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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49화 (49/300)

49화폭풍전야(3)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 해가 채 지지 않은 저녁의 초입.

명령조에 가까운 말투로 나를 불러낸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그렇게 시작된, 갑작스럽고 또 일방적인 만남은 불쾌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이고, 우리 탄약그룹 차기 회장님 얼굴 보기가 참으로 힘들다. 젊으신 양반이 자꾸 그렇게 비싸게 굴어서 쓰나?”

“아직 주주총회가 남아 있어서 말입니다. 비단 총재님뿐 아니라 다른 외부 일정은 전부 거절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고압적인 경제 관료 출신이어서일까?

초면임에도 이미 시작부터 찾아볼 수 없는 존대.

그는 마치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듯 내게 술잔 가득 도수 높은 사케를 따랐다.

“재계에 있는 사람이 대쪽 같으면 부러지는 법이지. 큼지막한 도끼를 든 나무꾼이 줄기에다 날을 문대기도 하고. 나처럼 말일세.”

불콰하게 취한 얼굴, 헝클어진 머리칼.

바지춤의 혁대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치는 그 모습은, 입이 아닌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힘을 가진 자라고.

그러므로… 내 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오라고.

“…바쁜 사람들에게 밤은 짧고 시간은 귀한 법이지 않겠습니까? 서론이 길면 피차 피곤할 뿐이고요.”

고개 따위 숙일 생각이 일절 없는 나.

김한성 총재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으로 거친 왕골 다다미 바닥을 쓸어 만졌다.

어색한 침묵이 깨지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번에 산업은행에 탄약그룹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라고 요청했다 들었네.”

“그렇습니다.”

“인정 하나는 빠르군. 그래서, 무슨 꿍꿍인가? 그것도 주주총회를 코앞에 두고서.”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

성미가 급한 듯한 그는 서서히 올가미를 조이듯 내게 압박을 이어나갔다.

“단순히 지배권을 강화한다기엔 사들이려는 계열사들이 중구난방이고, 그렇다고 돈이 썩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

“아무리 생각해도 타당함과는 거리가 멀단 말이지. 안 그런가?”

떠보듯이 흘리는 말투.

내 앞에 앉은 이 자가 내 속내를 모르듯, 나 역시 그의 생각을 쉬이 읽지는 못했다.

단순한 자기 과시? 아니면… 숙부와의 어떤 연관성?

제 성미만큼이나 거친 기운을 띤 리트머스 시험지.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위에 시료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이래저래 불필요하게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봅니다. 주제에 걸맞지 않게 과분할 만큼.”

“허허허… 주제에 걸맞지 않아?”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새하얗던 리트머스 종이는 얼큰하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처럼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뭐, 현찰 다발로 재벌가 목줄 쥐는 게 내 업이니 말일세. 특히나 혈기 왕성한 젊은 개는… 초장에 버릇을 잘 들여야 해서.”

“젊은 개라….”

“살점이 가득 붙은 뼈를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더군. 최근 자네 행보가.”

붉었다. 명백한 적대감이 느껴질 정도로.

금융 엘리트로서의 끝을 모르는 프라이드. 권력이라는 칼을 손에 쥔 채 마구잡이로 흔들어보고 싶은 욕망.

분명 평소였으면 위기를 알리는 경보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뿜었을 터.

“그래서, 한 회장, 내 자네 대답을 못 들었구먼. 무슨 생각인 게지?”

그러나… 지금은, 그룹의 승계권을 둘러싸고 피 튀기는 전쟁 중인 이 상황에서는.

권력에 취한 산업은행 총재 따위, 그저 앞길을 나아가다 걸린 돌부리 따위에 불과하다.

그것도, 이미 회귀 전 산업은행이 어떤 우를 범할 뻔했는지를 아는 나에게는 더더욱.

술잔에 담긴 투명한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나는, 그의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대답했다.

“총재님께서 개장수 역할 하신 지 이제 막 두어 달쯤 되셨습니까?”

