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66화 (65/300)

66화인재를 발굴하는 법(1)

여의도 K 호텔 스위트룸.

한강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한 층을 통째로 쓰는, 펜트하우스 형식의 객실에는 색칠한 구름처럼 몽롱한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어때? 최고지? 이거 내 친구 호식이가 네덜란드에서 산지 직송으로 받아온 거라니까. 항공사 자제분이 이래서 쓸모가 있는 것이여.”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한, 의기양양한 모습의 김범호.

그는 물담배에 정체 모를 하얀 가루를 섞어 넣은 후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서윤지에게 넘어간 파이프.

여러 차례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서윤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굳은 표정이 극적일 정도로 풀어졌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확실히 이 브랜드 게 느낌이 달라.”

“흐흐흐. 문익점이 별 게 아니라니까. 세관 검사 안 걸리게 하면 그게 바로 문익점 선생님이여. 안 그러냐?”

재벌가 자제들 가운데에는 답 없기로 유명한 이들끼리 뭉쳐서 사고나 치고 다니는 멤버들이 있다.

가문이 소유한 항공사를 이용해 밀수를 저지른 걸 대놓고 자랑하듯 말하는 김범호.

“으음….”

눈이 반쯤 풀려 있던 서윤지.

파이프를 입에서 뗄 줄 모르던 그녀는, 김범호의 떠벌림에 뭔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야, 김범호. 그 입 좀 닥쳐봐. 네 목소리 때문에 집중 못 하겠으니까.”

“괜히 또 까탈이여. 자기도 기분 좋으면서.”

“됐어. 쌓인 건 다 풀었으니까. 이제 너나 하시던가.”

파이프를 집어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하는 서윤지.

풀썩, 매트릭스 위로 샤워 가운 차림의 그녀가 몸을 묻었다.

“왜 이러셔. 오늘 유달리. 뭔 일 있어?”

뒤따라온 김범호. 침대에 함께 몸을 누인 그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만났어.”

“만났다고? 누구를?”

“한서준 만났다고, 멍청아. 전경련 모임에서. 아주 자신감이 머리끝까지 꽉 차 있더라. 재수 없게.”

얼마 전 전경련 회관 테라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서윤지.

평소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모습.

무언가 조급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녀의 한쪽 엄지손톱에는 톱니바퀴 같은 잇자국이 불규칙적으로 나 있었다.

“이번 방위사업청 신무기 개발사업 입찰 건. 반드시 이겨야겠어. 한서준 그 싸가지 없는 놈을 빨리 밟아 죽여야 해.”

서윤지의 그런 과격한 언행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범호.

그는 최근 점점 날카로워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도통 납득하기 힘들었다.

‘히야, 이건 아무리 내가 끼고 다니는 년이라지만, 진짜 오만가지로다가 괴팍스러운 년이여. 성깔이 아주 그냥….’

물론 김범호가 그 모습을 아예 이해하지 못할 만한 것은 아니다.

서윤지와 한서준.

똑같은 서출, 똑같이 받아온 핍박, 그러나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 입지.

분명 그녀의 열등감과 비교 심리가 향하는 주요 공격 방향이 한서준이 된 것은 타당하다 여길 만한 것.

그러나 문제는… 그 지나치다 싶은 정도의 강도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리 앉아 봐. 우리 예쁘고 성깔 있으신 서윤지 씨. 담배 한 까치 태우고 말하자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누군가의 욕망과 이해. 딱 잘라 나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은 흰 종이 위에 쌓여 붉은 불꽃과 만나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타올랐다.

어지러움과 함께 올라오는 허망함. 그제야 서윤지의 허리를 감싸 안은 김범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야. 솔직히 말해 봐봐.”

“뭘 말해?”

“윤지 너. 그렇게 한서준이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유는 또 뭐냐? 그냥 억세게 운 좋은 놈이다, 생각하고 넘기면 안 되는 거냐고.”

서윤지의 허리를 다잡은 손아귀에 부드럽게 힘을 주는 김범호.

그 때문일까?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던 서윤지의 본심이 입 밖으로 조금씩 새어 나왔다.

“…시간이 없어. 나한테는.”

“하긴, 요새 피부 노화 속도가 좀 빠른 것 같긴 해… 가 아니라, 아니, 아니! 알았어! 때리지는 말고!”

