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폭풍전야(1)
가을이 완연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책상 위에 올려진 탁상달력에는 수채화풍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가을 녘, 고개 숙인 논밭의 열매.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들판 위,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벌린 허수아비.
그 삽화 아래, 9월의 각 날짜가 적힌 가로세로의 네모 칸에는 붉은색으로 가위표가 쳐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볼펜을 들어 숫자 5가 들어간 네모 칸에 가위표를 그렸다.
“D-10.”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그날.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서브프라임 금융위기의 신호탄이 터질 것이다.
나지막이 보이는 달력 너머,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기와 팩스의 기계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그 소음에는, 서희 누나와 유세나 과장을 비롯한 <코코아 뱅크> 관련 인원들이 바쁘게 오가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상하이 캐피탈> 측에서 유태촌의 탄약 증권 지분 전부를 인수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위안화의 원화 환전이 도드라지게 증가했어. 이놈들 오늘 오전에만 20억 위안이나 바꿨잖아!”
“주식 시장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기관들이 촉이 온 건지 행동을 멈추고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예상했던 일정대로 움직이는 <상하이 캐피탈>. 앞으로 보름가량 남은 주주총회를 위해 마치 진격전을 하듯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두 사람.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안에 든 티라미수를 들고는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미리 생각해둔 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괜찮을까요? 이대로라면 순식간에 약한 고리 쪽 지분 매입이 끝나서 위험할 텐데….”
“상관없습니다.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하세요. 우리가 노리는 곳은… 보이지 않는 고리니까요.”
계열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의 순환출자 구조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탄약 증권.
마치 말의 입가에 걸친 가죽 재갈을 한 손에 쥔 것처럼, 탄약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의 통제권을 앞에 둔 상대방.
숙부와 문중회가 가진 기존 지분에, 1조 원 남짓한 금액으로 그룹을 삼키려고 하는 모습은, 회귀 이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렇기에, 나 역시 이에 맞설 수 있었고.
“적이 미끼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우리는 조금 돌아서 갑니다. 절대 티 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숨어서.”
벽 한쪽에 붙은,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복잡한 도식도.
본사라는 거대한 줄기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에는 마치 열매가 맺힌 것처럼 이런저런 법인들이 주렁주렁 널려 있었다.
탄약그룹의 계열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회사들이.
“부실장님. 자금이 마련되는 대로 저 회사들의 지분, 곧바로 매집 가능합니까?”
“그러엄. 일단 국책은행이랑 연기금이 들고 있는 지분에 대해서는 매수청구권을 걸어놨걸랑.”
티라미수를 뜬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가슴팍을 팡팡 치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김원철 아저씨.
“2조 원. 딱 2조 원만 있으면 죽은 듯이 조용히 있던 계열사들 사이에 전류가 파지지직 흐를 것이여.”
“좋습니다. 지분 들고 있는 쪽에서 다른 말 안 나오도록 비밀리에 매수 의사 밝혀주세요. 열흘 이내로 자금 집행 할 거라고 말 하시고.”
“열흘 이내라… 정확한 날짜까지 확신하는 모습이 꼭 무슨 미래에서 오기라도 한 것 같구만. 뭐, 합당한 판단이긴 하지만.”
대답 대신 오묘한 미소만 입가에 걸친 나.
나는 다시금 시선을 벽에 붙은 도식도로 향했다.
탄약그룹 본사. 작은 시냇물같이 흐르는 모든 계열사의 지분 관계가 모여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곳.
이제… 거의 다 손에 들어왔다. 그저 마지막 고비만 남았을 뿐이다.
“그럼 이제 슬슬 우리도 시작합시다. 바로 월 스트리트의 금융쟁이들에게 접선하세요.”
* * * *
짙은 안개를 뚫고 하늘로 솟구친 마천루의 숲, 월 스트리트.
바깥이 훤히 보이는 유리 엘리베이터 안의 백인 남성.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 <골드만 셔츠>의 파생상품 팀 담당자인 그는, 난간에 기대어 바깥에 조각된 황소 동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장이 꼭 저 황소같이 거세군.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늘 오늘만 같기를.”
따스한 봄날 같은 세계 경기.
호황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저 황소처럼.
“조금만 운이 더 따른다면… 임원까지 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금세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월 스트리트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달려 나가려던 황소는, 이제 하나의 구릿빛 점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들 정도로.
“닉! 이제 오시는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부하직원.
무언가 사고라도 친 것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광대뼈가 하늘로 솟구칠 듯한 기세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리슨? 무슨 일이지?”
“추수감사절 선물이 있습니다! 무려 2억 달러 규모의 파생상품 매수 요청이요! 만기일 1개월짜리!”
2억 달러라는 거액에 눈이 휘둥그레진 닉.
아무래도 부하직원이 예시를 잘못 든 모양이었다. 추수감사절 선물같이 잔잔한 것이 아니라, 할로윈 사탕처럼 놀랄만한 사항인 것을.
“세상에, 2억 달러라니! 올해 보너스로 맨해튼에 집을 사도 되겠군! 그런데 그 소중한 고객분은 도대체 누구지?”
“그게… 기존 고객 리스트에 없던 회사입니다. 그 회사 이름이 그러니까….”
앞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뒤적거리는 부하 직원.
금세 메모해 둔 내용을 찾은 모양인지, 그의 머리 위에 밝은 백열전구 하나가 올라왔다.
