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주주총회의 날(1)
탄약그룹 본사 근처 복어요릿집.
맨 위 이불처럼 덥힌 쑥갓 아래,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끓고 있는 복지리탕은 어느새 자작하게 국물이 졸아 있었다.
마치 가만히 앉아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처럼.
“옘병… 차라리 말이여라. 여그에 복어 독이라도 이빠이 들어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디.”
“선배. 택도 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잔이나 받으쇼. 어쩌면 술로 죽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으니 말이요.”
손도 거의 대지 않은 복지리탕과는 정반대로, 벌써 식탁 위에 그득그득 쌓여 있는 초록색 술병.
목구멍 너머로 근심이 담긴 술을 털어 넘긴 박한이 사장이 옷소매로 입을 훔치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뭣이다냐. 나 사장아, 너 그건 만들었고? 중국 짜장 애들한테 넘길 보고서.”
“만들긴 했지. 만들었는데… 그다음을 못 가서 그렇지.”
“허기야. 나도 다 해놓고서 만지작거리고만 있응께….”
한화기의 첫째 아들 한서호가. 아니, 정확히는 <상하이 캐피탈이> 자신들에게 요구했던 사항.
핵심 방산 기술이전. 그리고 해외 자원 개발권 염가 매각.
제반 사항에 필요한 준비를 끝낸 두 사장에게는, 이제 자신의 이름이 파인 도장을 찍어 한화기에게 넘기는 일만 남은 상황.
“처음엔 요것이 동아줄이다 생각했는디 말이여. 생각해 보니께 잘못하면 국정원 성님들 면상떼기도 볼 문제 아니여, 이게.”
당장 살기 위해, 죽기 싫어서 허겁지겁 붙잡았던 손.
그것은 마치 복어 살에 스며든 맹독과 같았다.
막무가내로 먹어 치워 이제야 조금 허기가 가시려는 순간, 온몸의 신경 끝자락에 찾아온 섬찟한 느낌.
이제 그들에게는 해독제도, 남은 비상식량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한 숟갈, 두 숟갈, 미래는 생각지 않은 채로 배가 터질 때까지 입안 가득 밀어 넣을 일만 남았을 뿐.
“그냥… 한화기 그 양반이 알아서 잘 처리하기만을 바라야지. 이거 말고 방법도 없잖소?”
“하기야, 이대로 한서준이가 회장 되믄 우리는 횡령, 배임 건으로 징역 확정이니께.”
국자를 한가득 채운 복지리탕.
찡그린 얼굴로 앞접시에 담긴 국물을 단번에 들이켠 박한이 사장이 옷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독이라도 들이켠 것처럼 붉은색 실핏줄이 가득한 그의 눈.
껌뻑거리는 그 위에 무언가 결심이 들어서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오늘 저녁께 문중회에서 아주 난리가 났다지? 싹 다 뒤집어졌다믄서?”
“한서준이가 첩 새끼라고 한덕술 명예 고문이 대놓고 말했다지 않소. 문중회 영감탱이들은 죄다 뿔이 나 버렸고.”
소리 없이 마주치는 두 사람의 시선.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끄덕거린 고개.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독이 든 성배가 두 사람의 술잔에 가득 채워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허공 위 부딪친 유리잔.
취기인지 독기인지, 알 수 없는 기운에 빠진 박한이 사장이 굳은 결심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크흐, 인자 그냥 결재 올려버리자고. 그 상하인지 뭔지, 짜장 아그들한테 우리 탄약그룹 팔아먹는 보고서.”
* * * *
탄약그룹 본사. 한화기의 집무실.
아침 햇살이 투명한 유리창을 가로질러 정장 차림의 사내 앞에 멈춰 섰다.
중요한 일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더 격식을 갖춘, 정제된 차림을 한 한서호.
무엇이 그리도 좋은 걸까?
제 아버지 앞에 선 그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머슴 두 놈이 마음을 굳힌 모양입니다. 오늘 아침, 드디어 결재가 올라왔습니다.”
