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바그다드 선언(2)
탄약그룹 본사 45층, 한화기의 집무실. 간혹 흰 종이 몇 장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침묵으로 가득 찬 공간 속.
퀭한 눈의 유지원 감찰팀장은 꿀렁거리는 목젖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제 주인의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채 신경이 바싹 오른, 굶주린 맹금류 같은 두 눈.
후계 경쟁에서 탈락한 한화기였으나, 그의 날카로운 발톱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언제라도 다시 먹이를 낚아채 갈 수 있도록.
“이봐, 유지원이.”
“…….”
주인의 부름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유지원 감찰팀장.
멍한 표정을 한 그의 시선은 뒤편 장식장 안에 들어있는 독수리 조각상에 꽂혀 있었다.
‘거, 눈깔이 지하고 참 똑같이도 생겼네. 꼭 무슨 장식품을 둬도 닮은 것만 두고 그런 건지….’
최근 있었던 탄약그룹의 금융 계열사 분리 작업으로 피곤했던 것일까?
그의 머릿속 기상 상황은 시답지 않은 생각의 구름이 잔뜩 끼어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뿌옇던 구름이 걷힌 것은, 한화기의 고함이라는 큼지막한 태풍이 분 후가 되어서였다.
“이봐! 유지원이! 지금 집중 안 하고 뭐 하는 건가!”
“아, 아! 예! 그, 뭐냐. 그, 무슨 일이십니까?”
“금융 계열 분리 작업은 얼마나 진행되었냐고 물었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것인지 원…!”
움찔거리는 모습과 함께 어깨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은 유지원 감찰팀장.
손에 든 결재 서류에 적힌 내용을 허겁지겁 뒤지며, 그가 대답했다.
“예! 그, 일단은 일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상하이 캐피탈>이 요구했던 두 가지 사항에 대한 권리 분리는 거의 마무리했습니다.”
핵심 방산 기술이전과 해외 자원 개발권 염가 매각. <상하이 캐피탈>이 바라는 두 가지 권리.
계열 분리가 성공적으로 완료될 경우, 한화기의 그룹에 귀속될 그 권리를 위해 유지원 감찰팀장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실권을 잃은 몸이기에 직접 발로 뛰어가면서까지.
“어지간한 증거는 다 묻었고, 나머지 부분은 성원식, 구석수와 연결된 터라 그쪽에서도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요. 다만….”
말끝을 흐리는 유지원 감찰팀장. 무언가 켕기는 것이 느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감찰팀에서 일평생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던 그였기에, 그리고 이번 일과 관련된 실무를 도맡은 그였기에,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기시감.
탄약 증권. 분명 그 안에 유지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시한폭탄이 고이 잠을 자고 있다는 확신.
“다만?”
그러나 그 확신은 심기가 불편해진 주인 앞에서 쉬이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심스레 눈치를 보던 유지원 감찰팀장.
결국, 그의 입에서는 기존에 하려던 이야기가 아닌, 전혀 생뚱맞은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 계열 분리와 관련해서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저 <상하이 캐피탈> 놈들이 너무 많은 지분을 가져가는 것이 조금 걸려서 말입니다.”
“하, 고작 그런 걱정이었나. 하긴, 유지원이 자네가 큰 그림을 전부 볼 수는 없을 터.”
작게 코웃음을 치며 유지원 감찰팀장을 위아래로 내려다보는 한화기.
그는 조만간 새로이 만들어질, 가칭 탄약 금융그룹의 예상 지분 관계도를 내밀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도. 얇디얇은 가지 하나하나를 타고 굵은 줄기의 몸통을 지나, 가장 핵심이 되는 뿌리를 향해 한화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순환출자 구조. 계열 분리가 되더라도 새로운 중심은 여전히 탄약 증권이다. 내 지분에 문중회 지분을 합친다면….”
자신감으로 가득 찬. 아니, 어쩌면 그릇된 광기에 사로잡힌 한화기의 눈.
방금 자신이 느꼈던 묘한 기시감 위에 한화기의 모습이 덮어지자, 섬뜩한 무언가가 유지원 감찰팀장의 등골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파멸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폭주하는, 눈을 가린 채 내달리는 경주마처럼.
