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바그다드 선언(4)
날씨는 흐렸다.
먹구름 사이에서 쏟아져 내린 가을철 장대비. 스산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은 고층 빌딩 유리창을 사정없이 채찍질했다.
김 서린 유리창 너머,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가만히 지켜보는 한 사람, 한화기.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그의 성정 탓일까?
탄약그룹 본사 45층 복도에는, 오늘따라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지나다니지 않았다.
-탄약그룹의 새로운 총수 한서준 회장이 오늘 현지 시각 기준 오후 3시, 이라크의 한 항구에서 고강도의 개혁안을 발표했습니다.
투두둑, 당장이라도 창을 뚫고 들이칠 것만 같은 빗방울 소리를 배경 삼아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말.
유독 지직거리는 TV 화면 속에서는 뒤이은 현장 기자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직접 집게 포크레인을 조종하며 불량 자재를 전부 부수는 한서준 회장.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마저 중장비의 무한궤도로 누르고 있습니다.
-[한서준 탄약그룹 회장] 이런 쓰레기 부품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쓰레기 완성품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터프한 현장 시찰 모습.
임원들을 이끌며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의 문제점을 밝히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그리고 강도 높은 내부 감사를 진행하겠다는 인터뷰 내용.
-[한서준 탄약그룹 회장] 지지고 볶고, 하여튼 싹 다 엎고서도 이건 아니다 싶다? 그럼 바로 해당 사업 부문을 매각할 의사가 있습니다.
“저 가증스러운 첩 새끼가! 감히 저딴 비열한 개수작이나 부리다니…!”
쨍그랑, 거센 파열음과 함께 수십여 개의 파편이 되어 깨진 유리 꽃병.
그 안에 담겨 있던 꽃송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와 동시에 책상 위에 어지럽게 어질러진 서류 뭉치. 거기에는 한화기가 <상하이 캐피탈>에게 넘겨야 했던 이권이 적혀있었다.
이제는 유리 조각과 함께 널브러진 채,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지만.
“아, 아버지! 당했습니다! 지금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시간이… 시간이 없습니다!”
시퍼렇게 질린, 사색이 된 얼굴의 한서호. 그 역시 이라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정보를 들은 모양이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최소한의 예의인 노크조차 없이 한화기의 집무실에 들이닥친 상황.
다가오는 몰락. 겁에 질린 한서호는 거의 울다시피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런 상황이라면, 방산 기술도 해외 자원 개발권도 <상하이 캐피탈>에 못 넘깁니다! 순식간에 감찰 인력이 잡아낼 거고요!”
“한심한 놈! 알고 있으니 입 좀 닥치거라! 쓸데없는 호들갑이나 떨지 말고!”
평소와 달리, 제 아들에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한화기.
어찌나 꽉 쥔 것인지,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어느새 핏방울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증오심과 두려움, 두 감정이 함께 섞인 채로.
“아버지….”
“<상하이 캐피탈>에는 일정이 지연된다 말하면 그만이다. 놈들도 계열 분리 건에 발을 깊게 담갔으니, 쉽게 빼지 못할 것이란 말이다!”
핏발 선 눈으로 자기 아들을 노려보는 한화기.
요 며칠 사이 이전과는 달리 무언가 불안해 보이는 큰아들이었다.
구체적인 연유는 몰랐으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던 한화기는 이참에 기강을 다잡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툭!
차갑고 무심한 표정의 한화기. 그는 제 아들에게 휴대전화를 던지고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서호 네놈이 맡거라. <상하이 캐피탈> 쪽과 협의까지는 어렵더라도 우선 통보라도 해 두고!”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서호 네가 아프리카에 처박힌 네놈 동생과 다른 점을 내게 보여야 할 것 아니냐!”
나이지리아 정글에 유배된 한서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두 눈이 벌어지도록 크게 뜬 한서호.
차기 후계자 선정의 변화.
