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바그다드 선언(3)
“야! 일단 홀딩하라고! 그거 아이템 좋은 건 알겠는데, 일단 회장이 바뀌었으니까 눈치 좀 보라니까!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건데!”
전화통을 붙잡고 고함치는 탄약 전자의 이택규 사장.
일 잘하고 똘똘하지만, 눈치는 없는 공대 출신 아랫것들은 이게 문제였다. 도무지 줄타기 같은 정치적 판단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걸쭉하고 푸짐한, 그러나 사나이다운 욕설을 시원하게 쏟아낸 후. 숫제 내리꽂다시피 전화기를 내던진 이택규 사장.
다행히 탄약 전자에서 만든 그 유선 전화기는 불량품은 아니었는지, 대학 시절 배구 선수였던 그의 스파이크를 이겨낸 듯해 보였다.
“시벌… 아주 눈치, 코치도 없는 공돌이들 같으니. 나라고 뭐 좋아서 홀딩하자 했겠냐고. 에휴, 그래도 이건 안 망가졌나 보네.”
습관처럼 입에 연초를 문 그는 방금 자신이 부술 뻔한 전화기에 눈길을 돌렸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흔한 회색 전화기.
그리고 바로 옆에는, 달팽이 모양의 빨간색 전화기가 쌍둥이처럼 함께 놓여 있었다. 알 수 없는 뜻의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힌 채로.
-[버스터 콜]
“버스터 콜은 또 뭐란 말이여. 그나저나 이건 진짜 왜 준 거지? 하, 진짜 무슨 귀신 나올 것 같이 생겨 먹어서….”
회장 직속 비서실에서 사장급 이상의 임원들에게 뿌리다시피 한 빨간색 전화기.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지만, 가끔 이렇게 혼자 있을 때 보니 영 으스스한 것은 사실이었다.
뭔가 묘한 오싹함에 한기라도 느껴진 모양인지, 사무실 온도를 조금 높이려는 이택규 사장.
그가 리모컨을 잡고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갑자기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기괴한 벨 소리가 그 빨간색 전화기에서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이이! 삐이이이이이!
“뭐, 뭣이여! 이건 또 왜 갑자기 지 혼자 울리고 지랄인 거냐고!”
순간 이택규 사장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의 파편 한 조각.
무슨 일이 있어도 걸려 오는 이 전화는 받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이라크로 떠나던 어린 회장.
“받아야 하나? 아니면 확 그냥 끊어버려?”
괴로움에 스스로 머리털을 쥐어뜯는 월급쟁이 사장.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손은 결국 불길한 그 전화기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여… 여보슈. 이택규 사장입니다.”
“비서실입니다.”
“비서실…? 아아, 회장님 직속? 거, 무슨 일인데 그러슈?”
“회장님 긴급 지시입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이라크 바그다드로 출발하십시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아니, 아니. 개똥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시래?”
비서실을 통해 항공권을 준비해 두었으니 오늘 밤 안으로 출발하라는 내용을 끝으로 마무리된 전화.
평소 습관처럼,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널름거리는 이택규 사장.
밑바닥부터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의 직감이 메트로놈처럼 양극단을 왔다 갔다 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듯한 메트로놈.
마치 동공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리는 눈망울을 한 그가 선 채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시벌… 이, 이거 아무래도 당장 튀어가야 하는 거 맞는 거겠지?”
* * * *
빨간펜 선생님처럼 붉은 색연필을 손에 든 나.
그리고 다른 쪽 손에 들린, 유세나 보좌관을 통해 건네받은 보고서. 거기에는 이라크로 당장 튀어오라는 명령을 받아들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구분되어 있었다.
“탄약 전자 이택규 사장은 바로 오기로 했고… 일단 예상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튀어온다 하네요.”
“중립 기어 씨게 박은 양반들도 이제는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거지. 그나저나…”
자리에서 일어난 김원철 아저씨는 보고서 뭉치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네었다.
계열 분리가 예정된 금융 쪽 자회사들의 지분 변동 내역.
“결국, 한화기 그 양반은 우리 회장님이 여기 있는 동안 계열 분리 작업을 다 끝낼 생각인가 보더라구.”
어젯밤 있었던 유지원 감찰팀장의 항복 선언.
제 주인이 스스로 몰락해가는 것을 코앞에서 지켜보던 그였다.
실체 없는 도깨비불에 홀린 채, 두 눈이 뒤집혀 제 무덤을 파는 숙부.
제아무리 충견일지라도 무덤 안에 순장조로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할 터.
모든 검토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기지개를 켜고는 양복 상의를 소파에 널어 두었다.
“딱 예상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몰락할 거고요.”
양복을 모두 벗고 노란색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나.
목장갑 낀 손으로 안전모를 쓰고 보호안경을 쓰니, 정말 영락없는 현장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김원철 아저씨.
“징하다. 증말. 어쩌면 예전 선대 때보다 더한 것 같고.”
“칭찬의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퍽이나 그러겠수.”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다가온 예정된 시각. 시곗바늘이 정확히 세 시를 가리키자 탁자 바로 옆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회장님. 사장단 일동 현장에 총집결했습니다. 초빙한 기자들도 자리에 있습니다.
유세나 보좌관으로부터 들려온,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다는 소식.
“후우… 읏차.”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훨씬 깔끔해진 머릿속.
이제 마지막 작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숙부와 <상하이 캐피탈>을 포함한, 모든 방해 세력을 축출하고, 온전히 내 손에 탄약그룹 전체를 거머쥘 수 있는.
“슬슬 출발합시다. 이제… 정말 끝을 볼 시간이니까요.”
