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양쯔강 뷰 아니면 양쯔강 물(1)
“으아아아아! 이대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 자살!”
“인생은 양쯔강 뷰 아니면 양쯔강 물이야! 나는 뭐냐고? 야 이 새끼야, 당연히 난 후자 쪽이고!”
“이번 생은 망했어! 이제 남은 건 「이세계 전생했더니 내 주식이 메챠쿠챠 올라버렷!」의 주인공이 되는 것뿐이야!”
풍덩, 물보라 소리와 함께 양쯔강에 뛰어드는 수많은 투자자들. 아니, 투자자였던 사람들.
차마 그 꼴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중국 공안의 만류에도, 그들은 거리낌 없이 꿈과 희망과 수익이 넘치는 이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이고, 그만 좀 하이소! 거, 사내대장부가 살다 보면 주식 좀 말아 먹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게 뚫린 입이라고…! 네가 파산 한번 해보고 지껄여라! 이 자슥아!”
리만 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는, 상하이 금융지구의 모습을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아니, 흐르는 눈물처럼 시퍼런 푸른빛으로 물든 계좌. 그리고 열흘 내리 끝을 모르는 추락에 자신의 몸도 함께 추락시키는 사람들.
이는 그저 개미투자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상하이 고층 빌딩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의 포식자들 또한,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기에는 그 손실이 막대했으니까.
“끔찍하기 짝이 없군. 당분간 옴짝달싹도 못 할 터.”
손실을 의미하는 빨간 줄이 찍찍 그어져 있는 보고서.
조금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이사는 감당하기 힘든 손해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생각했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군. 거기에… 황해 너머 동쪽에서도 잡음이 일었고.”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제임스 왕 이사. 목 받침에 머리를 올려 두고 위쪽을 바라보자, 그의 눈에 들어온 나무를 깎아 만든 동북아시아 지도.
맥없이 올라가는 팔. 그가 힘이 완전히 빠진 주먹을 쥐자, 천장 전체를 통째로 조각한 지도가 손안에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갔다.
마치 백사장의 고운 모래알처럼.
“물론 단순 잡음이라 치기에는, 이제는 손도 댈 수가 없게 되었다네. 그렇지 않은가. 옌룽.”
“…송구합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허리를 숙인 채,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옌룽. 앙다문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죄드립니다. 제가 질 수 있는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농담이 과하군. 원화로 환산하면 대략 1조 3천억 원일세. 그걸 자네 월급으로 어찌 메꾸려고?”
“그것은….”
탄약 증권이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자금 조달을 위해 <코코아>에 판매한 파생상품.
고작 1,050억 원 정도였던, 그리고 절대 손실이 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아 보였던 작은 눈덩이.
그것은 금융위기와 함께 1조 3천억 원이라는 집채만 한 눈사태가 되어 청구서를 내밀었다. 이제는 탄약 증권의 최대 주주가 된, <상하이 캐피탈>에게로.
“마치 복어 같지 않은가? 겉에 잔뜩 돋아난 가시를 기껏 쳐내게 해놓고, 실상 먹을 수도 없게끔 뱃속에 독을 집어넣었으니.”
선진화된 방산 기술과 해외 자원 개발권. 기름진 살결을 드러내던 복어였으나, 도무지 삼킬 수 없는 상황.
혓바닥 끝자락에 닿은, 저릴 정도로 아릿한 독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억지로 삼키려 드는 순간,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중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더 이상의 손실은 감내할 수 없다. 옌룽, 탄약그룹에서 발을 빼도록.”
“…주군께서 바라시는 목표에 탄약그룹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만.”
중국 공산당 내부의 차기 대권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 투쟁. 그리고 그 거대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장기 말로 쓰일 운명이었던 탄약그룹.
제 주인의 의중을 알고 있던 옌룽이기에, 그는 쉽사리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순간, 옌룽의 어깨 위에 올라간 제임스 왕 이사의 손. 웃고 있는 모습과 달리 힘이 잔뜩 들어간 손아귀는 소리 없이 무어라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뉴욕에서 불어온 바람이 상하이의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경제부터 정치까지, 모조리.”
“주군….”
“당분간 발톱을 숨겨야 할 터. 안타깝지만 탄약그룹은… 이제는 발을 빼야 한다.”
제 주인의 말을 듣고는 다시금 고개를 숙인 옌룽. 주먹 쥔 손이 떨리는 것을 참지 못한 그는 스스로 다짐했다.
한서준. 모든 계획을 어그러트린 저기 동쪽 소국(小國)의 천둥벌거숭이를 언젠가는 자신의 손으로 없앨 것이라고.
“손실 부문을 최소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이루지 못했으나, 적어도… 투자손실만큼은 나지 않게끔.”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는 옌룽.
차갑게 식은 얼굴의 그가 문밖으로 나서려는데, 문득 뒤에서 제임스 왕 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옌룽. 잠깐만 기다려라.”
“무슨… 일이신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상하이 캐피탈>의 주인.
제 수하를 앞에 세워둔 것을 잊기라도 한 것일까?
제법 긴 시간 아무런 말 없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제임스 왕 이사.
그가 입을 연 때는, 무언가 재미있다는 듯한, 그러나 묘한 잔인함이 칠해진 미소가 입가에 걸린 후였다.
“내가 직접 통화하지.”
“고작 실무진 따위는 제 선에서 해결해도 될 일입니다만….”
