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52화 (52/300)

52화주주총회의 날(3)

세상이 무너져내리기라도 한 듯, 망연자실한 표정의 사람들.

세계금융의 심장부, 월 스트리트의 맥박은 싸늘한 시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멈춘 모양이었다.

“리만…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이라고? 어째서…?”

자본주의의 황금빛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황소는 돌부리에 걸린 듯이 고꾸라진 상황.

투자은행 <골드만 셔츠>의 관리자 직책의 닉 또한, 오늘은 그저 눈이 가려진 어리석은 황소 한 마리에 불과했다.

“미치겠군…! 내리지 않은 종목이 없어! 전부 시퍼렇게 멍이라도 든 것처럼 죄다 푸른색이야!”

하락을 뜻하는 푸른색 화살표가 폭포수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증권 시장.

경험해 본 적 없는 사상 초유의 상황.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마구잡이로 널뛰기를 하며 통념을 벗어난 상승과 하락을 무제한으로 반복하는 시장.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파생상품 시장을 본 닉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외쳤다.

“파생상품 쪽은 완전히 미쳤어! 이거 어디서부터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바깥에서 들려오는 그를 찾는 듯한 다급한 노크 소리에도 불구하고, 닉은 모든 소음을 무시한 채 오로지 분석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촉에 감지된 이상한 투자자 목록.

미친 듯한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안정적인 포지션을 잡은 유일한 그 회사.

이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듯, 막대한 수익을 차분하게 실현하는 것을 목도한 닉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양 홀로 중얼거렸다.

“남한의 <코코아>…? 그때 리슨이 말했던 이상한 투자사? 이건… 도대체 뭐 하는 회사인 거지?”

* * * *

미국의 중심인 뉴욕에서 지구본을 반 바퀴 돌려 손가락으로 짚은 곳.

중국의 신흥 금융 메카, 상하이 역시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빠른 속도로 침몰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거세게 굽이쳐 흐르는 양쯔강.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부사장 또한 그 매서운 물결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당황스럽군.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옌룽, 지금 예상 손실액이 얼마나 되는 거지?”

“현재 추산액만 평가 금액 기준 100억 위안이 조금 넘습니다. 송구합니다.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되었다. 검은 백조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미래를 보고 온 자가 아닌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을 터. 그나저나….”

창밖을 바라보는 제임스 왕 부사장.

강 건너 삼각주 너머로 보이는 황해. 그 동쪽 끝에 위치한 탄약그룹이 이번 폭풍우로 어떤 영향이 갈지는 그 또한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

탁자 위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 끄트머리가 벌게질 즈음이 되고 나서야, 마침내 제임스 왕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옌룽. 탄약그룹 주주총회는 아직인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오늘 안으로 전부 결판이 나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고개를 가로젓는 제임스 왕 부사장. 그는 곧바로 시선을 천장 위 동북아시아 지도를 새긴 나무 조각으로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그랬을 터다. 세워두었던 계획에는 그 어떤 하자도 없었지.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습관처럼 허공을 향해 뻗은 손. 제임스 왕 부사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말아쥔 주먹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온 한반도가 오늘따라 유독 거슬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만약 주주총회에서 한화기를 꼭두각시 왕으로 책봉하지 못한다면, 플랜 B는 준비되어 있는가?”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금융 쪽 계열 분리된 회사를 집어삼키는 방안이 있습니다.”

“적어도 투입된 자금의 손해는 줄여 보겠다는 것이군.”

침묵과 함께 찾아온 묘한 기시감.

무언가… 알 수 없는 아주 사소한 요인 하나 때문에 어그러진 정교한 계산.

제임스 왕, 그가 생각했던 퍼즐 조각 전체의 그림이 생각과는 달리 어그러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

그런데도 빠른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

자신의 직감이 말리는 것을 애써 뿌리친 채로, 제임스 왕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옌룽, 예기치 못한 상황 발생 시, 곧바로 플랜 B를 가동할 준비를 하도록. 상황이… 생각과 다르게 흐를 수도 있다.”

* * * *

주주총회장.

이 자리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이를 뽑자면, 단언컨대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회자 양반을 고를 것이다.

“이봐! 사회자, 자네! 왜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고 그러나! 그 콤퓨타에 숫자 넣고 딱딱 맞추면 금방 허는 것을 뭐 그리 어렵다고!”

“하이고, 어르신 그게 아니라요, 지금 좀 절차적인 부분에 문제가….”

“이노옴! 네놈이 개서준이에게 돈뭉치를 받아먹은 것이 분명하렸다! 이리 오래토록 지체가 되는 걸 보니, 네놈은 저쪽의 세작이 분명한 것이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지분 관계 탓에 길어진 계산.

가뜩이나 여타 다른 재벌그룹보다 훨씬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가진 탄약그룹인데, 여기에 양측의 두뇌 싸움까지 더해졌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가뜩이나 인내심이 부족하신 문중회 영감님들은 그런 제반 상황 따위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영감님들에게 들리지 않게 내 옆자리에 앉아 곁눈질로 조심스레 입을 여는 김원철 아저씨.

“이야… 문중회 영감님들 정정하신 거 봐라. 앞으로 20년은 멀쩡히 살아 계시겄어. 우리 불쌍한 개서준 회장님 어쩌면 좋냐?”

“아니, 불쌍한지 아닌지 여부는 그렇다 치고요. 왜 갑자기 제 이름이 개서준이가 된 겁니까.”

