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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54화 (53/300)

54화계열 분리와 시한폭탄(1)

상하이의 밤은 언제나 낮처럼 밝았다.

반딧불이처럼 어두운 밤에도 좀처럼 꺼지지 않는 마천루의 불빛들.

그중 유독 몽환적인 불빛을 뿜어대는 옌룽의 집무실.

금속제 라이터를 딸깍거리는 소리에 이어 독한 회색빛 안개를 내뿜은 그가 입을 열었다.

“금융위기 뒷수습에 탄약그룹 건까지. 이거 점입가경이 따로 없군.”

무려 50억 위안이라는 거대 자본이 투자된, 탄약그룹 경영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

책상 위, 오로지 숫자로 쓰인 전황 지도에는 처절한 패배의 흔적이 담겨있었다.

“전술에 이어 전략까지, 둘 다 패배한 건가….”

전술.

금융위기로 인해 탄약 증권에 투자한 주식의 평가액 자체도 크게 떨어졌다.

괄호 안에 들어간 -15% 이상의 손실. 그러나 옌룽의 입에 새로운 담배 한 개비가 물린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후우… 단기 수익률 따위보다 전략에서 진 것이 더 문제로군.”

전략.

탄약그룹 후계 구도에 개입해 이루고자 했던 것.

옌룽의 눈이 자물쇠가 걸린 철제 서랍 쪽을 향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서는 안 될, 기밀 사항이 들어가 있는.

철컥, 소리와 함께 삐걱거리며 열린 서랍. 안쪽 구석, 옌룽이 집어 든 서류 맨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핵심 방산 기술이전

-해외 자원 개발권 염가 매각

이제는 쉬이 이루기 어려워진 목표.

신경질적으로 회색빛 연기를 허공에 뿜어대는 그의 이마에 굵은 핏줄 하나가 올라왔다.

“더는 주군께 누를 끼칠 수 없다. 절대로.”

안경을 벗어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빈 옌룽. 자리에 앉은 그는 한참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벌써 세 시간째, 오로지 업무에만 몰입해 있는 상황.

오로지 째깍거리는 시곗바늘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알리던 그 순간, 마침내 모든 검토를 마친 그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이 방법이라면 들어가는 비용은 조금 과할지언정, 전략적 목표만큼은 가져갈 수 있겠군. 그럼 이제 한덕술에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전화기를 집어 든 옌룽.

갑작스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항상 익숙하던 버튼으로 향하던 그의 손가락이 마지막 숫자를 남겨두고 잠시 멈추었다.

“아니지, 아니지. 그 노인은 더는 이용 가치가 없다. 이제 중간에 굳이 거간꾼을 둘 필요는 없을 터.”

폐기처분.

문중회가 가지고 있던 영향력과 함께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이 없어진 늙은이의 최후였다.

곧이어, 한덕술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옌룽의 귓가에 새로운 장기 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화기… 입니다. 송구합니다.”

싸움에서 진 들개.

가라앉고 처진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피범벅이 된 살갗 곳곳에 발톱 자국이 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당장 숨이 끊어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에게 옌룽이 말했다.

“긴히 할 말이 있소. 이 시각 부로 쓸모없어진 거간꾼 노인을 배제할 것이니, 먼저 주위를 물리시오.”

“……!”

빈사 상태나 다름없던 개.

한화기는 영민했다. 옌룽이 던진 말 한마디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대번에 파악할 정도로.

바닥으로 떨어진, 그리고 바닥 아래 끝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를 나락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에게 내민 손.

주인에게는 꼬리를 흔들고, 사냥감에는 날 세운 이빨로 달려들 마음가짐을 갖춘 한화기. 그의 귓가에 새로운 희망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계열 분리부터 시작할 것.”

“승기를 잡은 저쪽에서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저 치들도 전쟁을 치르느라 힘이 빠졌을 터. 중국 자본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협박한다면, 작금의 금융위기 상황에서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소.”

깊어져 가는 상하이의 밤.

양쯔강 하류에서 시작된 작은 물결이, 다시 황해를 지나 동쪽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후우… 일단 기본 뼈대는 잡힌 모양이로군.”

재떨이 위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 몽롱한 연기를 내뿜으며 옌룽은 마지막 연초를 비벼 껐다.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어간 시간. 제자리를 찾아간 전화기를 바라보며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단 한화기는 이렇게 가면 되겠고, 남은 것은….”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환한 모니터 화면 속에 보이는 사진 한 장.

성가심을 너머 실체적인 위험으로 성큼 다가온 한 남자의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한서준.”

연치에 걸맞지 않게, 불가사의할 정도로 비범한 행보를 보인 탄약그룹의 신임 회장.

자신감이 넘치는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는 옌룽.

모든 생각을 정리한 그가 의자 목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극도로 위험한 놈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터.”

* * * *

줄을 잘못 선 대가.

계파 투쟁에 실패한 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스스로 나가거나, 내쳐지거나.

그렇기에 사실상 직무 정지 상태나 다름없는 유지원 감찰팀장. 강제로 내쳐지기 직전의 그는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일개 평사원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들릴 정도로.

“유 팀장님 말이야. 이제 완전히 끝난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백 퍼센트 나가리라니까. 한화기 그 양반이 쿠데타 일으키려다 처참하게 망했잖아. 이제 유지원 저 양반도 끝이야, 끝.”

“딸내미 유학 보냈다고 했나? 거, 지킬 것도 많은 양반이 걸릴 것도 많으니 원…. 집안이 아주 폭삭 망하게 생겼네.”

