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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48화 (48/300)

48화폭풍전야(2)

호텔 플로렌스 꼭대기 층.

흰색 천과 푸릇푸릇한 꽃잎으로 장식된 여러 개의 원형 테이블 앞, 제각기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선 사람들.

주주총회를 하루 앞둔 오늘, 문중회에서는 호사가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주전부리와 함께 입가에 오르내렸다.

서로를 마주한 채 담소를 나누던 그들의 눈은, 때때로 연회장 정중앙 상단에 걸린 문구를 향했다.

-경(慶) 한서준 회장 내정자 축(祝).

불과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의 새로운 리더.

격식과 상식을 깨트린 선택은 현실의 모습으로 다가와 호기심이라는 흔적으로 내려앉았다.

“어쨌거나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가서 거기 정권도 바꾼 양반 아니겠는가. 90조 원 매출도 올렸고. 그걸 보면 핏줄은 못 속인다는 것이여.”

때로는 듣는 이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용비어천가가.

“흠… 그래도 일단 불안허긴 하네 만은. 아닌 말로 우리 막내아들뻘이나 다름없지 않나? 안정이 필요한 시기에 저 혈기를 어찌 감내할꼬?”

누군가는 말끝을 흐리며 신중론을 펼쳤으며.

“나는 다른 것보다… 한화기 그치가 가만히 있다는 것이 더 이해가 안 가는구먼. 일을 내도 크게 낸들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거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균열이 일어난 단면을 손끝으로 매만지는 자까지.

코앞으로 다가온 주주총회에서의 회장 임명은 이야기꽃을 만개시키기 충분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구석 자리. 연회장의 화려함에서 한 발짝 물러나, 팔짱을 낀 채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두 사람.

“문중회 여론이 생각만치 나쁘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사장님.”

“간사님께서 음으로 양으로 힘써주셨다 들었습니다. 이거,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요.”

밝은 샹들리에 빛이 내려앉은 곳에 시선을 둔 채,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서명희 이사장과 한율산 전 간사.

두 사람은 아무도 엿듣지 못할 구석진 곳에서 선대 회장의 비자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사는 무슨요. 이 늙은이는 그저 이사장님 선택에 따를 뿐입니다.”

“달리는 말을 바꿔 타시는 데에는 큰 결단이 따른다는 것은, 비록 아녀자의 몸일지언정 머릿속으로 알고는 있습니다.”

“워낙에 그 아이가 빛이 났으니 말입니다. 도저히 어린 나이라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그리고….”

은색 크리스털로 수놓은 백조 두 마리의 형상. 천장 위에서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는 두 개의 샹들리에 조형물이 왠지 모르게 통일성 없이 따로 떨어진 느낌이 드는 것은 그들만의 착각이었을까?

불길한 직감을 애써 떨쳐낸 채, 말끝을 흐린 한율산 전 간사. 수염을 쓸어내린 그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한서준이 그 녀석과 약조한 바도 있고요. 금융 쪽 계열 분리 말입니다.”

금융 쪽 계열 분리.

스스로 정한 룰이었으나, 내심 불씨를 남긴 것이 아닌가 우려하던 서태후. 그녀는 얼마 전, 이사회에서의 소동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대관식의 예행연습을 첩 자식이라는 날 선 독설로 망친 자신의 작은아들. 그리고 스산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경고를 날리던 손자.

분명 둘 중 하나 누군가는 파멸의 골짜기로 굴러떨어져야만 끝이 날 것만 같았던 분위기.

“저번 이사회에서 회장 선출에 대해 일련의 소동이 있었다 들었습니다만. 사실인지요?”

“…작은 잡음이 있기야 했습니다만, 한서준이 본인도 그룹을 위해 동의하긴 했습니다. 한번 분리되면 결코 되돌리려 하지 않을 겁니다.”

“크흠….”

낮은 목소리로 고민 섞인 한숨을 내뱉은 한율산 전 간사. 그에게 고려해야 할 변수는 비단 계열 분리에 따른 위험성뿐만이 아니었다.

“여하튼, 지금은 무엇보다 안정이 중시되어야 허니 말입니다. 다만, 문제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충청남도 서산에서 이곳 서울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드는 이유.

