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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46화 (46/300)

46화상하이 캐피탈(3)

상하이의 금융중심지 푸둥지구.

고층 빌딩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욕망의 숲은, 불야성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황금의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은 밤하늘을 밝히기에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둥근 반원 모양의 강물 위까지 내려와 앉아, 물결을 따라 함께 일렁거리는 불빛.

그리고 그 가운데 유독 환하게 반짝거리는 욕망.

강물에 비친 그림자를 따라, 하늘 높이 고층 빌딩 꼭대기를 향한 곳. 그 유리창 앞에는 누군가가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어와라.”

작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이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양쯔강 동쪽 끝자락에 닿은 불빛만을 응시할 뿐.

“이사님, 탄약그룹의 문중회에서 답을 찾았다는 소식입니다.”

“아아, 그래. 잠시만 기다리게.”

결재 서류를 책상 위에 올린 채, 제 주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남자의 이름은 옌룽.

벌써 햇수로만 십 년째. 이제 주인의 뒷모습만 보더라도 대충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묵묵부답인 제임스 왕 이사. 옌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저 불빛들이… 양쯔강을 넘어 황해 끝까지 닿기를 바라십니까?”

“옌룽. 내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기에 그저 마음이 급해졌을 뿐이다.”

천천히 뒤를 돌아선 제임스 왕 이사.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그는 한 손에 서류철을 들고는 천천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모습의 제임스 왕 이사.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 수하에게 수차례 반복했던 질문을 던졌다.

“아예 탄약그룹 전체를 삼킬 수는 없는가? 남조선의 관료 놈들만 조금 매수하면 될 것도 싶은데.”

“말씀드렸다시피,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과거 1997년 IMF 외환위기 같은 기회가 아닌 이상에는.”

고개를 가로젓는 옌룽.

당장 한국 경제가 휘청거릴 만큼 속이 썩어 있지는 않은 상황.

비록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흉흉한 낌새가 감지되기는 했지만, 불확실한 변수를 상수로 가정할 수는 없었다.

“일단, 조력자 정도의 위치만으로도 가질 수 있는 것은 전부 손에 넣으실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저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쉬울 뿐.”

대답을 마친 제임스 왕 이사는 양복 재킷 앞주머니에 꽂아둔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펜촉. 늘 중요한 거래의 최종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용하는 만년필이었다.

“결단을 내렸으면 신속하게 밀어붙어야겠지.”

코끝을 자극하는 쌉쌀한 잉크 냄새. 다소 아쉬운 표정의 그가 서명을 마쳤다.

“계획대로 진행하라, 옌룽. 그대만 믿겠다. 목표는 앞서 언급했던 두 가지.”

검은 가죽 표지가 덮인 서류철을 앞으로 내밀며 제임스 왕 이사가 말했다.

“탄약그룹의 방산기술.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해외 자원 개발권.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마치 펜으로 꾹꾹 눌러 적듯, 강조를 거듭하는 제임스 왕 이사.

그는 이번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차기 중국 공산당 내부의 주도권 싸움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한화기를 제후국 옥좌에 앉히고 난 후 2년, 2년 안에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오도록.”

“최선의 성과를 만들어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집무실 바깥으로 나서는 옌룽. 마치 잔상이라도 있는 것처럼, 제임스 왕 이사는 이미 떠나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화기의 대항마가 한서준이라는 놈이었다지?”

피곤이 밀려온 모양인지, 집무실 한가운데 놓인 가죽 소파에 몸을 던진 제임스 왕 이사.

그는 천장 위, 단풍나무 목재에 양각으로 새겨진 동북아시아 지도를 향해 팔을 뻗었다.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중국.

움켜쥐기라도 하듯 꽉 쥔 주먹의 모양을 따라, 중국 남동부의 둥근 해안가가 그대로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바로 옆. 툭 튀어나온 작은 반도.

주먹에 박힌 뾰족한 가시라도 된 듯한 느낌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상관없다. 저까짓 하찮은 잔가시 따위, 얼마든지 빼내면 그만이다.”

* * * *

“일 끝났으면 어서 돌아갑시다. 또 사우디 경유해서 가야 하니까, 여기서 뭐 즐기고 그럴 시간이 없거든요.”

아버지의 비자금을 수령한 나는, 미리 만들어 놓은 페이퍼 컴퍼니에 모든 자금을 옮겨두었다.

자금의 정체를 철저히 가려줄, 평범한 자산운용사로 보이는 페이퍼 컴퍼니.

주주총회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했기에 스위스 관광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알프스산맥에서 타는 스키도, 독특한 향이 나는 치즈에 빵을 찍어 먹는다는 퐁뒤도.

“이야, 우리 회장 내정자님 독한 건 알았지만, 스위스까지 와서 일만 딱 하고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야.”

“나중에 재혼하시면 신혼여행으로 풀 패키지 끊어드릴 테니까, 지금은 협조 좀 해주세요.”

“이전 마누라랑? 아이고, 차라리 날 잡아다 잡수쇼.”

전처 이야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는 김원철 아저씨.

전에 술김에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봐서는, 아버지에게 엄마를 소개해줄 때, 그 소속사에서 동료 여배우로 있던 사람과 결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부부관계가 좋았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 낚시 말고 다른 것 때문에 이혼하신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이전 마누라하고 가느니 차라리 마귀할멈, 아니 서 이사장님 모시고 가는 게 낫겠다야.”

대놓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리는 김원철 아저씨.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진득하게 술 한잔 마시고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호주머니에서 무언가 진동이 느껴졌다.

“어…? 이걸 대체 어떻게 아신 거지?”

무성의하다 싶을 만큼 짧은 메시지. 그러나 고작 한 줄에 담긴 그 문자 메시지가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아버지. 참… 여러 겹으로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셨군요.