“팔자여, 팔자. 줄타기로 성공한 놈은 줄타기로 망하는 법이라니까?”

자신이 듣고 있다는 것을 티 낼 수도 없기에, 조용히 자리에 앉은 채로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유지원 감찰팀장.

점점 멀어져가는 부하 직원들의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개털 다 됐구먼.”

한화기의 충성스러운 개로 꼬리를 흔들며 살아온 인생.

몰락한 주인과 도매금으로 엮인 개의 말로는 오로지 파멸뿐이었다.

“한서준이가 각 잡고 탈탈 털면 나도 어지간한 건 걸려들어 가겠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지원 감찰팀장.

별다른 것도 없이 휑한 책상 가장자리를 짚은 그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있었다.

“배임에 직무 유기에… 이거 교도소 뺑뺑이 대여섯 바퀴는 각오해야 하겠네. 그나마 박한이 사장 케이스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새어 나오는 자조 섞인 웃음.

한 번 떨구어진 고개는 좀처럼 다시 바로 서지 못했다.

이제 유지원 감찰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불가능한 기적을 바라며 기도하듯 눈을 질끈 감는 것 외에는.

-삘릴리리리리! 삘릴리리리리!

그런 그의 소망이 어딘가에 닿기라도 할 걸까?

한낱 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책상 구석에 놓여 있던 유선 전화에 들어온 빨간 불.

앞으로도 평생 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벨 소리는 다급하게 유지원 감찰팀장을 찾고 있었다.

“재무… 본부장님? 어째서 제게 전화를…?”

“지금 바로 집무실로 오도록.”

늘 그렇듯 두서없는 짧은 명령조.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한화기의 말에 유지원 감찰팀장의 모든 고뇌는 단번에 사라졌다.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다. 사안이 급하니 곧바로 올라오도록.”

* * * *

탄약그룹 본사 45층. 한화기의 집무실.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들은 유지원 감찰팀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가능합니까? 아니, 가능하기야 할 것도 같지만서도… 이크!”

마치 포식자를 본 자라처럼 움츠러드는 그의 머리통.

불행인지 다행인지, 불필요하게 토를 단 것에 한화기가 역정을 내는 일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노려보기만 할 뿐.

“확실하게 말해라. 기술적으로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되… 되기는 합지요. 성공만 한다면야 어찌어찌 묻고 갈 법도 합니다. 성공만 할 수 있다면.”

탄약그룹 계열 분리 계획.

<상하이 캐피탈>의 조력을 받아 재차 난을 일으키겠다는 허장성세. 그것으로 금융 계열사를 분봉 받겠다는 계획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뒤에 붙은 문제의 단서 조항.

“핵심 방산 기술이전, 해외 자원 개발권 염가 매각. 이게 문제 아닙니까?”

“그렇다. 구체적인 방법은?”

“<상하이 캐피탈> 쪽에서 요구한 것을 맞추려면… 일단 그 두 개의 권한만 따로 떼어내야 합니다.”

권리관계의 복잡성을 이용해, 분봉 받은 금융 계열사 아래로 방산 기술 특허권과 해외 자원 개발권을 묶어버리려는 계획.

유지원 감찰팀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한화기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음을 던졌다.

“한서준이가 모르게 처리할 수 있나?”

“취임 초기의 어수선함을 이용한다면야 가능할 겁니다. 다만, 오랫동안 감추지는 못합니다. 길어야 2주 정도?”

“속전속결로 처리해야겠군. 오늘부터 당장 기본 틀을 마련해오도록.”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유지원 감찰팀장.

찝찝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뒤가 켕기기까지 한 일이었다.

이제껏 한화기에게 붙어 이런저런 감사를 무마시킨 기존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

‘쓰흡… 이거 진짜 해도 될라나 모르겠네.’

그러나… 그의 손에 들어온 마지막 칩 한 개.

그는 결국 다시 룰렛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밤을 꼬박 새우고 온 도박사처럼.

-똑똑똑!

“아, 아버지.”

때마침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에 들어온 한서호.

겉으로는 밝은 듯한 얼굴. 그러나 유지원 감찰팀장의 눈에는 무언가 수심이 짙은 듯한 그의 모습이 은연중에 비쳐 보였다.

마치 제 아비에게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일단 문중회 쪽은 잘 구워삶았습니다. 안심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둘 다 말인가?”

“예. 한형민 문중회장이야 그냥 동네 바보고, 한덕술 그 영감님도 지금 정신이 없어서 신경을 못 쓰는 상황입니다.”

“수고했다. 계속 유의하도록.”

곧장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한서호. 여전히 떨리는 그의 두 손은 보는 사람이 조금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지원 감찰팀장이 질문을 던졌다.

“서호 도련님께서… 상심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제 나름대로 추스르는 중이다. 네놈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아, 그, 그렇지요.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라…. 그런데 아까 문중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제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황급히 대화 주제를 옮기는 유지원 감찰팀장.

문중회라는 말이 우스웠던 걸까?

가당치도 않은 것처럼, 한화기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문중회 놈들과는 같이 가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같은 배를 탔던 것 아니었습니까?”

“아아, 그랬지. 어제까지는.”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를 버리듯 손쉽게 손절의 의사를 밝히는 한화기.

다소 여유가 돌아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다리를 꼰 채로 등을 기대고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상하이의 선장 놈이 거간꾼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군. 그 노욕으로 가득 찬 늙은이는… 조만간 자멸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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