 김원철 아저씨. 물론 저 아저씨는 원래 배둘레햄이 있기는 했다만.

“어우야, 속이 좀 그렇다야. 어제 연회에서 너무 많이 먹었던 것 같은디.”

“그러면서 지금 또 드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언행일치 좀 해주시죠.”

배부르다면서 또 승무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가져다 달라고 말한 언행 불일치 아저씨.

황금 장식이 된 좌석에 누운 채로 원 없이 먹고 마시는 모습이, 무슨 로마 시대 귀족 자제분 모습 같았다.

“흐흐흐… 원래 술배는 따로 있다니까. 그나저나 빈 살만 그 양반, 참 통도 크네. 이렇게 왕실 전용기도 다 빌려주고.”

“나름 정권 탈취 1등 공신이니까요. 그쪽에서도 크게 베푸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죠.”

북서쪽을 향해 비행하는 사우디 왕실 전용기. 그 목적지는 바로 스위스의 제네바.

유태촌으로부터 600억 원의 자금을 받은 나는, 마침내 아버지의 비자금이 잠들어 있는 스위스 은행을 향해 움직였다.

혹여나 숙부의 감시망이 있을까, 그룹 본부에는 사우디 출장을 간다고 보고하고서.

“사우디 법인에 있는 숙부 끄나풀들은 지금도 연회 중인 걸로 알고 있을 겁니다.”

“낄낄낄. 참으로다가 부러울 것이여, 그놈들은. 거기 연회가 좀 푸짐했어야지. 그나저나….”

먹고 있던 하몽과 메론을 한쪽으로 치워버린 김원철 아저씨가,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채 천장을 보고 중얼거렸다.

“빈 살만. 그 양반한테 통 크게 투자금 받아내도 될 법했는데. 아쉽지 않아?”

“아… 그거 말이죠.”

어제 연회가 끝날 때쯤, 빈 살만 왕세자는 나를 따로 불러내었다.

사막 기후에 존재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할, 녹음이 짙은 정원.

포근할 만큼 습기 찬 잔디밭을 거닐며 빈 살만 왕세자는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곧 정식으로 회장 자리에 오른다지? 이제 주주총회만 남았다고 들었다.’

‘9부 능선은 넘은 셈입니다. 악으로 깡으로 남은 고지를 마저 기어올라야겠지요.’

‘굳이 힘든 길로 산을 오르려 하는군. <코코아 뱅크> 설립 때처럼 내게 투자를 바라는 길도 있지 않던가?’

회상을 마친 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비행기 좌석에 누운 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 짓고 있는 김원철 아저씨. 일부러 알면서도 떠보기 위해 물어봤다는 것이 명백했다.

“아쉽고 자시고 할 게 있겠습니까? 물어보나 마나지요.”

유리로 된 포도주잔을 손에 쥔 나.

찰랑거리는 보랏빛 액체에 비친 모습이 내가 봐도 퍽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나는 어젯밤 가로등 불빛 아래 빈 살만 왕세자에게 건넨 대답 그대로를 입 바깥으로 내뱉었다.

“그건 탄약그룹 전체를 움직일 지배 지분이니까요. 방산 기업에 외국계 자본이 끼어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골치 아파집니다.”

“흐흐흐… 잘 보고 있구만. 나중에 나 은퇴하고서 낚시 다녀도 속이 든든하겠어.”

“어디 다니실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그 낚시.”

“허!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그러나.”

당분간 사표 수리는 절대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비행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귓가에 들리는 기장의 방송 소리.

-사우디 왕실의 고귀하신 손님 여러분. 본 항공기는 이제 곧 스위스의 제네바의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방송이 끝남과 함께 점점 항공기 기체가 아래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구름 아래로 보이는 오밀조밀한 유럽의 도시들.

저곳 어딘가에… 아버지가 그토록 꼭꼭 숨겨둔 비자금이 잠들어 있겠지.

* * * *

스위스 제네바.

새하얀 만년설이 쌓인, 남쪽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는 이 소담한 도시에는 아담한 저층 석재건물이 골목골목마다 들어서 있었다.

호숫가 근처 길가, 자그마한 나무 간판에 그려진 열쇠 꾸러미 문양이 인상적인 그곳.

관광객들의 발길조차 쉬이 닿지 않은 그 작은 건물 지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계좌의 상속자분 이외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포마드를 발라 넘긴 머리를 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

어딘가 오래된 성의 집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아버지의 비자금 계좌를 관리하는 개인 은행의 총책임자였다.

“금방 다녀올게요. 잠깐 기다리고 계세요.”

“후우… 결국, 이걸 찾아서 쓰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잘하고 와라.”

작은 원통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지하 금고는 겉보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안에는 최신식 보안 장치가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감고 앞에 부착된 스크린에 무언가를 기재하는 직원. 곧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철문이 열렸다.

“안쪽에 가시면 컴퓨터 한 대가 있습니다.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시면 두 번째 철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 철문 안쪽에 통장이 있는 겁니까?”

“처음 예치하셨던 고객께서 남기신 증서가 있습니다. 증서를 가지고 오시면 원하시는 계좌로 바로 송금해드립니다.”

나는 첫 번째 철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까지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전통적인 모습은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현대식 공간.

가운데 위치한 모니터에는 정말 ID와 비밀번호, 두 개만 입력할 수 있는 단출한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드디어… 손에 넣게 되는 건가.”

영어와 숫자가 뒤섞인 열두 자리의 복잡한 ID.

처음 김원철 아저씨를 만나, 양택수 부회장으로부터 이것을 받아내기까지의 시간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가치를, 그리고 회장의 자질을 입증해야만 했던 시간이.

“알고 보니 아버지가 재미있으신 분이었네.”

재킷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낡은 종잇조각을 꺼내 든 나.

종이 위, 비자금 계좌의 비밀번호가 적힌 검은 글씨를 본 내 입에서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단순히… 아버지 본인 안위를 위해 빼둔 돈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된 한율산 전 간사의 격한 반응.

극성스러울 정도로 그룹의 미래를 걱정하던 고집 센 노인의 언행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으리라.

나는 다시 손가락을 뻗어, 한 자 한 자 천천히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회귀를 통해 내가 돌아온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Save the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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