연회장 안, 사람들의 집중되는 이목을 한데 받으며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

한덕술 명예고문과 한형민 문중회장.

자신들의 세상이라도 맞이한 듯, 환히 웃는 두 사람의 얼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응시하는 노인의 눈가에 분노 섞인 주름이 잡혔다.

“저 해충들을 빨리 박멸해야 하거늘….”

* * * *

“아이고, 신수가 훤하시네. 문중회장 아들내미를 두어서 그런가? 덕술 형님은 자식 농사 잘하셔서 참으로 부럽소.”

“허허허. 잘 허기는 무슨. 인제 갓 초짜 티를 벗을까 말까인데. 아무튼, 나중에 또 보세나. 지금은 찾는 이가 많아서….”

중년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만들어낸 표정을 얼굴에 띄운 한덕술 명예 고문. 그는 연회장 구석구석을 옮겨 다니며 얼굴도장을 찍는 데에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나…? 이제 곧 연락이 올 때도 되었건만.”

피곤했던 모양인지 급히 음료를 들이켜고 소매로 입을 닦는 한덕술 명예 고문.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 자락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문중회 주요 인물 대다수가 참석한 연회. 원만한 인간관계까지.

첫 포문을 열기에 최적의 상황인 지금.

“아… 아부지! 왔어요, 왔어!”

때마침 전화기를 손에 쥔 채, 뒤뚱거리며 한덕술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형민 문중회장.

그나마 그동안 싫은 소리를 했던 것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던 것이었을까?

못난 아들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음을 느꼈던 건지, 자신에게 귀엣말로 무어라 작게 말을 꺼내었다.

“성공, 성공입니다. <상하이 캐피탈>에서 탄약 증권 매집이 거의 마무리되었다네요!”

“…수고 많았다. 이제 남은 건 이 아비가 다 알아서 하마.”

전신에 감도는 승리의 기운.

한덕술 명예 고문은 이제껏 애써 시선을 피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간 장애물이라 여겨왔던 두 사람. 서명희 이사장과 한율산 전 간사.

-뎅그렁!

티스푼에 부딪힌 작은 놋쇠 종이 울리고, 곧바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이목.

언제 준비했던 것인지 손에 든 마이크. 비릿한 피 내음이 잔뜩 묻기라도 한 듯, 한덕술 명예 고문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산양을 제단 위에 올린 채 돌칼로 심장을 베는 제사장처럼.

“친애하는 문중회 가족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삽시간에 집중된 수백 개의 눈.

능숙한 연사가 된 한덕술 명예 고문이 중앙 연단 위로 올라,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회장 선출 확정을 위한 주주총회를 앞두고, 많은 분께서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계시나 보네요. 그렇지요?”

웃음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박수갈채.

벌써 분위기를 타기라도 한 것인지,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지으며 삼삼오오 희망에 취한 듯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허허허…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겝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야 뒤에서 조언만 해도 충분하겠지.”

“암요. 탄탄한 젊은 피가 그룹에 생기를 불어넣지 않겠어요? 거기에… 선대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인데.”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

목젖 너머로 긴장감을 삼킨 한덕술 문중회장은 한화기의 신신당부를 떠올렸다.

자신이 내민 손을 잡으며, 차갑게 날 선 목소리로 또렷하게 내뱉었던 그 말을.

‘한서준 그 더러운 첩년 자식이 문중회 앞에서 출생의 비밀을 발가벗겨지게 해 주십시오, 반드시.’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한덕술 그 자신, 한화기, <상하이 캐피탈>까지.

켜켜이 쌓인 화약 더미 아래 선 노인. 아주 거칠게, 그가 성냥불 심지에 온 힘을 다해 불을 붙였다.

“참으로 큰 기대의 목소리가 들리니, 저 또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러나…!”

삽시간에 찾아온 적막감.

얼어붙은 시간이 조각조각 난 파편으로 쪼개지기라도 한 듯한 그 이질감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뒤편에 선 채 가만히 연설을 듣던 서태후와 한율산 전 간사였다.

“설마… 한덕술 저자가!”