장남으로서 가장 민감하게 여기던 것이기에, 그는 마지못해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런 한서호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한화기. 치솟아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한 그가 비서실과 연결된 호출 벨을 누르며 목청을 돋우었다.
“유지원이 이 멍청한 놈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이봐! 그 게으른 돼지 놈더러 당장 이리로 오라고 해!”
“본, 본부장님. 유지원 감찰팀장이 연락 두절입니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쇳소리 섞인 기계음. 재무본부장 직속 비서실 직원 또한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젯밤부터 핸드폰이 꺼져 있었고, 오늘은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도 지금 막 파악했습니다!”
“…뭐라?”
순간, 차디찬 얼음물을 그대로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한화기.
재벌가의 자식으로 살아오며 습득한 그의 직감은, 작금의 상황이 그저 여러 개의 우연이 겹쳐진 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조카 한서준의 갑작스러운 광폭 행보.
수족 유지원의 이례적인 칩거.
“설마…?”
망치로 머리통을 맞은 듯 멍한 느낌. 그것은 곧 극도의 불길함으로 바뀌어 한화기의 등골을 타고 올랐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무어라 중얼거리는 한화기. 그가 다시 정신이 든 것은, 집무실 한쪽 벽에 놓인 TV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탄약그룹의 한서준 신임 회장. 정말이지 강력한 인상을 뇌리에 남겼지요?
-그렇습니다. 또한, 한서준 회장은 일반적인 재벌 총수와 달리, 언론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는데요. 기자회견을 통해 상당히 많은 것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네. 지금 막 시작한 것 같군요. 바로 현장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 * * *
임시 기자회견장 뒤편, 대기실.
곧 있을 발표를 대비해 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내 귀에 닿았다.
늘 그러하듯, 절반의 경박함, 절반의 유쾌함이 담긴 중년 아저씨의 목소리.
“이야, 회장님아. 지금 기자들이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야. 아주 그냥 단체로 좋아서 팔다리 비틀고 난리 났다니까.”
“아니, 그 양반들이 팔다리를 비틀긴 왜 비틉니까.”
“아, 포크레인으로 철근도 비틀고 금속관도 비틀던 사람이. 거,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지. 꼭 그렇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야 쓰겄어?”
평소처럼 알 수 없는 억지 논리를 전개하는 김원철 아저씨는 돌아가는 상황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뭔가 좀 더 싱글벙글한 모습의 아저씨는 맞은편 소파에 앉더니, 미리 준비한 내 원고를 그대로 가져갔다.
“그거 보고 읽게?”
“뭘 보고 읽습니까. 머릿속에 다 있는 건데.”
“하긴, 그것도 그렇지. 회장님이 다 설계해 놓은 건데, 이깟 종이 쪼가리가 필요할 리가. 아무튼, 바깥쪽은 슬슬 끝나가는 것 같더만.”
엄지손가락으로 문 바깥을 가리키는 김원철 아저씨. 쇳소리가 드문드문 나는 것을 보니 마이크를 쓰는 모양이었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와 관련된 실무적인 내용. 임시 기자회견장에서 그것에 대해 질의응답 중인 사람은 성원식 사장. 아니, 이제는 조직개혁 TF의 수장이 된 성원식 본부장이었다.
“잘할 거라 보십니까? 성원식 본부장이.”
“조직개혁 업무? 목줄 채우고 알아서 냅두면 잘 굴릴 것이여. 저 양반이 욕심이 과해서 그렇지 실무는 업계에서 알아주니까.”
“같은 생각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
성원식 본부장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업무에 대한 것과 정치적인 판단 모두.
이미 그를 옭아맨 목줄은 내 손에 있기에, 주인이 확실히 정해진 이상 성원식 본부장은 분명 내 의중을 읽고 알아서 움직일 터.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생수통을 들어 남은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 남은 퍼즐 조각만 끼우면 되겠네요.”
* * * *
임시 기자회견장.