* * * *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로부터 남서쪽으로 500km가량 떨어진 해안가.
모래사막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 푸른 바닷가가 눈에 들어올 때쯤 함께 보이는 해수 담수화 플랜트.
뜨거운 태양 아래, 건설 작업이 한창인 이곳에서는 평소와 달리 시끄러운 공사 소음이 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용하다 못해 스산할 만큼 고요한 현장. 연이은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불만들. 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한, 나이 든 임원들 위주로 인내심에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하이고, 도대체 회장 그 어린 친구는 여기서 뭘 하겠다고 이 더운 곳까지 부르고 난리인 건지 모르겠네.”
“옛날에 제 아버지 시절 따라 하는 거겠지. 사장단 군기도 잡고, 겸사겸사 기자들 불러서 존재감도 올리고.”
오리 주둥이처럼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임원들.
[버스터 콜]에 응하긴 했으나, 기존 일정들을 모두 취소하고 바로 튀어 와야 했기에 불만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불만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켜야 제맛인 법.
그들은 옆자리에 앉은 이택규 탄약 전자 사장에게 넌지시 공감을 요구했다.
“회장이랍시고 한다는 것이 참…! 안 그래요? 이 사장.”
“예? 아아…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요.”
“허어. 거, 사람 참. 줏대 없기는.”
적당한 대답으로 말을 흘린 이택규 사장.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았다.
겉으로 내뱉는 대답과는 다른, 묘한 표정. 그의 속마음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저 노망난 영감탱이들, 상황 파악이 아직도 안 되나? 꼴랑 군기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 판을 벌인다고? 그 한서준이가?’
어느새 주변에서 들려오는 지방방송은 귓가에 들리지 않는 상황.
그는 지난 30년간 현장 바닥에서 쌓아온 직감을 믿기로 했다.
‘절대 아닐 것이여. 이건 분명 정치적으로다가 복잡한 일이 있다는 것인데. 일단 귀국하는 대로 어떻게든 비서실에 라인을 만들어서….’
-그르르르릉!
그리고 그 순간.
막아둔 귓가를 강제로 열게 만드는, 둔탁하기 짝이 없는 기계음.
사막의 모래알 하나하나를 떨리게 만드는 듯한 엔진 소리가 이택규 사장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귀에 들려왔다.
“뭐여? 방금 뭔 중장비 움직이는 소리가 났는디?”
“중장비? 오늘 공사 올 스톱인데? 외노자 애들이 전달 못 받은 거 아니야?”
자동반사적으로 소음이 나는 쪽을 향하는 모두의 시선.
누군가 미간을 찌푸려 먼 곳을 바라보는 그때, 뿌연 먼지 속에서 흐릿하던 육중한 물체가 점점 윤곽을 드러내었다.
어지간한 군용 전차만 한. 아니, 어쩌면 군용 전차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는, 집게 달린 대형 포크레인이.
“으악! 이런 미친! 저거, 저거 도대체 저게 뭐야!”
무슨 산업용 인형뽑기 기계라도 되는 것일까?
거센 손아귀의 초대형 강철 집게가 한번 움직이는 순간, 현장에 쌓여 있던 플랜트 건설용 자재 뭉치는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철근 뭉치도, 알루미늄 파이프도, 온도 조절용 기계 장치도. 강력한 강철 집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날아오를 뿐이었다.
-쾅! 쾅! 쾅!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저딴 미친 짓을 하는 거야! 보안팀! 보안팀장! 야, 이 새끼야! 너는 지금 이걸 경계라고 하고 자빠졌냐!”
게거품을 물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룹 본부의 인사 담당 임원.
노기 어린 호통이 면전에 닿았으나, 정작 보안팀장은 그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사전에 받기라도 한 것처럼.
“회장님 지시입니다. 가만히 자리에서 대기하십시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우지끈!
파괴 전차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결단 낼 기세의 집게 포크레인.
그 광기 섞인 움직임이 멈춘 것은, 꽉 차 있던 연료 탱크가 텅 비고 나서였다.
“…….”
처참한 잔해를 배경으로, 그저 모래 섞인 먼지구름만이 날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 모두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얼빠진 침묵만이 가득할 뿐.
“사랑하는 탄약그룹 가족 여러분.”
그리고 그 순간.
집게 포크레인 운전석 문이 열리고 철제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누군가.
이 유례없는. 아니, 상상 속에서조차 존재할 수 없는 혼돈을 일으킨 장본인.
까만 선글라스를 낀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덤덤하게 관중 앞에 우뚝 섰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 오래 기다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떻게,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말 같지도 않은 안부 인사.
너무 충격이 커서였을까?
가장 먼저 정신줄을 부여잡은 사람들은 탄약그룹 내부자가 아닌, 자리에 초청된 기자들이었다.
“선배, 이거… 진짜 대박 사건. 한, 한서준! 한서준 회장 맞지?”
“야, 이… 지금 다른 말할 시간이 어디 있어. 빨리 찍어! 빨리!”
마구잡이로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쏟아지는 질문 공세.
그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어온 것인 듯, 사장단 중 누군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회, 회장님? 이게 무슨….”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밑에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직접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마치 도깨비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의 탄약그룹 임원들.
그리고 작업복 위 회장 배지를 단 채, 먼지 묻은 목장갑을 탁탁 털어대고 있는 한 남자.
양팔의 소매를 무심하게도 걷어 올린 그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달을 일으켰음에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질책하듯 바라보는 탄약그룹의 새로운 주인.
선글라스를 낀 그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쪽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의 잔해를 가리켰다.
“이 해수 담수화 플랜트라는 껍데기를 덮어쓴, 탄약그룹의 총체적 쓰레기를 손수 치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