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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56화 (55/300)

56화계열 분리와 시한폭탄(3)

앞에 보이는 것을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안개가 짙게 낀 양평 낚시터.

넓은 호수 위에 올라간, 작은 집처럼 생긴 수상 좌대는 물살에 맞춰 기우뚱 소리를 내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어잇차!”

낚싯바늘에 떡밥을 매달고는 앞을 향해 힘껏 낚싯대를 내던진 김원철 아저씨.

이제는 회장 직속 비서실장이 된 아저씨는, 둥그런 잔물결이 일렁이는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이번 일 말이지. 요 낚시처럼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지 싶걸랑.”

“바로 진행은 어렵습니까? 산업스파이 혐의로 <상하이 캐피탈>의 힘을 빼고, <코코아 뱅크>가 쥐고 있는 파생상품을 터트리는 식으로요.”

“바로 터트리면 또 그룹 내분처럼 보일걸? 그럼 간신히 잠잠해진 문중회도 또 날뛸 테고.”

<상하이 캐피탈>의 힘을 이용해 금융 쪽 계열사를 분할할 계획인 숙부.

이를 위해, 핵심 방산 기술이전과 해외 자원 개발권 염가 매각이라는 대가가 오갈 것이 명백한 상황.

넘겨줄 수 없는, 넘겨줘서는 안 되는 그 대가.

그렇기에, 내가 회장직에 올라서 가장 먼저 취한 것이 박한이 사장과 나덕술 사장에 대한 검찰 고발이었다.

“산업스파이 혐의 입증도 쉽지 않다 들었습니다만.”

“그게, 써먹을 수 있을 증거가 모질라. 꼭 이혼한 전 마누라에 대한 애정과도 같다고 볼 수 있지.”

“그건 또 무슨 가정법원 판결문 비슷한 말입니까?”

그물망 소재의 낚시조끼 앞주머니에서 풍선껌 하나를 꺼내 질겅거리는, 이제는 회장 직속 비서실장이 된 김원철 아저씨.

최근 며칠간, 재무 본부와 각 계열사를 바삐 오가며 무언가 정보를 캐내라는 지시를 내렸건만, 조금 문제가 있던 모양이었다.

“있었는데, 인자는 없다는 것이여. 싹 다 지워졌걸랑. 흔적도 없이.”

뒤이어 들려오는 유지원 감찰팀장에 대한 이야기.

갑자기 전선을 가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숙부는 그에게 최대한 많은 증거를 없애도록 지시했다는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예 빼도 박도 못할 정도입니까?”

“정확히는 흔적은 있지. 서류상에 두 사람은 무지하게 싸우다 이혼했습니다, 뭐, 그런 게 적혀는 있으니까.”

흔들리는 낚싯대.

수면 위에 조금 거친 물살이 파동이 되어 올라왔다.

지금은 당길 수 없는 상황.

큼직한 물고기가 떡밥을 단단히 물었지만,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런데… 그런 거까지 까발리면 밑에 아가들이 피를 보잖아?”

“아가들이라면…?”

“이번에 회장님한테 딸린 나이 많은 아가들. 성원식이라든지 구석수·정철식 콤비라든지 하는 양반들 생각을 안 할 수 없으니까.”

꽉 쥔 낚싯대에 떨림이 느껴졌다.

차분한 기다림. 팽팽한 줄다리기.

반투명 나일론 줄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힘이 들어간 릴.

조금씩 조금씩, 표시된 눈금이 줄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안개 너머로 보일 때쯤.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가, 하늘 위를 날아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어따, 고놈 크기도 해라.”

바닥 위, 거칠게 날뛰는 이름 모를 물고기.

호수 안에서는 포식자 노릇이라도 했던 것일까?

톱니처럼 맞물린 날 선 이빨은 당장이라도 내 손가락을 묻어 뜯으려는 양, 뻐끔거리는 입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낚시는 타이밍이여. 아마 이번 일도 그럴 것이고.”

“그런 것 같네요.”

때마침 흔들거리기 시작한 내 낚싯대. 근처 물속에서 함께 오가던 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초장부터 시작된, 거센 몸짓.

그 모습이 마치 숙부와 <상하이 캐피탈>이 보이는 행보처럼 보였기에, 나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찌가 위아래로 흔들릴 때 곧바로 과한 힘을 주면.”

카본 파이프를 힘껏 쥔 내 손.

일부러 거칠게, 그리고 빠르게 줄을 팽팽하게 당겨 보았다.

그러나 곧바로 잦아드는 힘 싸움.

물 위에는, 잠잠하게 놓인 찌만이 언제 다툼이 있었냐는 듯이 평온한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바로 물었던 떡밥을 뱉어내고 도망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흐흐흐… 거봐. 모든 것이 다 낚시로 통한다니까? 내가 괜히 낚시 다니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얼굴에 웃음만을 걸어 놓은 채 대답 없이 미끼통을 여닫았다.

줄을 감아 낚싯바늘에 큼직한 붕어 떡밥 하나를 걸어둔 나.

손가락으로 만진 굽은 바늘의 끝은, 중간의 곡선 부위와는 달리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한번 제대로 물게 된다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일단은… 그러면 물고기가 구미가 당길 만한 미끼부터 낚싯바늘에 거는 게 먼저겠네요.”

“얼레? 얼굴 보니 벌써 생각난 게 있나 보네. 뭐여. 언능 말 좀 해 봐봐.”

손가락으로 내 팔뚝을 콕콕 찌르는 김원철 아저씨. 얼굴에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하다.

“음… 글쎄요.”