“아아, 그 김원철인가 하는 아랫사람이 아닐세. 한서준 회장과 직접 연결하게나. 이렇게 된 이상, 축하 인사라도 해야지.”
심복을 자처했으나 이번만큼은 그 의중을 가늠치 못한 옌룽. 그의 머리 위에는 큼지막한 물음표 하나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제임스 왕 이사. 길게 흉터 진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그가 서늘한 어투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앞으로도… 종종 여러 방면에서 마주할 것 같으니 말이야. 그 한서준이라는 젊은 친구하고.”
* * * *
늘 문중회 영감님들에게 치이기만 했던 호텔 플로렌스. 영 좋은 기억이 없던 곳이었긴 했지만, 여기가 이렇게나 생기발랄한 곳인 줄은 몰랐었다.
세 개 층을 통째로 헐어 올린 천장에는 ‘플로렌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꽃잎을 형상화한 샹들리에가 나를 반겨 주었다.
루비와 사파이어, 황금과 에메랄드 조각을 얇게 이어 붙인 조형물에 반사된 빛이 향하는 곳은 VIP 전용 라운지.
<코코아>의 창립 멤버들을 위해 오늘 하루 온전히 비워둔 곳이었다.
“서준아… 아니, 아니, 회장님 오셨어요?”
보는 눈이 많기에 내게 격식을 차리는 서희 누나. 한껏 멋을 낸 차림의 누나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멀어지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서준이 네 말대로 됐어.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마치 꿈처럼.”
붉은 홍조가 얼굴에 올라온 서희 누나. 상기된 모습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금융, 영미권의 선진 금융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회사의 차세대 리더가 되겠다는 욕망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비록 세간의 말 많은 자들에게 아버지와 두 오빠를 잡아먹고 올라왔다는 평을 들을지언정.
“<코코아> 금융 분야 운영에 관련된 부분은 이제 누나가 맡으면 될 거야. 조만간 공식적으로 탄약그룹 내에 편입될 거고.”
“탄약 증권 포함해서 금융 계열사들 전부, 아예 싹 정리하는 방향으로 가게?”
“실무자 고용 승계 형식으로 가고 나머지 임원들은 쳐내야지. 구석수 사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숙부에게 줄을 섰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서희 누나.
사후 처리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일치한 모양인지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활짝 웃는 얼굴. 그러나, 이내 먹구름으로 그늘져 시들어버린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서희 누나의 모습.
“그러면, 아버지는… 그리고 큰오빠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책임을 져야지. 본인이 한 행동에 걸맞은.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은 알고 있잖아?”
피붙이가 감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언을 들어서일까?
생각보다 단호한 내 태도에 조금은 놀란 듯한 서희 누나가 고개를 떨구었다. 이름 모를, 조금은 서글픈 현악기 연주곡과 함께.
그 감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칼을 뽑고 휘두르지 않으면, 다시 칼집에 집어넣기도 어려운 법.
결심을 마친 나는 누나를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이제까지 살아왔던 모든 행적을 털어서, 권력기관에 표적 수사를 요청하는 일은 없을 거야.”
“…….”
“하지만, 이미 세간에 드러난 일을 덮지도 않을 거고. 결과에 따른 책임은 확실히 지울 거야.”
“…그거면 됐어. 이런저런 감정이 섞이는 것보다 차라리 그렇게 기계적인 처분이 더 나을 테니까.”
연주곡이 끝남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선 나.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연주자들이 현악기의 줄을 조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어졌던, 그리고 과도하리만치 팽팽하게 당겨졌던 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제자리를 찾아갔다.
“원칙대로 간다. 숙부에 대한 감정은 일절 섞지 않는다. 그것이 복수심이든 연민이든 둘 다 상관없이.”
혼잣말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흘려보낸 샴페인 한 잔.
또렷해진 눈으로 돌아온 내가 다시 연회장 중심으로 가려는데, 저 멀리서 어딘가 반짝거리는 이마를 가진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김원철 아저씨였다.
“오! 이제야 찾았네! 아주 한참을 찾아다녔어야. 흐흐흐… 긴히 할 얘기가 있걸랑.”
“양평 낚시터 또 가자는 얘기면 당분간은 참아주시죠. 하실 일이 워낙 많아서요.”
“에헤이. 누가 들으면 일도 하나도 안 하고 맨날 놀러만 다니는 한량인 줄로 알겠네.”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괜히 토라진 어린아이의 모습을 연기하는 김원철 아저씨.
맨날 놀러만 다니는 한량… 인 것은 아니기는 하다.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가장 바쁘게 산 사람은 이 양반이니까.
“…생각해 보니 일도 참 많이 하시는데, 역시 이미지 관리가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뒤늦게라도 알아주시니 다행이네. 아무튼, 잠깐 시간 좀 내줘. 거물급이 통화하고 싶다네.”
“거물급…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김원철 아저씨가 거물급이라고 칭할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국방부나 산업부의 장·차관 정도는 그저 ‘그 양반’ 정도의 칭호로 퉁 치는 게 다반사였으니까.
그렇기에 남은 거물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국무총리야 얼마 전에 통화했고, 대통령은 조만간 청와대 조찬 모임에서 볼 예정이니까.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웃음 짓는 김원철 아저씨.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내가 생각했던 부류의 사람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의외의 인물이었다.
“<상하이 캐피탈>의 대빵. 제임스 왕 이사. 그 양반이 우리 회장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듣고 싶으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