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양쯔강 뷰 아니면 양쯔강 물(2)
“…전화 바꿨습니다.”
“당신이 한서준 회장? 반갑습니다. 제임스 왕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제임스 왕의 목소리는 중저음에 철판을 쇳조각으로 긁는 듯이 탁하기 짝이 없었다.
들리는 대로만 추측해 보자면, 예상되는 나이는 서른 후반 내지는 마흔 초반쯤.
한화 수십조 원 규모의 거대 자금을 굴리는 사모펀드의 주인이라기에는 다소 젊은 느낌이었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관록에서 오는 중후함은 없었다. 오히려 갓 무리로부터 독립해 세력을 이룬 거친 수사자와 같은 느낌이 든다면 또 모를까.
“오래간만입니다. 물론 이렇게 직접 이야기 나누는 것은 처음이지만.”
“오래간만이라. 첫 시작을 농담으로 할 정도의 여유는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농담.
그래. 당신에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회귀 이전, 채 자라지 않아 짧은 갈기를 바람에 휘날리던 저 수사자의 첫 먹잇감이 되었던 그때 그 느낌을.
상처 입은 새끼 가젤처럼 절뚝거리던 과거의 탄약그룹.
덮쳐지는 것조차 모르는 사이, 핏물이 줄줄 흐르던 뒷다리를 순식간에 뜯어간 자. 그가 바로 <상하이 캐피탈>의 수장, 제임스 왕 이사였으니까.
“서로 바쁜 사람들끼리 요점만 말합시다. 제임스 왕 이사, 내게 전화한 용건이 뭡니까.”
공치사 따위는 일절 보태지 않은, 냉랭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은 나.
분명 저들은… 기회가 되는 대로 다시 올 것이다.
숙부의 헛발질이 아니었다면, 저 날 선 송곳니로 탄약그룹을 순식간에 삼키려 했으니까.
“…….”
무언가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잠시 숨을 고르는 제임스 왕 이사.
이윽고 엉망으로 조율된 목관악기 같은, 그리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축하 인사. 그리고 경고.”
“용건이 둘 다 가당치도 않군. 어디 무슨 말을 할지 들어나 봅시다.”
소리 없이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꼭 눈가에 보이기라도 하듯 불현듯 찾아온 불쾌함.
딸그락, 유리잔 안에 얼음덩어리 몇 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상하이의 탐욕스러움이 내게 다가왔다.
“축하 인사야 뻔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어설픈 그릇이나마 재벌 그룹을 속에 담았다는 것, 그리고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혈육을 짓밟았다는 것.”
명백한 도발.
적개감을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끊임조차 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둘 다 성공적으로 끝마쳤으니, 어찌 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등 쓸모없는 축하 인사는 잘 받았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참느라 고생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제 그 잘난 경고라는 것을 내뱉으셔도 좋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신경전.
책상 끄트머리를 잡은 손아귀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잔뜩 힘이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붙어 있던 장식물이 흔들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흰자위에 실핏줄이 스멀스멀 올라온 것이 느껴질 때쯤,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거친 목소리.
“한서준 회장. 이번에 당신이 행한 일이 중국 정계 개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공산당 소꿉장난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만.”
“응당 신경 써야만 하지. 모든 무모해 보이는 일에는 감당하기 힘든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
“대가, 대가라. 언제든 기회만 된다면 발톱을 드러낼 생각인가 보군.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요. 다만.”
명백한 선전포고.
물러날 생각은 없다. 물러나서도 안 된다.
피 묻은 붉은 입가를 못내 아쉬운 듯, 혓바닥으로 다셔대는 제임스 왕 이사.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는 형국. 목소리를 낮게 내려 깐 내가 그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건네었다.
“나를 상대하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겁니다. 그 알량한 사모펀드를 포함한 당신 인생 전부를.”
듣는 이를 놀라게 할 고함도, 거친 욕설이 포함된 언사도 없이, 그저 차갑도록 정제된 언어만이 오간 늦은 저녁.
불쾌하기 짝이 없는 통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톡, 톡, 톡, 톡.
심각한 표정으로 손가락 끝으로 책상 끝을 두들기던 나. <상하이 캐피탈>이 지금 당장 내게 어떤 위해를 가할 일은 없다.
그러나… 이번 금융위기가 수습되고 난 후, 어떤 형태로든지 탄약그룹 공격해올 것이 명백할 터.
“후우, 끝맺음까지 확실하게 마무리해야겠어.”
깊게 날숨을 내쉬며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는 나. 그리고 손가락 끝에 닿는 묘한 촉감.
아직도 책상 위를 두드리던 손가락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그것은.
“슈크림… 단팥빵?”
“흐흐흐. 뭘 그렇게 심각하게 굴고 그러는 겨. 일단 당부터 충전하고 생각하라니까.”
평소처럼 낄낄거리는 김원철 아저씨의 웃음.
하얀 슈크림과 까만 팥이 묻은 검지 아래에는 아저씨가 그토록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단 음식이 놓여 있었다.
“후우, 그래도 오늘은 이 뜬금없는 타이밍이 좀 괜찮은 날이네요. 딱 달달한 게 땡기던 참이었습니다.”
“전화통화 하는 거 들어보니까 이건 뭐 살벌하드만. 괜히 내가 짜장 애들하고 연결해줬나 싶기도 하고.”
“아니요. 잘셨습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도발하는 편이 대비하기 편하니까요. 그나저나….”
구멍 난 슈크림 단팥빵을 통째로 입안에 구겨 넣은 나. 당이 들어와서인지 그제야 조금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뭐?”
김원철 아저씨의 반문.
