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57화 (56/300)

57화바그다드 선언(1)

“뭐라고? 지금… 그게 사실이야?”

여의도의 K 호텔은 전국 경제인 연맹 회관 근처에 있었다.

전경련. 한국의 대기업 총수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맞교환하는 공간.

그리고 비록 재벌가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그 모임의 참석자로 초청받지 못한 이들 또한 있는 법.

오늘만큼은 외부 손님을 받지 않는 여의도 K 호텔 지하 바(Bar).

그곳에서는 그 초대받지 못한, 서자들의 목소리가 음악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탄약그룹 한서준이가… 회장이 되었다고? 그 아무 생각 없고 머저리 같던 첩 자식이?”

“그렇지. 우리랑 똑같았던 첩 자식 한서준이. 뭐, 이제 구름 위에 사시는 분이 되어버렸지만.”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게 말이 되어버렸잖냐, 이제는. 흐흐흐.”

동그란 눈이 벌어지도록 크게 뜬, 검은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

아직 얼굴에 앳된 부분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스물아홉의 그녀. 점점 굳어져 가는 표정은 거친 표면 위 물감을 덧칠한 추상화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믿을 수 없어. 그딴 놈이 회장이라니….”

“근데 서윤지 넌 어떻게 된 게 매번 소식이 늦나 몰라? 뭐, 이번엔 그 결혼 준비 때문에 정신없었다 치지만. 거, 세상사에 관심 좀 가지셔.”

술잔에 비친, 익살스러운 광대 같은 얼굴의 동갑내기 남성.

T그룹의 막내아들, 김범호는 낄낄거리는 웃음을 띤 채로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미 후계 구도에서 배제된 채 신선과도 같은 삶을 사는 그에게는, 지금 일이 그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알고 있는 거나 전부 말해! 어서!”

“어따, 왜 또 불쌍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러실까. 무섭게시리.”

그러나 누군가에게 별것 아니었던 것은, 다른 이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간, 철화그룹의 막내딸 서윤지.

똑같은 방산 재벌그룹 집안.

똑같은 또래 나이대.

그리고… 똑같은 서출.

그러나 이제는 끝도 없이 벌어진, 두 사람의 신분 격차.

무언가 분노라는 감정과 흡사한, 그러나 질시라는 느낌에 더 가까운 기운이 얼굴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그녀는 결코 감추지 못했다.

“술 퍼먹고 개소리하는 건 그쯤하고. 빨리 말하라고! 도대체 그 머저리 같던 한서준이가 뭘 어떻게 한 건데.”

“아야야. 왜 가만히 있는 사람 멱살을 다 잡고 그래… 일단 이건 놓고 말하쇼. 놓고.”

숨구멍이 트이자, 그간 자신이 들었던 내용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하는 김범호.

그간 탄약그룹 내에 있었던 후계자 투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그는 위스키 한 잔을 목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대충 그렇게 된 거라 카더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또 있어.”

“중요한… 거? 그게 뭔데?”

“어엉. 서윤지 너는 때려죽여도 그 성격 고쳐야지, 안 그러면 결혼하고도 임재호 부회장한테 금방 소박맞는다는 거,”

“하아, 그 촐싹거리는 입 좀 닫으면 안 되겠니? 생각 좀 하게 가만히 있어 봐!”

재계 서열 1위 SA 그룹의 후계자인 임재호 부회장.

서윤지의 결혼 상대인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녀의 눈에서는 광선 비슷한 무언가가 튀어나올 기세였다.

무려 열다섯 살 차이의 결혼.

그것도 한번 이혼해 자식까지 딸린 남자에게 후처로 들어가는 상황.

서출, 그나마도 집안 어른들의 허락하에 간신히 호적에 들어간 그녀에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조건의 결혼이었다.

“아니, 뭐. 자기가 그 결혼으로 나중에 언니들 밟아 죽인다고 해놓고는… 괜히 불쌍한 나한테만 성질이여.”

“그 미친년들은 언니라는 말도 아깝지. 아무튼… 한서준이가 회장이라.”

화려한 네일 아트가 칠해진 손톱으로 유리잔에 새겨진 홈을 긁어내듯 만지는 서윤지.

분명 어렸을 때부터 봐온 한서준이었다. 능력도 배짱도 욕심도 없는 흔한 재벌가 사생아였던 그.

제 아버지 장례식에서조차 후계자로서의 모습 따위는 보이지 못했기에, 더욱 커져만 가는 의문.

한참을 미간을 찌푸리던 서윤지는 그녀 나름대로의 타당한 결론을 내렸다.

“회장까지 올라온 과정들, 그거 분명 우연이 겹친 결과겠지? 본인 능력은 아닐 테니까.”

“어… 아마도? 솔직히 전부 다 계획대로였다면 그게 사람이여? 괴물이지. 막말로 한서준이가 미래에서 뿅! 하고 왔다면 또 몰라.”

“그래. 분명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그렇다면….”

옆자리에 놓인 핸드백을 챙겨 일어나는 서윤지.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것일까?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그녀는 작별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야. 서윤지! 어디 가? 더 안 놀 거냐? 결혼하기 전에 평생 놀 거 다 놀아야지!”

등 뒤에서 멀어져가는 김범호의 목소리. 바깥에 나가는 순간까지 서윤지가 그를 되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품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그녀.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에 회색빛 연기와 함께 날숨을 토해내자, 솟구쳐 올라오던 불쾌한 감정이 조금 잦아든 모양이었다.

