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55화 (54/300)

55화계열 분리와 시한폭탄(2)

-한서준 탄약그룹 신임 회장.

빳빳한 흰 고급지 위에 금박으로 수놓은 글씨.

새로 나온 명함을 본 나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결국 되찾은 자리. 어리석은 허수아비가 아닌, 실권을 손에 쥔 진짜 회장이기에.

“오래간만이네. 이 명함도.”

그렇기에 마치 처음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즐거운 출근길.

어느덧 가을이 찾아온 모양인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은 노란색,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나. 때마침 틀어져 있는 라디오에서는 짤막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FM 91.9 메가헤르츠 여러분의 교통방송입니다. 탄약그룹 문중회의 한덕술 명예 고문이 오늘 오전 검찰 조사에 출석했습니다.

차량 룸미러에 비친 운전기사의 당황한 듯한 눈빛.

그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라디오 조작 버튼에 손가락을 가까이 대었다.

“상관없습니다. 끄지 말고 계속 틀어놓으세요.”

“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한덕술 명예 고문에 관한 소식.

내 여력이 닿는 대로 조치한, 탄약그룹의 첫 번째 정리 대상. 그가 꿈꾸던 과욕은, 이제 검찰청 내부 조사 문건의 활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그룹 계열사 지분을 불법적으로 취득한 한덕술 명예 고문은 이를 통해 부당 이익을 챙기려 했다는 소식인데요.

-밝혀진 바에 따르면, 외국계 자금과의 연관성도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신임 회장 선출에 이어 금융 분야 계열 분리 이슈로 복잡한 탄약그룹. 이번 한덕술 명예 고문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덜컹, 과속 방지턱을 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들어간 터널 안.

눈에 보이던 바깥의 가을 풍경은 어느새 어두운 배경에 비친 내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득 떠오른 오늘 새벽녘에 있었던 일.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저택 서재에서, 무심한 표정의 할머니는 내게 문서 하나를 툭 내던졌다.

‘한덕술 그놈은 내 선에서 먼저 조치했다. 문중회라는 연못에 돌 하나가 떨어졌으니, 당분간 네게 적대시할 수는 없을 터.’

YSS정밀, 영일금속, BT화학.

한덕술 명예 고문의 원대한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선언이었다.

‘네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치웠으니, 그대로 가고자 하는 길을 걸으면 된다. 다만….’

난감한 표정으로 끝내 말끝을 흐리던 할머니.

나는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직감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으나, 내심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시죠.’

‘네 녀석 숙부 문제다. 계열 분리에 관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기존에 논했던 그대로 가야 할 성싶구나.’

주주총회장에서. 아니, 그 이전 문중회에서 쿠데타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른 숙부.

원칙대로라면, 그리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라면, 계열 분리는커녕 잔혹하리만큼 냉정한 숙청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내게 이리 말하더구나. 만약 계열 분리가 없던 일이 된다면, 중국계 자금을 끌어들여 탄약그룹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중국계… 자금 말입니까?’

‘정확히 어딘지는 서준이 네 녀석도 잘 알 게다.’

책상 위, 검찰에 입건된 한덕술 문중회 명예 고문에 대한 수사 자료가 담긴 문서.

할머니의 눈길이 닿은 그곳에는 <상하이 캐피탈>이라는 사모펀드의 회사명이 적혀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할머니. 잠시나마 서태후 본연의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지금 탄약그룹에 남은 힘은 없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고 있을 터.’

‘불필요한 싸움은 피해야 함은 알고 있습니다. 후계 분쟁으로 소모된 자원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도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 대답을 던진 나.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던 걸까? 할머니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이해가 되었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

‘다른 생각이 있나 보군.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게냐?’

대답 없이 부처님처럼 잔잔한 미소만을 입가에 띄운 나.

그리고 시계추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서재를 가득 채울 때쯤,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의 모습.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할지언정, 이제는 온전히 나를 믿고 맡기겠다는 표시였다.

‘이번에 바로 일을 벌일 만큼 서준이 네가 어리석지는 않다는 것은 내 알고 있다.’

‘그저 지금이 때가 아니라는 것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후우… 서준이 네 뜻대로 하거라. 그룹의 존속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선택과 책임은 회장이 하는 것이니.’

-덜컹!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빠져나온 터널 출구.

차창 너머로 쏟아지는 빛은 오늘 새벽녘 동이 틀 때, 서재 창문 너머로 비치는 아침 해를 떠오르게 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태양을.

“회장님, 10분 후 본사 도착 예정입니다.”

유세나 과장. 아니, 이제는 회장 직속 비서실의 유세나 보좌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오늘의 일정을 재차 확인하는 그녀. 몇 가지 업무상 필요한 이야기를 나눈 후, 유세나 보좌관이 내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조금 결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말하세요.”

“그룹 재편과 관련된 부분입니다만, 아시다시피 한덕술 명예 고문 같은 경우에는 퇴출이 되지 않았습니까?”

아까 라디오에서 나온 뉴스가 어지간히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게 대답을 바라는 유세나 보좌관.

“그렇지요. 이제 그 양반은 밑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할 겁니다. 자업자득이겠네요.”

“그렇다면… 혹시 한화기 재무 본부장에 대한 개입은 없으실까요?”

계열 분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그녀. 의외로 강경한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장 무리를 하더라도 후환을 남기지 않는 편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만.”