굳이 매를 사서 버는 스타일의 김범호.

등판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몇 개 찍히고 난 후에야, 평화로운 분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비극이라는 색깔로 덧칠한, 조용한 평화로움이.

“영감탱이. 알고 보니 나 말고도 다른 사생아 하나 더 있더라. 그것도… 아들.”

“오우… 그건 진짜 네 입장에선 개같이 멸망한 건데. 자세히 좀 말해 봐봐. 도대체가 어떻게 된 건데?”

종교단체가 기부금을 요청할 때마다 서국철 회장은 이런 말을 내뱉던 것으로 유명했다.

‘신 같은 건 돈 버는 데 하나도 도움 안 돼! 당장 꺼져라! 이 예수팔이 사기꾼 같으니!’

그러나 15년쯤 전부터 갑자기 안 믿던 종교를 믿기 시작한 서국철 회장.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북한산 인근 기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도, 친지도, 측근도 모르게. 그저 심복인 수행비서 하나만을 데리고서.

“그 돈에 미친 노괴. 어울리지도 않게 예배드린답시고 매주 어디 갈 때 알아봤어야 했어.”

“하긴, 누가 첩을 수녀로 만들고 남자애를 기도원에서 길러. 상상도 못 하지. 우리 집 꼰대도 그렇게는 안 해.”

차량 수리를 맡은 직원이 몰래 빼돌린 내부 블랙박스. 서윤지는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같은 서출이었으나… 철화그룹 서씨 집안 상속자의 자격이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아버지의 애정이 듬뿍 서린 그 풍경을.

“싸이코 같던 영감탱이. 그 중학생 핏덩어리 새끼에게는 쓸개도 빼줄 기세던데? 진짜 핏줄이라고.”

“하이고, 뭐… 노인네들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아마 성인 되자마자 그룹 상속 무대 위로 올릴 거야. 아마 언니년들도 단숨에 제낄 거고.”

철화그룹 서씨 가문을 계승할 자 앞에서는 적출이건 서출이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다음 대에서 물려줄 성씨는 서씨가 아닌 최씨, 박씨일 것이 분명하니까.

“영감님 그렇게 할 거 뻔하다야. 백 퍼센트로.”

“그러니까 그 전에 SA-철화 테크윈에서 내 입지를 다져놔야 해. 그렇다면….”

가질 수 없는 것.

고작 열다섯 살 언저리의 핏덩이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 쳐야만 하는 자신.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반쪽짜리 서출이면서, 왕관을 쓸 자격이 있는 남동생과 묘하게 겹쳐 보이는 한 사람.

하필이면 목소리마저 비슷한 둘이었기에, 울컥하고 치솟아 오르는 분노.

모난 손톱으로 침대보를 움켜쥔 서윤지.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울분을 토하듯 말했다.

“한서준. 이번 국방부 신무기 개발 입찰에서 그놈을 이겨야만 해. 그러려면 우선…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필요하고.”

* * * *

아무래도 영 경고의 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탄약 전자 이택규 사장.

오늘 자 모 친기업 경제지 인터뷰에 등장한 그는, 소위 ‘곤조’라고도 불리는 뭔가 살짝 맛이 간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한성경제] 의지박약 신세대 사원들! 직장에서 버티지 못한다? 탄약 전자 이택규 사장의 속마음을 들어보자.

-이택규 사장: 면접 때는 인재(人才)를 자청하더니, 정작 단체 활동에는 나 몰라라 하는, 전체에 폐 끼치는 인재(人災)가 되지는 말아야….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이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이런 오도된 생각을 거리낌 없이 대명천지에 대고 말하는 사람이나, 이걸 또 좋다고 받아적은 언론사나 둘 다 미친 것은 매한가지인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회귀하기까지 무려 10여 년 전.

아직도 무언가 고풍스러운. 아니 고집스러운 기업 문화가 어느 정도는 당연시되는 시대였다.

“일단… 명령이 제대로 내려갔는지부터 확인해 봅시다. 유세나 보좌관? 저 대담, 언제 한 겁니까?”

“날짜를 보니, 회장님께서 지시하시기 이틀 전에 인터뷰했던 모양입니다.”

“후우, 이미 나가는 건 막을 수 없던 상황이었군. 일단 알겠습니다.”