구겨진 종잇조각처럼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 찡그린 입가가 열려, 내게 힐난이 쏟아지기 바로 직전. 나는 먼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하시는 걸 보니, 총재 노릇 오래 하시긴 글렀네요. 잘해봐야 이번 달 말까지?”

* * * *

숨은 고리.

탄약그룹의 지배권과 관련된,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자회사의 지분.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이 회사의 주식은, 때로는 헤지펀드가, 때로는 연기금이, 때로는 타 증권사의 손에 쥐여 있었다.

마치 숲속 곳곳에 심어진, 흔해 빠진 잡목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회장님아, 요 며칠 동안 매수청구권 발동했걸랑? 15% 프리미엄 준다니까 대부분 별말 없이 오케이 하는데… 딱 한군데가 자꾸 비싸게 구네.’

어제저녁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다가온 김원철 아저씨.

그의 손에 든 서류철에는 푸른색 산업은행 로고가 나비의 날개처럼 박혀 있었다.

‘아예 하꼬 자산운용사 같은 곳이면 지분도 적고 하니, 증권시장에서 무대뽀로 매입하면 되는데. 여기는 또 워낙 큰손이라….’

‘산업은행… 알겠습니다. 제 선에서 처리할 테니 하시던 일부터 마저 진행하고 계시죠.’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 김원철 아저씨.

아직 저쪽의 속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자신감부터 내보인 내 모습이 조금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 무슨 내가 모르는 약점이라도 쥐고 있는 겨? 산업은행 총재 막둥이가 바깥에서 낳아 온 자식이라든가 하는 식의.’

‘약점. 있지요. 물론 있는지도 모르는 막둥이 이야기는 아니긴 합니다만.’

약점.

정확히는 산업은행 총재 개인의 약점이 아닌, 산업은행 전체의 약점.

오로지 미래를 엿보고 온 나만이 알 수 있는 이 사실을 생각한 나는 말없이 조용히 웃음 지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쭉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의 얼굴에 분노가 스몄다.

“크흠, 어린놈이 벌써부터 협잡질이나 하는 법이나 배운 모양이로군. 꼴에 국회나 청와대에 끈이라도 있는가 보지?”

앉고 있는 방석 뒤편으로 한 손을 짚은 김한성 총재. 그는 다른 손으로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기껏해야 수석비서관 몇 놈 라인이나 잡았을 게 뻔하구먼. 이봐, 핏덩이 놈. 내 말 똑똑히 듣게나.”

땅바닥으로 연기를 내뱉는 김한성 총재.

마치 피의자 앞에 앉은 조사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먹 망치로 탁자를 내리친 그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왔다.

“뭣도 모르고 깝쭉거리는 재벌가 작자들 목줄 틀어쥐라는 거, VIP께서 직접 내린 명령이야! 정권 초 기강을 잡으라고! 네놈이 알아?”

“착각이… 많이 심하시네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뭐라…?”

“지금 제가 하는 말. 청와대에 계신 수석비서관이고 VIP고 뭐고, 그딴 것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문제입니다.”

묘한 얼굴.

마치 성당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이어 붙인 색유리 조각처럼, 그의 얼굴에 깃든 표정은 여러 개의 생각의 빛이 서린 모양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절대적이라 여겨온 권력과 끈. 그 방정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외계어에 어안이 벙벙해진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나는 그가 생각할 얼마간의 시간도 주지 않고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미래에서 엿보고 온, ‘그 사건’에 대해.

“총재님의 미래를 가를 변수는 조선 땅에 있지 않거든요. 아마 그 악마는, 맨해튼 7번가 고층 빌딩에 천사의 얼굴을 한 채 숨어 있을 겁니다.”

맨해튼 7번가라는 말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극비리에 준비하던 사항에 대해, 일개 사기업의 회장 내정자가, 그것도 아직 새파랗게 어린 내가 어찌 알고 있느냐는 모습이었다.

