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51화 (51/300)

51화주주총회의 날(2)

김성혜는 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연단 위, 똑바로 선 채 모두의 분노를 여과 없이 홀로 견디는 그녀의 하나뿐인 혈육.

김성혜의 눈가는 비 맞은 붉은 국화처럼 꽃잎 위에 아슬아슬하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아들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성난 이리 떼.

허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김성혜.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손바닥 위 스카프를 힘껏 쥐는 것뿐이었다.

비록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아들이었으나, 근본적인 원인 자체는… 그녀 자신에게 있었기에.

“내 이럴 줄 알고 따라오지 말라 했거늘.”

“…….”

“누굴 탓할 것도 없다. 서준 애미 네가 직접 선택한 일인 게다. 25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언가 내려놓은 듯한 표정의 서태후. 그녀는 며느리 비슷한 위치의 김성혜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시리도록 날 선 경멸과 무시의 눈초리가 아닌, 자식을 둔 어미의 심정이 담긴 눈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엄마라는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이나 잡고 있네요.”

연단 위에 선 아들의 굳은 표정을 보며 허탈한 듯 입을 연 김성혜.

그 옆에 선 한화기는, 제 조카를 잡아먹을 듯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첩 자식이라는, 혈육으로 만들어진 시뻘겋게 녹슨 쇠사슬. 그것으로 제 아들의 목덜미를 칭칭 감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조여오는 모습.

잔인했다. 그리고 일말의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짤막한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할 정도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와 네 출신 성분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만….”

쉬이 무어라 입을 떼지 못하는 서태후.

자신의 두 핏줄 사이에서 극한으로 치닫는 대립을 눈에 담아서일까?

서명희 이사장이 하던 말을 마저 이어간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내 둘째 아들놈보다는… 손주 놈이 더 영민하긴 한 것 같군.”

“어머님?”

“잘 봐둬라. 저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머릿속에서 잊지 말고.”

주름진 서태후의 손끝이 연단 위를 향했다. 방금까지 성난 문중회 사람들의 힐난과 증오를 온몸으로 견뎌내던 김성혜의 아들.

그러나…

“서준아?”

천형(天刑).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서자라는 원죄.

분명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붉게 슨 쇠사슬 위의 녹이, 목 가죽 사이로 파고들었을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쇠사슬 따위야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웃음 짓고 있는 모습.

만들어진 미소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이 낳은 그 웃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자라는 혈통.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일절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사진이나 영상 따위로는 기록할 수도 없을 게야. 아무리 내 손주라지만… 난 놈이긴 난 놈이군.”

* * * *

가소로웠다.

그리고 기가 찼다.

고작 이 정도 흑색선전으로, 고작 이런 수준의 망신 주기로 판을 흔들려고 하다니.

연단 아래, 잔뜩 성이 난 문중회 사람들. 마치 이마에서 염소 뿔이라도 돋아날 것만 같은 이 사람들의 지지 따위, 애초에 계산에 넣는 것조차 없었으니까.

그렇게 유지되던 평정심에 불씨가 닿은 것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 후부터였다.

“…엄마가 여기에?”

천박한 첩 자식이라는 모욕적인 언사.

그것을 그 자리에서 오롯이 듣고만 있어야 했던, 듣고서도 가만히 참아야만 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문중회라는 물감으로 숙부가 그려낸,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림 한 장.

나는 눈을 부릅뜨고는 말없이 숙부를 바라보았다.

“…….”

“…….”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 누군가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순간, 곧바로 당겨질 방아쇠.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숙부가 그린, 저열한 그림 조각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신호탄이 저 멀리 주주총회장 정문 앞에서 터져 나왔으니까.

“오케이! 오케이!”

어항 속 금붕어가 뻐끔거리는 것처럼 과장스레 입술을 오므렸다 펴는 김원철 아저씨.

그것은 오늘 아침 미리 정해 두었던, 보이지 않는 고리에 속하는 계열사 지분의 매집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예비 회장님아! 방금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했단다! 비용 다 제하고 파생상품 수익으로 딱 맞게 생겼어!’

마침내 거둬들인 2조 원의 수익.

보이지 않는 고리인 탄약그룹 계열사 지분을 사들일 수 있는 금액.

기쁜 마음에 축하 파티라도 열고 싶었으나, 뒤이은 김원철 아저씨의 말은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끔 했다.

‘근디 우리 쪽 결제 시간대가 주주총회 시간대랑 겹칠 것 같은디? 아슬아슬하다야.’

‘지분 결제가 마무리되면 곧바로 알려주세요. 그때부터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양팔을 머리 위에 올려 동그라미를 그리는, 우스꽝스러운 몸짓. 다급함과 환희가 함께 뒤섞인 그 모습에 나는 웃음으로 화답을 주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밝게 빛나는, 그런 웃음을.

“회장 후보자 한서준입니다. 몇 가지 오해와 사실이 뒤섞여 있어, 잠시 정정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마이크 쇳소리가 들리자마자 무섭게 내게로 집중되는 수백, 수천 개의 눈동자.

사격장의 표적지라도 되는 양, 한순간에 쏟아지는 분노와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과 우려.

“먼저 출생에 관한 부분. 서자가 어쩌고 하는 시답잖은 말들, 전부 사실입니다. 일말의 부끄러울 것도 없이.”

“한서준이 이놈! 예가 어디라고 감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객석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호통.

문중회의 영감님들이 내뱉는 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부족한 정통성. 서출이라는 우려. 전부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전쟁 중에 후계자를 바꾸려 든단 말입니까!”

“아니! 그래도 저, 저, 저놈이…!”