바닷가를 바로 앞에 둔 황량한 사막에 세워진 가건물. 간신히 냉방 설비만 갖춘, 쓰러져가는 공간이었지만, 기자들의 열의는 뜨거웠다.
“와! 선배. 이거 단순 꼭지 기사로 쓰는 거 말고 아예 굵직한 시리즈로 연재해도 되겠어.”
“제목만 잘 뽑으면 그럴싸한 것 하나 나오겠다. 젊은 피 수혈! 탄약그룹을 이끄는 젊은 지도자! 뭐 이런 것.”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경제신문 기자들.
그들은 연단에서 내려온 성원식 조직개혁 TF 본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성원식 저 양반. 라인 바꿔탔다더니 출세했네.”
“다 자기 팔자대로 사는 것이여. 아무튼, 한서준 회장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다냐?”
시원찮은 냉방 설비 탓일까?
땀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금 고쳐 쓴 후배 기자가 배포된 안내문을 보며 대답했다.
“어디 보자. 무슨… 그룹 계열 분리 관련된 발표라던데. 말을 할지는 모르겠네. 또 포크레인 나올 수도 있잖아.”
“에이, 실내인데 설마. 그나저나, 지금 본사는 또 난리여. 이거 좀 봐봐.”
선배 기자가 내민 노트북.
화면에는 막 데스크에서 보도가 허가된 금융 관련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코코아>. 최근 파생상품시장에서 막대한 이윤을 낸, 정체불명의 투자회사가.
“<코코아>? 얘들 얼마 전에 금융위기 때 파생상품으로 거하게 먹었던 애들 아닌가? 또 먹었어?”
“방금 전에 1조 좀 넘게 드셨단다. 문제는… 그거 대금 뒤집어쓸 애들이 탄약 증권이라는 얘기가 있어.”
탄약 증권.
<코코아>.
두 회사의 이름을 연달아 들은 후배 기자는 습관처럼 손가락 위로 만년필을 돌렸다.
핑그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만년필이 책상 위로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열리는 후배 기자의 입.
“선배, 이거… 경제신문 기자의 감이 막 미쳐 날뛰는데. 혹시 선배도 그런가?”
“하… 씨. 나도 모르겠다. 일단은.”
머리가 복잡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선배 기자.
그는 다른 손으로 앞쪽 연단을 가리켰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양복 차림의 한 남자.
“…저 양반 말하는 것부터 듣고 결정하자고.”
불과 한두 시간 전 보여주었던, 제정신이 아닌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집게 포크레인을 거침없이 몰던 광포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정제된 정장 차림으로 모두의 앞에 섰다.
“반갑습니다. 언론사 기자분들. 탄약그룹 회장 한서준입니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기자 몇몇이 벌써부터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한 것 따위야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제 할 말을 이어나가는 탄약그룹의 젊은 주인.
“계열 분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그 전에 소식은 좀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탄약 증권이 망하게 생겼거든요.”
“회장님! 그러면 탄약그룹의 금융 계열사들은 이제 분리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겁니까?”
참을성이 부족한 누군가가 던진 질문. 분명, 결례임이 확실한 상황이지만, 오히려 반기기라도 하듯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승리자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
“보통의 경우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희 쪽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서요. 오히려 하늘이 저희를 돕는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발언이 끝남과 함께 빔프로젝터 화면 속에 펼쳐진 무언가.
점점 커져만 가는 기자들의 웅성대는 소리.
하늘 위로 올라간 기자들의 손은 제자리를 찾아간 듯, 노트북 키보드를 향해 내려와 앉았다.
“선배… 저건 그러니까…!”
“얌마, 지금 말할 시간이 어디 있어! 빨리 속보부터 띄우자니까!”
화면 속에는 두 개의 기업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붉은색 불꽃 모양의 탄약그룹 로고. 그리고… 노란색 열매 모양의 <코코아> 로고가.
“사실 <코코아>는 제겁니다. 그리고… 이제 탄약그룹 금융 계열사들도 제 것이 될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