말을 해줄지 말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고개를 돌리니 바로 뒤에는 양택수 부회장이 부처님 같은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허허허, 이거 많이들 낚으셨나 모르겠구먼. 어찌, 회장님께서는 낚시도 처음이신데 지루하진 않으신지요?”

“사석에서는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만.”

내 말에 손사래를 치는 양택수 부회장.

자기 딴에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말인 모양이었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허허허, 그러면 늙은이가 노망났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룹의 가장 큰 어른이신데 마땅히 말을 높여야지요.”

너털웃음을 짓는 양택수 부회장.

손자뻘 되는 이에게 깍듯하게 대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따라야 하는 위계에 충실해지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여기 위계질서 따위는 어딘가에 맡겨 놓고 온 내 또 다른 측근 한 사람.

“하, 양 부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 회장한테 계속 반말하는 저는 뭐가 됩니까?”

“탄약그룹의 패륜아 정도 되겠지 이 사람아. 여기선 자네가 막내이니 가서 라면이나 좀 끓여 오게.”

할 말이 없어진 김원철 아저씨.

단번에 탄약그룹 넘버 원 패륜아 타이틀을 거머쥔 아저씨는, 오리 주둥이처럼 삐쭉 튀어나온 입으로 툴툴거리며 라면을 끓이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곧바로 내 옆 빈 좌대에 앉은 양택수 부회장.

옅어진 안개 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분리될 금융 계열사들. 조만간 되찾으실 생각이 있으시리라 사료됩니다만.”

“의외네요. 양 부회장님도 한율산 전 간사님처럼 그룹의 안정을 우선으로 두시리라 생각했는데.”

“왕좌에 앉은 이가 일개 범재라면 마땅히 그리하는 것이 맞겠지만, 회장님은 그 정도 필부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과찬이십니다. 그저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하나둘씩 그려나갈 뿐이지요.”

볼에 스치듯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짙었던 안개는 언제 걷힌 모양인지, 눈앞에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나와 함께 풍경을 바라보는 양택수 부회장. 이전 세상을 살아온 날이,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날보다 더 많은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마땅한 계기가 필요하시다면, 과거의 경험에서 지혜를 찾는 것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선대 회장… 아니, 아버지의 행적 말입니까?”

“영민하신 분이시니 금세 머릿속에 초안이 그려지실 겝니다.”

풀벌레 우는 소리를 배경 삼아 싱긋 웃음 짓는 양택수 부회장.

마치 어린 손자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해주려는 노인처럼, 그는 가만히 내 곁에 앉아 이런저런 조언을 건넸다.

“양 부회장님! 계란 반숙입니까, 완숙입니까! 얼렁 말해 주세요!”

그새 라면을 거의 다 끓인 모양이었다. 호숫가가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김원철 아저씨.

“허허허… 김원철이 저 친구도 참 주책일세. 안 그렇습니까, 회장님?”

내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라도 주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양택수 부회장.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잠시 불러 세웠다.

“조만간 이라크의 모래바람을 맞으러 가려 합니다. 아버지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셨던 것처럼요.”

“회장님…?”

“그땐 양 부회장님도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가서… 확인해주시죠.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이 그림이 맞는 것인지를.”

* * * *

충청남도 서산.

어딘가 호숫가라도 갔다 온 모양인지, 낚시꾼 차림의 김원철을 마주한 한율산 전 간사.

거센 바닷바람 앞에 선 늙은 소나무처럼, 어느새 폭넓은 나이테가 한 개 더 그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사이 한층 더 늙어 버린 듯한 모습.

“내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일세. 늙으면 현업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 이제사 몸에 와닿는구먼.”

굳은 표정의 한율산 전 간사.

다소 쌀쌀한 날씨임에도 술로 몸이 데워지기라도 한 것인지, 그는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연신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한화기 그놈이 한덕술이와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내 알아챘어야 했거늘….”

“하이고, 어르신. 이미 다 끝난 일이잖습니까. 이거 막잔하고 가시죠. 더 드셨다간 나까지 여사님한테 혼나게 생겼어.”

“되었다! 여편네 바가지야 하루 이틀 긁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토하고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는 한율산 전 간사.

얄궂을 정도로 환히 빛나는 북극성. 그는 이제껏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실감이 난 모양이었다.

마치 북극성처럼, 연륜과 경험으로 멋모르는 풋내기 후계자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턱없는 자만심.

그러나 진짜 북극성은 오히려 그토록 낮게 보았던 한서준, 그 어린 핏덩이였으니까.

“결국, 내 손으로 쪼갠 그룹이 되었구먼.”

“에이, 영감님. 그건 너무 자존감 과잉이다. 어차피 한화기한테 계열 분리 안 해 줬으면, 벌써 사달이 났을 겁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무어라 역정을 내려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는 한율산 전 간사.

마지막 남은 술을 모두 목뒤로 털어 넘긴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임 회장께서는 다시 금융 쪽 계열사를 되찾으실 생각이 있던가?”

“있기야 합니다만.”

“물론 당장 몇 년은 힘들겠지…. 허나, 아직 연치가 젊으시니, 그룹을 반석 위에 올려 두고 차차 대업을 진행하면 이룰 수 있을 터.”

자기 손으로 그룹을 토막 내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노인.

한숨을 내쉰 그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살아서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먼.”

“아이, 참. 영감님도. 원래 이런 말은 안 꺼내려 했는데…. 아마 올해 안에 결판이 나긴 할 겁니다.”

술에 취한 한율산 전 간사를 부축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김원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춘 노인과 대조될 정도로, 장난기 넘치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깃들었다.

“되찾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회장 손에 들어올 거니까요. 일단… 다음 주에 뉴스 나오면 그것부터 챙겨 보시죠. 제법 재미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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