“분명 <상하이 캐피탈> 놈들의 손에 핵심 경영권이 들어오지는 못할 터. 차후에 정비가 마무리되면, 그때 한서준 그놈의 목을 친다.”
“그… 역시나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지금쯤 내 큰아들놈이 관련된 작업을 마무리했을 터. 슬슬 올 때가 되었거늘.”
마지못해 내뱉은 아부 섞인 동의.
회장 한서준이 이라크에 간 지금, 최대한 빨리 그룹 계열 분리 작업을 진행해 놓으라는 말을 들으며, 유지원 감찰팀장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유독 쌀쌀한 오늘. 날씨와는 상관없이 흥건하게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그에게 묘한 경보음을 내고 있었다.
-똑똑똑!
문가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둔탁한 나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남자의 모습을 본 유지원 감찰팀장은 무너져 내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전,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추상적인 경보음.
불길한 감각에 지나지 않던 그것은, 점점 실체를 갖춘 무언가가 되어 자신에게 다가와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당장 제 주인의 손을 물어뜯고서 저 멀리 달아나라고.
“아버지. 지시하신 대로 검토를 전부 끝냈습니다.”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대뜸 제 아버지에게 다가가 보고를 올리는 한서호.
실룩거리는 웃음이 그려진 가면. 그 아래 잔뜩 굳어 있는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유지원 감찰팀장이 알아차린 것은, 보고서 첫 페이지 하단에 적힌 요약문이었다.
-탄약 증권 내부 자금 상황은 매우 건전한 것으로 파악.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의 PF 총괄로 인해 안정적인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
두꺼운 쇠망치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얼어붙은 유지원 감찰팀장.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의 초기 자본 조달을 위해 마련한 1,050억 원의 거액.
직관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추론으로 바뀌는 그 순간, 그의 꽉 말아 쥔 두 주먹은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분명… 저 자금은 미국 증권가에 파생상품 발행 대가로 만들었던 것인데? 그렇다는 건….’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당장 리스크 검토를 다시 해야 한다고? 당신 큰아들이… 대형 사고를 쳐놓고 어떻게든 묻으려고 연막을 치고 있다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무어라 충언을 하려던 유지원 감찰팀장.
그러나…
“이봐, 유 감찰팀장. 당신 좀 나가 있지 그러나? 사람이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야, 원.”
“서호 도련님…?”
“독대가 필요한 사안이니 좀 나가라고. 이제는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건가?”
직감적으로 눈치를 챈 한서호의, 명백한 축객령.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는 이미 텅 빈 복도 한가운데에 나와 있었다.
나락을 향해 움직이듯, 아래쪽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 초췌한 모습의 스스로에게, 유지원 감찰팀장이 말을 건넸다.
“끝이군. 시작하기도 전에.”
그의 귓가가 먹먹해진 것은 단순히 빠른 엘리베이터 속도만은 아니었다.
이윽고, 정장 재킷 안주머니로 들어간 그의 떨리는 손.
수차례 전화번호 하나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유지원 감찰팀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정철식이. 나야, 나. 유지원. 잘 지내긴… 당연히 잘 못 지내지.”
휴대전화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오는 입사 동기이자 앙숙인 정철식 전무의 부산 사투리.
형식적인 안부 인사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다른 건 아니고. 나도 좀 살고 싶어서. 너 구석수 그 양반 통해서 나 한서준 회장한테 연결 좀 해 주라. 부탁이다.”
* * * *
방산 재벌 탄약그룹.
대표 업종이 업종이니만큼, 그룹 내의 일사불란한 문화는 여러 가지 의미로 악명이 높았다.
오죽했으면, 직장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이런 종류의 글들이 심심할 때마다 종종 올라오곤 했으니 말이다.
-이번 하반기 탄약그룹 공채 합격자인데… 거기 군대식 문화 엄청 심하다는 거 진짜임? 전해 듣기로는 다나까 말투 철저하게 쓴다고는 하던데.
-지금은 훨씬 나아진 거임. 옛날에는 전 직원 출근하자마자 허연색 란닝구 차림으로 뜀박질했다고 함. 무려 ‘서울 본사’에서.