“이사장님! 막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후계자의 정통성에 흠집이 나는 순간 문중회 구성원의 지지는 끝이에요!”

붉다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

경보음을 울리며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두 사람.

그러나,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화약 더미에 불꽃이 인 것은, 그들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보다 한발 앞선 것이었다.

“탄약그룹 차기 회장직에 내정된 우리… 한서준, 한서준이가! 사실은 반쪽짜리 핏줄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멈춰버린 시간.

그대로 정지된 판토마임 무대. 현실 속 배우들이 움직인 것은, 청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반쪽짜리 핏줄? 지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게지?”

“가만, 가만. 설마… 헛소문으로 치부했던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는 건가!”

거미줄 모양으로 금이 간 유리창.

위태로운 표면 위에 작은 쇠구슬 하나가 떨어졌다.

“첩 자식.”

“……!”

삽시간에 몰아닥친 경악이라는 해일. 툭, 하고 내뱉은 단어 한 마디에 좌중의 분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찢어지듯 산산조각났다.

“딴따라 출신 애미에게서 얻은 서자. 이런 천한 태생을… 우리 탄약그룹의 최고 어른으로 섬겨야 한다니! 이 무슨 황망한 일입니까!”

피리 부는 사나이의 가락에 이끌려 바위 위에 올라가 버린 쥐 떼처럼 변한 사람들.

술렁이는 장내. 패닉으로 인한 광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누군가가 탈출구를 찾았다는 듯이 목청을 높였다.

“그럴 리가… 그렇지! 이사장님, 서명희 이사장님께 내 직접 확답을 받아야겠네.”

“첩 새끼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가만있자, 아까 이사장님 계셨던 곳이….”

-딸깍

등이 꺼진 채 어두웠던 뒤쪽 공간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마치 막이 내린 연극 무대 위, 앙코르를 위해 비친 스포트라이트처럼.

한쪽 팔을 뻗어 서태후를 향하는 한덕술 명예 고문. 승자의 얼굴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마침… 이 자리에 계시는군요, 이사장님.”

“한덕술 명예 고문… 당신이 어떻게!”

이미 힘을 잃은 그녀가 내지른 고성이 사람들의 귓가에 울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한밤중의 기습이 성공한 승자의 비릿한 미소 만이 이곳에 가득할 뿐.

“이리 올라오셔서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한서준이가… 반쪽짜리 핏줄인지를! 천박한 딴따라 년의 자식인지를!”

* * * *

다급한 목소리가 마치 가까이서 북을 치듯 귓가를 울렸다.

충분히 예견했던,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사건.

문중회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상관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어차피 상정해둔 범위 내의 일입니다.”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할머니의 목소리.

귀에서 전화기를 조금 떨어트린 내가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으니 너무 심려치 마셨으면 합니다. 모든 것은… 그리고 모든 주도권은 아직 제가 쥐고 있으니까요.”

다다미가 깔린 일식 방.

벽에 걸린 족자에 멋들어지게 쓴 한자는 당장이라도 솟아오를 것 같은 이무기 그림을 휘감고 있었다.

용이 되기 위해 그토록 하늘을 오르려다, 넘지 못할 구름 벽에 부딪혀 내려앉은, 그 이무기를.

“저는 이제 조금 중요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서요. 자세한 것은 이따가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어라 소리치는 듯한 목소리가 더 들렸지만, 곧바로 끊어버린 통화.

따뜻하게 덥힌 사케 한 잔을 들이켠 나는 앞에 앉은 뚱뚱한 남성에게 말을 건네었다.

“보시다시피 여의주를 물고 올라가려면, 여기저기 천둥소리가 나곤 합니다. 예기치 못한 벼락도 치고요.”

“크흠….”

곤란한 표정의 중년 남성.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 사각 안경을 쓴 그는, 단단히 불편한 일이 있기라도 한 듯 안절부절못한 모습이었다.

그의 이름은 김한수.

산업은행 총재의 위치에 오른 자.

깜빡 잊고 방학 숙제를 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그에게, 나는 천천히 그가 어떤 잘못을 하려 하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하늘로 오르려는 산업은행에 어떤 벼락이 기다리고 있을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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