“흐흐흐… 나도 몰러. 갑자기 영감님들이 한서준이라 했다가 개서준이라 했다가 자꾸 오락가락하신다야.”

졸지에 반강제로 창씨개명을 당한 이 상황이 퍽 재미있어 보이는 듯,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김원철 아저씨.

한씨 집안 영감님들이 만들어낸 신조어는 ‘개서준’ 말고도 ‘부역자 대머리 김가 놈’도 있었지만, 나는 해당 용어를 따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요.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습니까.”

“보자… 지금 한 시간쯤 된 것 같지? 슬슬 결과 나올 때도 됐걸랑. 한 10분만 더 참아 봐봐.”

고개를 끄덕인 나. 이미 바지춤의 무르팍 부분은 손바닥에 난 땀으로 젖어버린 지 오래였다.

여러 번 계산하고 또 계산했던 내용이기에, 다가올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긴장감.

잘못된 자리 배치 탓일까?

가슴팍을 북으로 치는 듯한 이 느낌을 계속 안고 있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맞은편, 고개를 치켜세우면 곧바로 나와 시선이 맞닿는 곳에 앉은 숙부.

켜켜이 쌓인 긴장 탓에 저쪽 또한 평정심을 잃은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의자 팔걸이 끝자락이 부수어지도록 꽉 쥐고 있는 모습.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한덕술 명예 고문과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를 증명했으니까.

“흐흐흐. 한화기 저 양반도 골치 아프기는 어지간히 아플 것이여. 그런 걸 보면, 뭐… 자신 있잖아? 안 그랴?”

능글거리는 표정과 함께 팔꿈치로 내 팔뚝을 가볍게 톡톡 치는 김원철 아저씨.

그리고,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웃으며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우연히 교차한 불쾌한 시선.

“…….”

“…….”

정면으로 마주쳐버린 숙부의 눈동자.

차가웠다.

어떤 뜨거움이나 강렬함 따위와는 또 다른 부류의 느낌.

그저 눈빛이 오간 것만으로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검은 호수 안에 담아, 차디찬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 버리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오히려 좋네요. 애매한 긴장감보다는 아예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확실히 젊다는 것은 좋은 것이여. 이렇게 파이팅이 고갈되기는커녕, 넘쳐흐를 지경이니 말이지.”

나도 모르는 사이 묘한 표정을 지은 모양이었다.

나와는 정반대로 잔뜩 굳어버린 얼굴로 변해버린 숙부.

그의 미간에 잔뜩 잡힌 주름은 뒤이어 들려오는 기계음 섞인 사회자의 목소리에 풀릴 기미가 요원했다.

-아, 아, 존경하는 탄약그룹의 주주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 막 지분 계산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 * * *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를 들은 한덕술 명예 고문.

오랜 기다림에 맥이 턱 빠진 듯한 목소리의 노인이 발표 전 준비과정을 바라보며 한화기에게 말했다.

“그거, 참 오래도 걸리는구먼.”

“표결 결과가 나오는 부분에 있어, 공정성에 대한 문제는 없습니까?”

“그럴 리는 없네. 애초에 저기 금융감독원 직원이 파견 나와 있지 않던가.”

사회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극히 사무적인 모습의, 둥그런 철제 안경을 낀 사내.

그는 취합된 자료를 살피며 행여나 오류나 부정이 발생한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린 채 한숨을 길게 내쉬는 한덕술 명예 고문.

“샴페인을 조금 일찍 터트려 본다면 말일세, 자네나 나나 둘 다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구먼.”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리고 자네 큰아들 역시 이번에 공적을 세웠고. 후계까지 든든하니 내 안심이 되는구먼.”

한덕술과 한화기, 두 사람의 기특함이 가득 담긴 시선을 받아내는 한서호.

정작 그의 머릿속에는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과 미국발 금융위기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판이 야기한 탄약 증권이 짊어질 막대한 규모의 파생상품 관련 부채까지.

“네? 하, 하하… 아아, 감사합니다. 저야 뭐 크게 한 것도 없습니다만.”

“허허허. 겸손하기까지 허구먼. 이렇게 자식 농사까지 잘 지었으니 참으로 잘 되었어.”

멋쩍게 웃는 한서호.

아들에 대한 애정 표현 따위는 일절 하지 않던 평소와 달리, 한화기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자랑스럽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훗날 오늘의 경험을 반추할 날이 올 터이니.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식은땀을 흘리는 한서호. 이미 저질러버린 사고를 생각하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그래도 주주총회에서 이기면 된다! 어차피 오명은 한서준이가 다 뒤집어쓸 거, 탄약 증권 파생상품 건도 같이 덮어씌우면 그만이야!’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떨리는 다리.

한서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는 제 아버지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힘 탓이었다.

“시작한다.”

“네? 아, 그… 그렇군요. 드디어!”

사회자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은 금융감독원 직원. 무색무취라는 표현이 걸맞은 그 사내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고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공정한 절차를 위해서, 부득이하게 외부인인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겨울이라도 찾아온 듯, 순식간에 잦아든 웅성거림.

적막함 속을 두드리는 것은 주주총회장에 참석한 각자의 심장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혈류의 움직임뿐이었다.

“지금부터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 내정자 신임 건에 대한 최종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전체 지분의 50.13%로 결정된 본 결과는 바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