이라크 바그다드의 호텔 스위트룸. 막간의 휴식 도중 심심풀이로 켠 노트북으로 ‘탄약그룹’에 대해 검색하면 나오는 내용이었다.
옆에서 배꼽을 잡고 낄낄거리는 김원철 아저씨의 웃음소리를 잠시 음소거 한 채, 나는 손가락으로 마우스 휠을 돌렸다.
그 순간. 딸깍, 소리와 함께 눈에 들어온 묘한 게시물.
-거기 오너 집안이 좀 화끈해야지. 예전에 프랑크푸르트 연설 기억 안 남? 회장이 해외 출장 중에 빡돌아서 그룹 사장단 소환술 쓴 거.
프랑크푸르트라는 단어가 나오자 갑자기 경박한 웃음을 멈추고 감탄사를 날리는 김원철 아저씨.
이전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히야… 이걸 또 기억하는 사람이 다 있네? 진짜 그야말로 한 20년 전 일인데.”
“이거 혹시 본인이 쓰신 글 아닙니까. 뭔가 필체도 평소 말투랑 비슷한데.”
“에이, 무슨 그런 근거 없는 오해를. 그리고 그때 선대 회장 옆에 딱 붙어 있던 사람이 나였는걸. 뭐, 선대가 어지간히 화끈하긴 했지만.”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당시의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김원철 아저씨.
반쯤 자기 자랑에 반쯤 뻥이 섞여 있었지만, 나는 가만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 전, 양평 낚시터에서 양택수 부회장과 나누었던 대화.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경험에서 지혜를 찾는 것이니까.
“제가 굳이 여기 이라크까지 온 건, 단순히 아버지 흉내를 내고 싶어서만은 아닙니다.”
“흐흐흐… 나도 알고 있걸랑. 원래 그런 파격 행동 이면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는 법이지.”
탁자 과일바구니에 담긴 바나나 하나를 들고 껍질을 벗겨내는 김원철 아저씨.
노란 껍질 안에 든 하얀 과육을 한입 베어 문 아저씨가 내게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선대도 그랬으니까. 그때는 겉으로는 그룹 경영 선진화를 내걸었지만, 속으로는 힘을 가진 개국공신 임원들을 숙청하려고 그랬거든.”
“바로 옆에서 보셨던 만큼, 잘 알고 계시네요.”
“흐흐흐… 그리고 지금, 너한테는 선대의 냄새가 나고 있고. 내 코가 개코여. 비서실장만 지금 몇십 년짼데.”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싱긋 웃기만 하는 나.
김원철 아저씨는 내게 즉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손수 노란색 바나나 껍질을 까, 내게 건네는 아저씨.
“겉껍질은 탄약그룹 구조 개혁, 속에 담긴 과육은? 말 안 해주면 이거 내가 먹는다?”
“기껏 까 놓고 혼자 드시면 쓰겠습니까. 이리 주시죠.”
크게 입을 벌려 하얀 속살을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나.
벌써 시들시들해진 껍질을 탁자 위로 던져놓은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편 채로 입을 열었다.
“<상하이 캐피탈>과 숙부, 양측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막는 것.”
“크흐, 그럴 것 같았다야.”
“방산 기술과 해외 자원 개발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일도, 숙부가 꿈꾸는 금융 계열 분리도 없을 겁니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재검토 선언을 디딤돌 삼아, 고강도의 그룹 구조 개혁을 천명하는 것.
불필요한 수사기관의 개입을 배제해 성원식 사장을 비롯한 내 사람들을 지키고, <상하이 캐피탈>이 노리는 방산 기술과 해외 자원 개발권의 유출을 막아낸다.
분명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해낼 수 있어야만 하고.
“자신감이 하늘에 계신 선대에게 닿을 지경이여. 흐흐흐.”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치 응답이라도 하는 듯, 때마침 울리는 내 휴대전화.
발신인에 정철식 전무라고 쓰인 그 장문의 메시지는,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이 성공으로 향하는 방향을 여실히 가리키고 있었다.
유지원 감찰팀장.
숙부의 마지막 심복이… 내게 무릎을 꿇었다고.
“계속 이렇게…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