“얼레? 왜 그런다야? 설마 진짜 우리 서태후 마마께 일러바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겁먹었다는 표정을 연기하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는 김원철 아저씨.

이 상황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나는 밝게 빛나는 휴대전화 화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일러바치고 뭐고 간에 먼저 행동하는 것은 이미 그른 모양인데요.”

“으잉? 잠깐, 잠깐만… 아니, 이걸 어떻게 아신 거야!”

“아버지의 작품 같습니다. 일단 빨리 한국으로 가죠. 이래나 저래나 진짜 관광할 시간은 없겠네요.”

서둘러 잡은 공항 택시.

내 휴대전화는 화면도 꺼지지 않은 채, 그대로 호주머니에 다시 들어갔다.

까만 어둠 사이에서 배터리가 다할 때까지 빛나며.

-스위스 은행 비자금 관리인에게 모든 것을 통보받았다. 즉시 귀국할 것.

* * * *

‘천하의 불효막심한 아들놈 같으니… 어찌 제 놈이 먼저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해 둔 게냐.’

평창동 저택 정원을 홀로 거니는 서명희 이사장. 평소 집 안에 있을 때는 서재 바깥을 잘 벗어나지 않는 그녀였다.

이제는 고인이 된 큰아들이 자주 나와 담배 연기를 내뿜던 정원 뒤뜰.

소나무 몇 그루가 꺾인 허리를 하고 병풍처럼 둘러싼 북한산 일대를 마중하는 그 장소는, 자신의 집이었으나 불편하기만 한 장소였으니까.

‘이리도 철저히 준비해 놓았을 줄이야….’

지난 몇 달, 일부러 발길을 들이지 않았기에 방치되다시피 한 뒤뜰.

벽 위에 놓인 금속 재떨이에는 어느새 벌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품 안에서 종잇조각 하나를 꺼낸 서태후. 벌써 몇 번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는지, 인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꼬깃꼬깃해진 모양이었다.

-[프라이빗 뱅크 스위스] 계좌의 주인이신 고(故) 한화약 탄약그룹 회장의 상속자께서 자금을 수령하셨습니다. 고객님의 사전 의뢰에 따라, 이하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뒤이은 내용은 만일에 대비한 일종의 유언장이었다.

스위스 은행에 예치해 둔 비자금 계좌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모르나, 부디 탄약그룹의 앞날을 위해 지지해 달라는 내용.

그리고 혹여나 자신이 믿고 있던 가신들의 손에,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비자금이 넘어갈 경우의 대응 방안까지.

“꼭 산 채로 위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것 같구먼.”

멍하니 뒤에 펼쳐진 산꼭대기를 바라보는 서태후. 그녀는 까끌까끌한 손바닥으로 늘 푸르른 솔잎을 만지작거렸다.

“이사장님. 방금 서준 도련님… 아니, 회장님 들어오셨구먼유.”

“…가세나.”

산허리에 낀 뿌연 안개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선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큰아들에 대한 그리움부터, 그 시험을 모두 통과한 손자에 대한 대견함까지.

* * * *

“그렇게 아버지의 비자금을 손에 넣게 된 겁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급히 집으로 들어간 나.

창가를 두들기던 밝은 백색의 햇빛이 주황색으로 변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은테 안경 너머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할머니의 눈. 망설임이 서려 있는 모습은 찰나의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가듯 사라졌다.

뒤이어, 내 귓가에 특유의 얼음장 같은 강단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아들놈이나 손주 놈이나, 두 놈 다 이 늙은이 일찍 초상 치르게 하려고 했던 모양인 게로군.”

“놀라셨을 것 같긴 했습니다. 사실 저도 아버지가 그런 장치까지 걸어둘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허어, 혼자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게냐?”

할머니의 가벼운 핀잔에 웃음으로 답한 나.

길게 늘어진 이야기는 저녁 시간이 지나고서도 끊길 줄을 몰랐다. 아예 서재 안에 가벼운 요깃거리를 가지고 왔을 정도로.

나는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고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그렇기에 저번에 말씀드렸던 미국발 금융위기. 그걸 이용해볼 생각입니다.”

“자금은 넉넉한 게냐? 제아무리 파생상품을 이용해 불릴 자신이 있다고 헌들, 씨앗돈이 충분해야 할 터.”

“사실… 목표 금액에 비해 조금 부족하긴 합니다.”

나와 김원철 아저씨가 머리를 굴려 산출한 최소한의 필요 금액은 2,000억 원.

이를 금융위기 대비용 파생상품에 베팅해, 2조 원까지 늘려 그룹 지배 지분 확보를 위한 실탄 싸움을 대비한다는 것이 기본 골자였다.

“아버지의 비자금 1,000억 원, 유태촌으로부터 받은 600억 원, 그리고… 엄마. 아니, 어머니로부터 받은 100억 원. 총 1,700억 원까지는 만들었습니다.”

부족한 300억 원.

전략실 인원들이 설계해 둔 파생상품 계획보다 리스크를 더 많이 감내해야 했다.

마치 나무 조각을 쌓아 올린 탑 아래에서 아랫부분을 빼 윗부분을 메꿔야 하는 상황처럼.

“300억 원이 더 있으면 서준이 네 녀석이 생각한 대로 되는 게냐?”

“그렇습니다만…?”

평소보다 무언가 부드러운 듯한 말투.

목소리에 그리움 비슷한 감정이 담긴 할머니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바라보듯이.

“받거라.”

친절함 따위는 일절 담기지 않은 손짓. 그 투박한 할머니의 손끝에는 두툼한 통장 하나가 딸려 나왔다.

“할머니. 이건….”

“그 촐랑거리는 애미도 100억 원이나 되는 돈을 만들어 쾌척했거늘, 후계자 지명까지 한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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