“김범호 저 멍청한 새끼는 죽을 때까지 평생 그렇게 놀다가 가면 될 거고.”

아스팔트 위로 흩뿌리듯 담배꽁초를 내던진 서윤지.

손가락 끝에 타다 남은 가루들이 걸렸다가, 이내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입가에 닿았던 무언가는, 제 용도가 다하자 길바닥 위로 그렇게 버려졌다.

“후우….”

그리고 지금,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불빛을 바라보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정략결혼의 주체로서 호적에 오른 서윤지였으나, 그녀 역시 용도를 다하게 된다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을 터.

-지이이이이잉!

재촉하듯 울리는 전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의 서윤지가 애써 연기한 밝은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막내딸다운 발랄한 목소리의 그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메마른 사막의 모래처럼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도저히 혈육에게 대하는 아비의 목소리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 게야! 당장 이리로 오너라. 예비 시댁 식구분들께서 네 얼굴 좀 보자고 하신다.”

“아아, 지금 가고 있어요. 어머, 그러면 지금 임재호 부회장님도 거기 같이 계시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이 정신머리 없는 년… 지금 SA 그룹과의 합작 계약을 코앞에 두었거늘.”

부서질 것만 같은 가면을 간신히 얼굴에 걸고, 웃는 낯을 유지하는 서윤지.

가면 아래 깔린, 피눈물을 삼키며 분노하는 본모습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때쯤이 되어서야, 숨이 턱턱 막히던 전화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네. 곧 갈게요. 그럼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아버지 딸인걸요. 잘 할 거예요. 분명히.”

“쓸데없이 입에 발린 소리는 그쯤 허고, 빨리 튀어오기나 하거라!”

일방적으로 끊긴 통화와 함께 산산이 부서진 그녀가 쓴 가면.

휴대전화를 꽉 쥔 손을 부르르 떨며 핏발 선 눈의 서윤지가 입을 열었다.

“딸 장사나 하는 인간. 재수 없어.”

결혼과 함께 묶인, SA 그룹과의 합작 사업.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전자 기술을 가진 SA 그룹과 국내 방산업체의 양대 산맥인 철화그룹이 만들 새로운 합작법인.

서윤지는 가방 안주머니에 놓인 자신의 합작법인 명함을 꺼내어 가로등 불빛에 비추었다.

-SA-철화 테크원. 대표이사 서윤지.

“물론 나도… 그 천박한 장사 놀음에 같이 어울리기는 하지만.”

피 맛이 느껴질 만큼, 세게 이를 앙다문 서윤지.

비록 지금은 명목뿐인 대표이사일지언정,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불타오르는 야망이 자리해 있었다.

첩 자식. 자식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서출로 살아오면서 견뎌내야 했던 그 모멸감.

“전부 내가 가질 거야. 철화그룹의 지배권도, 그리고… 껍데기뿐인 친정 식구들에 대한 처분권까지.”

철화그룹, 언젠가 자신의 친정집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얼떨결에 탄약그룹의 회장 자리에 오른 그 머저리가, 어쩌면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첫 번째 제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서준, 한서준… 그래. 어쩌면 생각보다 시간이 적게 걸릴 수도 있겠어.”

* * * *

회장이 되고 난 후, 바뀐 부분들 가운데 실제 피부에 와닿는 것은 전용기의 존재였다.

이라크로 향하는 비행기 안의 좌석 배치는 그룹 내 의전 서열과 조금 동떨어져 있었다.

맨 앞쪽 창가 자리에 앉은 내 옆에는 양택수 부회장도, 김원철 비서실장도 아닌, 탄약 조선 해양의 성원식 사장이 조금 불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창공 위로 올라가던 비행기가 수평을 찾아 비행하자,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회장님? 실례지만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왜 좌석 배치가 이렇게 된 거냐고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원식 사장. 생수로 목을 축인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전산오류 같은 건 아닙니다. 비서실 실수도 아니고요. 나눌 이야기가 많기에, 일부러 이렇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는 승무원을 불러 좌석 뒤쪽으로 간이 칸막이를 치도록 지시했다.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 밀담을 나누기에 제격이 된 상황에서, 긴장한 듯한 성원식 사장은 내 입 모양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제 오피스텔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절대 잊을 수 없지요. 제가 회장님을 모시게 된 첫날이니까요.”

줄을 잘못 탔던 그에게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동아줄을 내려주었던 나.

숙부의 충견이었던 그의 마음을 돌이킨 것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계열사 간 합병부터 불필요한 사업부 매각까지. 한꺼번에 도맡을 컨트롤 타워가 필요합니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으로 대표되는, 주먹구구식의 비정상적 운영. 반드시 누군가는 수술칼을 잡아야만 하는 상황.

‘제게 충성심을 보여주십시오. 그 컨트롤 타워의 수장. 충분히 성 사장님이 되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 참담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맨 앞에서 깃발을 들고 총탄을 뒤집어쓰며 달려가는 자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좌석 한 편에 놓인 서류 봉투를 꺼내어 성원식 사장에게 전달했다.

“성원식 사장님의 충성심은 잘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다른 직위에서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회장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서류 봉투.

그 안에 들어 있는 흰 종이 위에는 탄약그룹의 로고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성원식 탄약 조선 해양 사장. 탄약그룹 조직개혁 TF 본부장에 보함.

“회장님. 이건….”

“이라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인사이동부터 발표할 것입니다. 수술칼을 잡아 주시죠.”

수술칼.

성원식 TF 본부장이 맡은 새로운 임무.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의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내가 그를 통해 그리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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