찬물로 목을 축인 내가 손에 묻은 빵가루를 툭툭 털어버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슬슬 끝을 봐야겠습니다. 숙부를 포함, 관련된 모든 이들에 대한 처리. 현재 진행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 * * *
그날, 이라크에서 있었던 인터뷰 이후, 탄약그룹 본사 45층에 사람이 드나드는 일은 없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텅 빈 사무실. 심지어 말단 계약직 비서조차 힘의 균형추가 온전히 한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정도의 변화가 탄약그룹 전체에 불어닥쳤으니까.
그렇게 뜬소문이 가장 먼저 도는 곳은 옥상 흡연장에서부터였다.
“하이고, 한화기한테 줄 선 양반들은 싹 다 모가지여. 모가지. 금융 쪽은 아예 <코코아>가 모기업 노릇을 한다드만.”
“산업 쪽도 성원식 본부장이 아주 눈깔에 뭐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칼질하고 난리여. 난리.”
“그게 다 줄을 잘 바꿔탔다는 증빙 아니겠냐 이 말이야. 이왕 이래 된 거 충성심을 보인다… 뭐, 그런 거지.”
밑바닥에 찐득한 커피가 조금 남은 종이컵 위에 쌓여가는 담배꽁초. 서늘한 가을바람을 안주 삼아 직장인들의 이야기꽃은 점점 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화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번 건에 한서호 그 친구까지 다 걸려 있다던데.”
“뭐, 징역 나온다 어쩐다 카더라는 많은데, 나도 풍문으로 듣기만 해서… 아! 마침 저기 오네.”
헝클어진 머리를 한,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의 한 남성. 오늘따라 유독 불이 붙지 않은 싸구려 라이터 부싯돌을 켜는 그 남성을 향해, 흡연장에서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다가갔다.
“하이고, 김 변. 라이터 좀 좋은 거 쓰라니까. 내 거 지포 라이터 줘?”
“음? 아아, 박 차장. 땡큐. 아주 줄 것까지는 없고… 그냥 불만 좀 빌릴게.”
길게 연기를 내뿜는 법무팀의 김 변호사.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었는지, 그는 곧바로 나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구렁이 담 넘나들듯, 순식간에 옆자리에 다가가 앉은 박 차장.
“헤헤헤. 김 변. 어떻게, 법무팀에서 결론은 났고?”
“나긴 났지. 나긴 했는데, 이거 함부로 말하기가 좀 그래서… 당분간 입단속 잘 할 수 있어?”
“아, 당연히 눈칫밥 먹는 데 말고는 입도 뻥끗 안 해야지. 아예 병원 가서 입술에 지퍼 달아달라 하려고.”
“넉살은… 거, 알았으니까 약속 꼭 지키고.”
손가락 끝으로 재를 털어내는 김 변호사. 입에 문 새로운 장초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그가, 새는 발음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화끈하더라. 꼬마 회장.”
“뭘 어쨌길래…?”
“다시는 못 일어서게 될 정도? 일단 한화기, 한서호 두 부자는… 최소 7~8년은 살겠드만. 전관 변호사 잘 써도.”
* * * *
-쾅쾅쾅쾅!
“그냥 좋은 말로 할 때, 문 여세요! 괜히 기자들 와서 사진 찍고 그러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잖습니까?”
이태원 고급 주택가 중심에 자리한 한화기의 집. 마지못해 열린 대문 틈 사이로 푸른색 박스를 손에 든 수사관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1팀은 안채 싹 뒤지고, 한화기 그 양반 서재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싹 까. 2팀은 별채 문서 보관고 들어가고.”
발자국으로 엉망이 된 매끈한 대리석 바닥. 혼돈으로 가득 찬 분위기 속, 바닥에 주저앉은 한서호는 숫제 통곡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멍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한 그는, 반쯤 넋이 나간 듯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서준… <코코아>… 그 파생상품 쪼가리가 1조 3천억 원이라니….”
“쯧쯧쯧. 이 친구는 맛이 갔네. 어이! 최 반장아! 한화기 본부장 신변은 확보했냐?”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본 선임수사관.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중년인.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인지, 한화기는 그 며칠 사이에 머리가 반쯤 하얗게 세어 있었다.
“…마침 오셨네. 더 시간 끌 것도 없고, 이제 출발합시다. 수갑은 따로 안 채우겠습니다.”
“전화 한 통화만 하겠다.”
“에헤이. 안 되는 거 아시면서….”
눈에 불꽃이라도 심어 놓은 것처럼 선임수사관을 노려보는 한화기.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위압감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마지못한 표정을 애써 연기하며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미는 선임수사관.
“크흠, 길게는 안 됩니다. 국제전화 쓰실 거면… 애초에 기대 안 하시는 편이 나을 거고.”
조금은 불쌍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선임수사관. 그가 생각하기로는 한화기가 마지막으로 전화할 곳은 <상하이 캐피탈>뿐이었다.
그런 수사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천천히 번호를 찍어 누르는 한화기.
몇 차례의 통화대기음이 지나간 후,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주신 분 누구십니까?”
“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그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오롯이 탄약그룹 전체를 거머쥔 조카.
이를 앙다문 한화기는 온 힘을 다해 조금씩 입을 열었다.
“한서준이 네놈 뜻대로 되었군. 내 목을 치는 것까지 전부.”
“어설픈 자비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 패배 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본 한화기. 탄약그룹의 상징물에 조각된 불꽃 모양의 장식품이 그의 눈에 담겼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옮겨진, 제 혈육을 향한 시선.
“자식놈들만큼은 적어도 바깥에 있었으면 하는군.”
“…조정해보도록 하지요.”
“그래. 고맙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끊어진 통화. 선임수사관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며 한화기가 말했다.
아주 초연한 태도로.
“이동하지. 대가를 치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