“아버님께서 유세나 보좌관에게 아직 말씀을 안 해주셨나 보네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신의 아버지 유태촌이 탄약 증권 지분을 전부 매각했던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 그녀.

약간의 흔들림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 차량 룸미러에 장난기가 깃든 내 얼굴이 비쳤다.

“저는 지금 째깍거리는 소리만 듣고 있습니다. 조만간 터져 나갈, 탄약 증권이라는 시한폭탄의 다이얼 소리를요.”

맨 꼭대기 층, 그동안 비어 있던 회장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탄약 증권과 관련한 파생상품에 대해 설명한 나.

그제야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세나 보좌관에게 내가 지시를 내렸다.

“자, 그럼 이제 회장으로서 첫 업무를 시작합시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그대로의 회장실. 탁 트인 풍경이 담긴 유리창 아래, 새로운 세상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법무팀장부터 불러올리세요. 혹여 무슨 일이냐고 묻거든 이렇게 답하시면 됩니다.”

회장직을 둘러싼 후계 갈등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숙부를 움직인 <상하이 캐피탈>.

그룹의 계열 분리라는 우회로를 이용해서라도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명백했다.

-핵심 방산 기술이전

-해외 자원 개발권 염가 매각

회귀 전, 마치 하이에나처럼 공중분해 된 탄약그룹의 잔해를 게걸스럽게 뜯어먹던 그들의 모습.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그들보다 한 발짝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

그때, 피로 붉게 물든 입가에 묻은 고기 조각이 무엇인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에.

“탄약 중공업 박한이 사장, 탄약 건설 나덕술 사장. 횡령 및 산업스파이 혐의로 고소 조치 들어갈 것입니다.”

* * * *

-탁!

서울중앙지검 6층 조사실.

거칠게 서류철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경제범죄수사과의 베테랑 조사관은 마치 윽박지르듯이 피의자 심문을 계속해나갔다.

“거, 박한이 씨! 슬슬 불어 재끼자고! 혐의 명백한 거 계속 시간 끌다가는, 괜히 형량만 느는 거 알아요, 몰라요?”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배설하고 자빠져 있는 것인감? 이 양반아! 자네는 소화기관이 거꾸로 달리기라도 한 것이여?”

든든한 돼지국밥이 연상될 정도의 거칠고 육중한 외모를 한 조사관이었으나, 입담 하나로 기가 눌리지 않은 박한이 사장.

수갑 찬 손으로도 삿대질할 수 있음을 증명한 그는 큰 소리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죄를 짓긴 뭘 지어!”

“어허! 그래도 이 양반이!”

“전국 8도 싸그리 뒤져보라니께? 나만치 어딘가에 충성하는 사람은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 빼고는 없어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약을 올리는 박한이 사장.

그러나 속마음만큼은 영 딴판인 모양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쪽 다리를 떨고 있는 그는, 자신을 이곳에 보낸 신임 회장에 대해 생각했다.

‘엠병… 한서준이 이 핏덩이 놈도 확실히 정상이 아니여. 취임 첫날부터 바로 칼춤 추는 거 보니께, 확실히 한씨 집안 놈이 맞긴 한가벼.’

이라크 해수 담수화 관련 횡령 건은 그렇다 쳤다.

그런데 어떻게 <상하이 캐피탈>에 자료를 넘긴 것까지 아는 것인지, 졸지에 산업스파이 혐의까지 덮어쓴 상황.

외나무다리에 올라간 박한이 사장에게 여기서 더 물러날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강물에 악어 떼가 없겠거니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하… 박한이 이 양반 진짜. 뭘 믿고 이러는 건지. 진짜 미치겠네.”

“아, 나는 배고파 미치겠응께, 조사관 양반은 얼른 밥이나 시키소잉. 얼큰한 육개장 한사바리 하면 딱이겠구먼.”

조사실 한쪽에 마련된 낡은 브라운관 TV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는, 허겁지겁 육개장을 먹는 박한이 사장.

장시간의 조사에 대비해 일부러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손금이 닳도록 빌어봐야 징역 열 바퀴는 깔고 가는 것이여. 지금은… 한화기 그 인간 편에 서서 뻗대는 게 남바 완일 것이고.’

지지직거리는 화면 소리를 들으며 단숨에 남은 국물을 들이켠 박한이 사장.

소매로 입가를 훔친 그가 애써 태연한 척 연기를 이어나갔다.

“크허, 이 집 잘허네잉.”

“다 쳐 드셨으면 이제 조사 다시 시작들 합시다. 회장도 바뀐 판에 무슨 똥배짱인 건지… 아, 마침 나오네.”

“거, 도대체 누가 나온다고. 옘병….”

생방송 딱지가 붙은 뉴스 채널.

무슨 일인지 경제 쪽 기자란 기자는 잔뜩 불러온 모양이었다.

화면 중앙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

-이 자리에서 천명합니다. 저희 탄약그룹 내부에 켜켜이 쌓인 구태들! 이번 기회에 전부 청소해버릴 것을!

‘탄약그룹 신임 회장 한서준’이라는 설명이 밑에 달린 그는, 만년필을 쥔 오른손을 악단의 지휘자처럼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무언가를 주창하고 있었다.

앞으로 변화해나갈 탄약그룹. 그 개혁의 불씨를 어떻게 지펴나갈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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