극단을 향해 치닫는 문중회의 분노. 나는 진행자를 향해 미리 준비해둔 자료를 틀 것을 지시했다.

현재 탄약그룹이 처한 위기. 그리고 곧바로 화면 위에 비친, 내가 극복을 통해 여태껏 쌓아 올린 업적들.

“이제껏 능력으로 입증해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능력으로 입증할 것입니다. 그 입증의 첫 단추가 될 것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문중회의 분노. 번져가는 들불 앞에 홀로 선 기분마저 들 지경.

심호흡을 길게 내쉰 나는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비릿한 피 맛.

혀끝에 닿는 감각이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음을 경고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괜찮다. 상관없다. 이대로 쭉 밀고 나가면 그만이다.

지금부터 입증할 능력은… 문중회의 지지 없이도 탄약그룹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떨리고 있는 마이크를 쥔 손.

마침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이 내 입술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문중회 어르신들의 힘을 보태지 않고서도 제가 회장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 * * *

“이겼다.”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린 한화기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문중회를 적으로 돌린 순간 끝이라는 걸 모르는군.”

스스로 파멸의 길을 택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조카.

마치 가만히 선 채, 먹이를 노려보는 뱀처럼 입맛을 다시는 한화기가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같으니. 이제 지분 계산을 잘못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겠군.”

손바닥 겉에 손톱자국이 박힐 만큼 주먹을 꽉 쥔 한화기. 그의 눈은 자신을 나락 입구까지 내리꽂았던 조카를 향했다.

그는 다짐했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그리고 자신이 탄약그룹의 회장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뒤이을 숙청의 피바람을 잔인하리만큼 거세게 불러일으킬 것을.

“불필요한 비용도 많이 들었었지. 저 첩 자식놈 때문에 <상하이 캐피탈>에 내어주어야 하는 것도 있고.”

방산 기술이전과 해외 자원 개발권의 염가 매각.

<상하이 캐피탈>이 내건 조건에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는 한화기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불쾌한 두통이 불러온 잔인한 처분. 그는 <상하이 캐피탈>과 관련한 모든 책임을 조카에게 씌워 넘길 것을 다짐했다.

“이걸로 끝이다. 한서준이 네놈은 평생 교도소 철창 밖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다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무리된 조카의 일장 연설.

문중회의 도움 따위 일절 필요치 않다는 호기로운 외침에 달아오른 장내.

그 반응에 진행을 맡은 사회자는 퍽 당혹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에… 그, 그러니까. 한서준 회장님. 아니, 회장 내정자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연단 위, 정중앙을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선 한화기.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사회자를 향해 오른팔을 뻗었다.

반색하는 표정과 함께 그에게 주어진 마이크. 약간의 기계음과 함께 한화기의 둔탁한 저음이 주주총회장 내부에 울리기 시작했다.

“완전무결한 혈통. 탄약그룹의 정점에 설 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 그 조건이 없는, 저 자격 없는 자를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단 한마디의 말.

한화기의 그 말에 문 열린 벌통에서 튀어나온 벌떼들처럼 문중회 쪽 사람들이 목청을 높였다.

“옳소! 어딜 서자 놈이 회장직에 오를 흉계를 꾸미나!”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한서준이는 아무 자격도 없네!”

고조되는 분위기.

문중회의 여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한화기의 눈가에 희열이 스며들었다.

곧바로 내뱉은 마지막 발언. 그의 핏대 선 목에 생긴 떨림과 함께 매서운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손으로 결정해 주십시오! 반쪽짜리 사생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반드시 심판해 주시길 바랍니다!”

* * * *

고막이 울릴 정도의 외침이었다.

한화기의 피를 토하는 마지막 호소. 그러나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주주총회장 뒤편, 검은 장막 너머에 앉은 한서호의 귓가에는 그 외침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지금 당신 뭐라고 했지? 미국이… 미국이 뭐 어쨌다고?”

“한 시간 전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했습니다. 서호 도련님. 저도 뉴욕 지사 사람들에게 지금 막 보고를 받아서….”

급히 주주총회장에 도착한 탄약 증권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비보.

미국이라는 거대한 성채가… 무너지고 있었다.

맨해튼 월 스트리트라는 반석 위에 선, 황금으로 쌓아 올린 고층 빌딩들.

마치 도미노처럼, 지금 그 자본주의의 성채가 하나씩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미노의 끝에는,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자금 조달을 위해 탄약 증권이 발행했던 파생상품이 자리해 있었고.

“그, 그러면 파생상품은! 우리가 발행했던 파생상품들 도대체 손실이 얼마라는 건가!”

“수천억. 아니, 조 단위가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확한 수치는 계산해야 알겠지만, 일단 어림짐작으로 2조 원 정도의 손실이….”

넋이라도 나간 듯 망연자실한 표정의 한서호.

자신이 주도한 자금 조달 계획이 치명적인 독약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독이 잔뜩 오른 듯, 보랏빛 혈색의 한서호. 그의 등줄기에 섬찟한 오한이 서려왔다.

둘째 한서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 일평생 유배된 자신의 동생.

어쩌면 이번 일로 지금 자신과 동생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그 생각에 한서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마구잡이로 떨려댔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이제는 어찌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

그 순간, 이명 소리만이 가득한 한서호의 귓가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 그럼 지금부터 한서준 내정자의 회장 선임에 관한 주주 표결을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입안으로 들어간 한서호의 엄지손톱.

의자에 앉은 채 위아래로 다리를 떨어대는 그가 이름 모를 신에게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무조건… 무조건 주주총회에서 이겨야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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