“자, 자네가 그걸 어찌…!”

떨려오는 눈가. 설마설마하는 의구심과 불안감이 밀물처럼 자기도 모르는 새, 서서히 들이닥쳐 오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뒤바뀐 상황.

어느새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개처럼 온순해진, 그의 수그러든 어깨.

손바닥에 굵은 목줄을 쥔 내가 입을 열었다.

“리만 브라더스. 인수하시는 순간 그대로 망합니다. 총재님도, 이 정부도, 이 나라도.”

* * * *

탄약그룹 본사 인근의 내 오피스텔.

피곤한 몸을 소파에 누이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맥주를 따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이제 알겠네.”

마치 초등학생들이 벨을 누르고 도망치는 장난을 하듯, 마구잡이로 연속해서 누르는 모습.

현관 카메라에는 복도의 전등을 민머리가 그대로 반사해, 반짝이는 불빛만이 비치고 있었다.

“YO, 회장 내정자.”

“YO, 부실장님. 뭘 또 이런 걸 사 오셨습니까. 이미 비싼 일식집에서 밥 먹었다니까요.”

족발 냄새가 나는 까만 비닐봉지를 손에 든 김원철 아저씨.

아무렇게나 구두를 벗고 들어온 아저씨는 다짜고짜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며 말했다.

“흐흐흐… 이건 내가 먹을 것이여. 그리고 숨 막히는 이야그 하느라 밥숟가락이나 제대로 떴겄어?”

“귀신이 따로 없네요. 일단 앉으시죠.”

-챙!

허공 위로 소주잔 두 개가 부딪히고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느슨해진 긴장감.

말문을 먼저 튼 것은 족발을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김원철 아저씨였다.

때마침 TV에서는 타이밍도 적절하게 주제에 맞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고.

-[속보] 산업은행, 리만 브라더스 인수 포기.

-[속보]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리만, 총부채만 한화 620조 원 넘어… 정보 출처는 밝힐 수 없어.’

“산업은행이 리만 브라더스를 인수하려 했던 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아니, 아니.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뉴스에서는 아까까지 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서류 봉투.

회귀 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고 온 내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리만 브라더스의 모든 부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리만 브라더스의 저 말도 안 되는 부채. 저건 또 어떻게 알았고?”

“회장의 그릇이 되려면 다 알아야 합니다. 저 잘난 거 아시면서.”

“어으, 재수 없어. 그래서, 김한성 저 아저씨가 순순히 탄약그룹 계열사 지분을 팔아 준다냐?”

“자기 죽을 뻔한 걸 살려줬으니까요. 이제 돈만 입금하면 됩니다.”

말을 마친 나는, 깍지 낀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어 올렸다.

찌뿌둥한 몸을 풀자 손님처럼 남몰래 찾아온 피로감.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귓가에는 TV 속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업은행의 리만 브라더스 인수 결렬로 인해 미국의 월 스트리트 금융가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리만 측은 밝혀진 과도한 부채에 대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요.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경제 위기의 초입이라는 논평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리만 브라더스.

이제 며칠 후 파산할 월 스트리트의 거대한 공룡.

둔중한 소음을 내며 땅 위에 쓰러질 공룡은, 세상 모든 먹이사슬에 태풍을 불러올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경제 대공황을.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금융위기까지. 일단 매수청구권은 발동했지만, 실제 결제까지 마저 해야 하니까.”

손가락으로 셈을 하는 나.

과거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에 이르는 방아쇠는 산업은행의 인수 포기 선언이었다.

나라는 변수로 인해 조금 빨라진 인수 포기 결정.

머릿속 계산기를 충분히 두드린 내가 손에 쥔 젓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닙니다. 역사가 바뀔 거니까요.”

“뭔 뜬구름 잡는 소리여? 그건.”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저희 쪽 상황과 딱 맞게 가겠네요.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모든 것이 결정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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