“모든 부속품이 딱 맞게 준비되었군. 서호 네가 수고가 많았다.”
제 아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한화기는 대견함이 담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어딘가에 당당하게 내놓을 만큼 자랑스럽지는 못했던, 조금은 모자라고 부족했던 큰아들.
그러나 요 몇 달 사이 불쑥 커지기라도 한 듯, 맡은 자리에서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앞으로도 서후 놈이 유배지 바깥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게다.”
“아버지….”
마치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내리듯, 무심하게 둘째 아들의 처분을 입에 담는 한화기.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첫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장남에게 모든 것을 몰아 주는 것이 맞겠지. 이번 위기가 끝나는 대로 네가 칼자루를 쥐거라.”
“제가… 말입니까?”
제 아버지의 끄덕거리는 고개를 본 한서호는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소리를 감출 길이 없는 모양이었다.
반석처럼 단단해진 후계 구도에 피 묻은 칼이 더해진다면, 필시 자신도 차후에 왕관을 물려받는 것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을 터였으니까.
“성원식, 구석수, 정철식, 양택수, 그 천박한 첩실 자식놈 장단에 함께 놀아난 머슴들.”
들짐승이 그르렁거리듯 배신자의 이름 하나하나를 낮게 읊조리는 한화기.
분노 섞인 핏대가 올라온 그의 목을 타고 증오로 떨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김원철 그놈까지. 전부 네가 직접 목을 쳐라.”
그 서슬 퍼런 눈빛에 차마 대답을 이어나가지 못한 채,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한서호.
“칼끝에 일말의 자비조차 두지 마라. 머슴 개개인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놈들의 일가 전체가 폐족이 되어 비참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각이 잡힌 채 대답을 내뱉었으나, 한서호는 여전히 제 아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직 나오지 않은 이름 하나. 한서준이라는 반란 세력의 수괴에 대한 처분.
뒷말을 잇지 않은 채로 차렷 자세를 유지하는 제 아들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간 모양일까?
작게 코웃음을 친 한화기가 무심한 듯, 그러나 가슴팍에 끓는 감정을 가득 실은 채로 입을 열었다.
“놈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
“아….”
“이번 기회에 잘 보고 배우거라. 아득바득 다리 위로 기어올라 옷 속으로 파고든 거머리를 어떻게 잡아 죽이는지를.”
“그러면… 어제 문중회에서 있었던 일도, 그 일환이라 볼 수 있습니까?”
근엄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한화기. 그의 시선 끝에 닿은 시곗바늘은 오전 아홉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간이 슬슬 다 되었군.”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사형집행인처럼, 그가 가진 모든 도끼 가운데 가장 둔탁한 것을 손에 쥔 한화기.
<상하이 캐피탈>로부터 건네받은 도끼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천출이라는 고깔모자를 쓴 채, 사형대 위에 묶인 정적의 목을 내려칠 수 있을 만큼.
“이동하지. 가서… 그 천한 첩 자식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담아 두거라.”
“예.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주총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부자.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잡아챌 것만 같은 왕관에 눈이 먼 까닭일까?
등 뒤, TV에서 무어라 흘러나오는 소식은 상기된 마음으로 붉어진 그들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산업은행의 인수 포기가 확정된 후, 리만 브라더스 측은 한동안 묵묵부답이었는데요.
-방금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리만 브라더스의 루 펄만 회장의 긴급 발표가 잠시 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번 결정이 자칫 경제 위기를 불러올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 * * *
호텔 플로렌스 별관 다목적 홀.
어지간한 체육관 규모의 거대한 홀 안에는 곧 시작될 주주총회를 앞두고 분주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탄약그룹 최연소.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 재계 역사를 통틀어 최연소 재벌 그룹 회장이 나올 것이라는 두근거림.
경제신문 기자들을 비롯한 미디어 쪽 사람들은 일찌감치 새벽부터 진을 치고 있을 정도였다.