하기야, 탄약그룹에서 밑바닥부터 계열사 사장까지 올라갔다면, 눈치 보는 것쯤이야 이미 만렙을 찍었을 터.

설악산 등반 후 사과 씹어먹기, 새벽 6시 구보, 목욕탕에서 창의력 회의, 그리고 원탁의 기사….

이런 정신 나간 바보짓은 저번의 김원철 아저씨를 통한 명령 이후 곧바로 사라졌다. 아마 자신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질책이 있었다고는 판단했을 것이다.

“…인재가 필요해. 인재가.”

차창 아래 팔걸이에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는 나.

당장 이택규 사장을 자를 수는 없다. 전자 쪽 전반을 아우르는 제너럴리스트의 역할을 대신할 인력을 아직 구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고뇌의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도착한 평창동 본가 저택.

평소 회장실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오래간만에 찾아온 집이었다.

* * * *

“어머! 아들! 우리 아들 왔어?”

하이톤의 목소리로 나를 반기는 엄마. 버선발로 나를 맞이한 엄마는 숨이 꽉 막히도록 나를 끌어안았다.

“다 컸어도 엄마한테는 아직도 애 같아. 집에 자주자주 오고. 알았지?”

“알… 았어요. 일단 이거 좀 놓고.”

옆에 선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청주댁 아주머니.

항상 내가 집에 올 때마다, 팔불출이 되는 엄마가 영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모님. 그러다 회장님 숨 넘어가겠슈.”

“아줌마는 또 그런다! 엄마가 아들한테 이 정도 애정 표현도 못 해?”

“해도 되긴 해유. 이사장님 앞에서만 안 하면 말이유.”

순간 계단 위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

그곳에는 냉기 어린 눈으로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는 탄약그룹의 서태후, 할머니가 서 있었다.

“어이쿠, 저녁거리 한다는 걸 잊었네.”

“청주댁 아주머니?”

언제 자리에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진 청주댁.

위기 감지 센서 하나는 기가 막힌 걸 달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오랜만에 듣는 샤우팅.

“서준이 애미! 너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게냐? 내 그토록 탄약그룹 한씨 집안 며느리답게 격식을 갖추라 했거늘!”

“어머, 어머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한테까지 어떻게 그래요! 집안 분위기 냉랭해지게!”

“못난 것! 기껏 호적에 이름까지 올렸건만, 아직도 저리 경박한 티를 벗지 못허니, 원!”

내가 회장이 되어 탄약그룹 전체를 손에 거머쥔 그날.

엄마는 정식으로 한씨 집안 며느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정은 할머니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서준이 너도 왔으면 곧장 서재로 올라오지 않고 뭣 하는 게냐! 그만 밍기적거리고 어서 이리 오너라!”

* * * *

오래간만에 들어간 서재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별다른 장식품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업무만을 위한 삭막한 공간.

“네 숙부 일은 앞으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 선에서 조정이 되는 문제이니.”

다만, 한 가지.

마호가니 목재로 만든 책상 위, 사무용품 뒤편에 감추어진 세 개의 가족사진 액자들.

이제는 하나가 더 늘었다. 비교적 최근에 찍은 모양인지 할머니와 숙부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는 사진 한 장.

“…괴로우시지 않으십니까?”

“저번에 김원철이가 그러더군. 마귀할멈으로서 지고 가야 할 팔자라고. 미친놈이 따로 없지. 대번에 면상에 소금을 뿌려 내쫓아 버렸다.”

며칠 전, 유독 얼굴 피부가 영 좋지 않던 김원철 아저씨.

이 양반도 참 매를 사서 번다. 물론 할머니와 모자지간 이상으로 친하니까 가능한 것이지만.

“헌데 곱씹어 보니, 괘씸하긴 해도 맞는 말인 것 같더구나.”

“할머니….”

“그러니… 감옥에 간 네 숙부에 대한 관리는 내가 맡고자 한다. 남은 업보를 짊어지는 것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

늙은 사슴처럼 슬픈 눈을 한 할머니.

절대로 녹을 일이 없을 것만 같던 얼음 동상 같았던 서태후에게도 봄볕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뜻대로 하시지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걸로 되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본론을 꺼내 보거라. 내게 묻고자 허는 게 있다고?”

“예. 그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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