“<코코아>. 꼭 무슨 농산물도 아니고 참 희한한 이름을 하고 있더군요.”
“<코코아>? 혹시 곡물 메이저 업체 쪽인가? 그쪽 자금 담당이면 어지간히 피곤하게 구는 치들인데.”
“그건 아닙니다. 이 회사 국적을 보니 한국이었거든요.”
“잠깐… 이봐, 이봐, 리슨. 지금 한국이라고 했나?”
한국(Korea)이라는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닉. 무언가 내키지 않는 표정의 그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북한의 로얄 킴 패밀리와의 거래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 알지 않은가?”
“아, 오해입니다. 북한이 아니라 남한, 서울에 있는 회사라더군요.”
“남한, 남한이라….”
벌써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얼치기 신입 사원 시절 한국에서의 출장 근무 기억을 떠올린 닉.
분명 갓 후진국 티를 벗어낸 그 나라에서 이 정도의 파생상품 거래가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던 모양이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손바닥만 한 곳에서 배짱 하나는 두둑한 놈이 튀어나온 모양이군. 어처구니없는 포지션을 잡다니.”
“어떻게 할까요? 오늘 내로 답변을 주지 않으면 쪽으로 가겠답니다.”
거만한 웃음을 얼굴에 띄운 닉.
그는 엄지로 <골드만 셔츠>의 로고가 조각된 황금색 금속 조형물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걸 놓쳐서는 <골드만 셔츠>에 있을 자격이 없는 놈이지. 안 그런가?”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 줘도 못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지. 놈들이 자기들 손으로 돈을 가져다 바친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우리는 수수료만 먹으면 그만이고.”
부하 직원에게 손바닥을 내미는 닉. 손 위에 묵직한 서류철이 얹어지자마자, 그는 볼펜을 꺼내 곧바로 서명했다.
“진행해. 만기 한 달짜리라니 최대한 빨리 시작하자고.”
“보너스 파티로 따뜻한 연말이 되겠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하 직원을 보내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닉. 책상 위에 구둣발을 걸쳐 올린 그가, 깍지 낀 손을 뒤로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입에 문 갈색 시가 한 대.
딸깍, 금속제 지포 라이터에서 불꽃이 솟구침과 동시에 들이쉰 안락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뱉은 연기에, 그의 눈앞에는 무언가 노란 불빛 비슷한 것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후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남한에서 이번과는 반대로 파생상품 매도 중개를 신청한 곳이 있었는데….”
찌뿌둥한 느낌으로 눈을 뜬 닉.
모니터 화면에 비친 환한 빛 탓에 눈가를 찡그린 그가 이전 데이터를 찾기 시작했다.
몇 번의 키보드 타이핑 소리가 나고 나서야 보이는 상세 내역.
“남한, 남한. 아, 여기 있군. 탄약 증권.”
네 개의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탄약 증권과 관련된 데이터.
드르륵, 마우스 휠 굴러가는 소리가 채 몇 번 나지 않았음에도, 그의 얼굴에 무언가 의구심 섞인 표정이 올라왔다.
“이건… 뭐지? 여기서 탄약 증권에서 매도했던 파생상품을 <코코아>에서 매수했잖아? 그리고….”
반짝거리는 불빛을 내뿜으며 실시간으로 변하는 지분을 표시하는 프로그램.
그는 다른 쪽 화면에 비친 거래량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누군가… 제3의 세력이. 이 알 수 없는 전쟁에 뛰어든 모습을.
“<상하이 캐피탈>? 순식간에… 지분을 빨아들이고 있어?”
* * * *
“<골드만 셔츠> 쪽에서 서브 프라임 관련 파생상품을 매도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계약 조건 다시 확인 후, 이상 없을 시 바로 결제하세요. 오늘 안에 전부 끝내야 합니다.”
타닥타닥, 키보드 타이핑 소리가 마치 장마철에 비가 내리는 것만 같다.
조금씩 올라오는 긴장감.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불안했던 것일까? 주먹 쥔 두 손에 흥건하게 맺힌 땀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얼레? 우리 회장님, 그렇게 자신만만하시더니 파산해서 우유 배달 구루마 끌까 봐 걱정되나 보네?”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낄낄거리며 내게 다가온 김원철 아저씨.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설프게 숨어 있었다.
“끌어도 같이 끌어야죠. 플란더스의 개로 치자면, 저는 네로 역할을 맡겠습니다. 부실장님은 파트라슈 하시면 되고요.”
“하! 그거 완전, 나만 죽어라 힘쓰고 우리 회장님은 구루마 위에 앉아서 우유나 마시겠다는 거네?”
“그때도 곁에서 도와주시리라 믿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무한 신뢰를 주는 상사도 다 있고.”
서로 말도 안 되는 농담 따먹기를 하는 나와 김원철 아저씨.
이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그저 진인사대천명, 나머지 일은 하늘에 맡긴다는 생각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
“어… 어…!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전장 터 상황실이나 다름없이 변한 <코코아 뱅크>의 사무실.
탄약 증권 거래 현황이 표시된 대형 전광판에 갑자기 긴급상황을 알리는 불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상하이 애들이 매입에 나섰습니다! 시장에 있는 매물 전부를 쓸어갈 생각인 것 같아요!”
“긴급 공시입니다! 교직원연합회, 나봄 증권, KJL 인베스트먼트에서 가지고 있는 탄약 증권 지분의 명의가 상하이 쪽으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