“오, 선배도 오셨네? 한성경제로 옮기셨다더니 아직도 현장 뛰시는 거예요?”
“얌마, 기자는 죽어서도 펜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이여. 그러려면 요로코롬 발로 뛰어댕겨야 하는 거고.”
“언제는 또 관리자로 가야 이 짓거리 그만할 거라면서.”
팔짱을 낀 채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선배 기자. 적당히 안부를 나누며 신변잡기를 이어나가던 그의 눈에 무언가 특기할 만한 것이 비쳤다.
“자슥이, 사람 승진 못한 걸로 또 놀리긴… 잠깐만, 잠깐만. 근데 저건 또 뭐냐?”
“아, 또 뭔데 그래요. 음? 저 영감님들 분명 한씨 집안 문중회 사람들인데?”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들과 양복 정장 차림의 중년인들. 얼굴에 분노의 기운이 잔뜩 서린 듯한 그들은 무리를 지어 주주총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고! 첩 자식이라니! 그 한서준이가 천출이라니!”
“어찌 저런 자가 회장 자리에 오르려고 한단 말인가! 나는 절대 용납 못 허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당장이라도 분란을 일으킬 것만 같은. 아니, 이미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그들의 시선 끝이 닿은 곳은, 연단 위에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회장 내정자를 향했다.
자신들의 분노에도 무심한 모습의 그 젊은이의 모습에 화가 난 문중회 구성원들.
그들의 손에 쥔 물병과 계란이 고함과 함께 연단 끝자락을 향해 날아갔다.
“이놈! 이… 고얀 놈 같으니! 네가 감히 뭐라고 거기 서 있는 계냐! 당장 내려오지 못할꼬!”
“무슨 낯짝으로 회장 감투를 쓰려 들어! 떠도는 추문이 사실임이 밝혀졌거늘! 문중회가 네놈을 지지할성싶더냐!”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한 주주총회장. 문중회의 갑작스러운 난동은 기자들의 먹잇감으로 충분했다.
마구잡이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번쩍거리는 이 환한 빛은 글자와 사진이라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터.
먼발치서 이 아수라장을 지켜보고 있는 한화기의 입가에 비열하기까지 한 웃음이 걸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허허허. 수고는 무슨. 마땅히 자네가 가져가야 할 자리 아니던가. 나는 그저 팔 한 짝만 거들었을 뿐이야.”
그리고 그의 옆에 나란히 선 한덕술 명예 고문.
입 밖으로는 겸손의 말을 내뱉은 그였으나, 노인의 눈에 비친 것은 탐욕이었다.
자신의 공을 절대 잊지 말라는, 그리고 이에 충분한 보상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약속드린 사항은 모두 이행하겠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저기 저 연단 위에 선 핏덩이가 나락으로 내려가는 순간.”
치켜든 한화기의 손끝이 그의 조카를 향했다. 마치 한 정의 권총이라도 된 듯이 조금만 더 손가락을 움직이면 당겨질 것만 같은 방아쇠.
가만히 가늠자 위에 놓인 목표물을 응시한 한화기. 잠깐의 침묵을 끝낸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어르신과 어르신의 자손은… 제 손에 든 탄약그룹이 끝까지 품을 것이니 말입니다.”
“내 자네만 믿고 있네.”
이어지는 소요 상황.
어디선가 문을 열고 뛰어나온 사회자가 급히 마이크를 잡았다.
“아이고, 어르신들 제발 고정하시고요… 일단 곧바로 금번 주주총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착석해주십시오!”
간신히 진정된 듯한 분위기.
그러나 마치 휴화산처럼 터져 나오려는 것을 바느질해 꾹꾹 눌러 놓은 상황.
가까스로 진행된 식순이 이어질 때마다 엉성하게 이어 붙인 실밥은 하나씩 하나씩 뜯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실밥. 당장이라도 뚝, 소리를 내며 터질 것만 같은 장내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떨리듯이 울려 퍼졌다.
“에… 다음 순서는! 신임 회장 내정자인 한서준 현(現) 전략실장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