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인재를 발굴하는 법(3)
초겨울의 바람은 매서웠다. 차 안에 있어도 으슬으슬하게 몸이 떨릴 정도로.
차량 뒷좌석에 앉은 철화그룹의 서국철 회장. 그의 주름진 손에 꼭 쥔 지팡이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쿨럭! 쿨럭!”
이제는 습관처럼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 수행비서가 건넨 흰 손수건에는 어느새 붉은 핏자국이 흩뿌려져 있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역시 날이 찰 때는 무리하지 않으시는 편이….”
“되었어! 쓸데없는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냥 그대로 가!”
다급히 운전기사에게 히터를 세게 틀라며 손짓하는 수행비서. 묵직한 기계음이 들리고 나서야 그는 옆으로 눈을 돌렸다.
“크흠….”
펴지지 않는 굽은 등허리. 그늘진 눈가의 노인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금제 펜던트 하나를 손에 꼭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비록 첩의 자식일지언정, 서씨 집안의 혈통을 이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핏줄.
펜던트 속 사진에는 어린 남자아이 한 명이 서국철 회장과 함께 환히 웃고 있었다.
“이봐, 임자.”
“예, 회장님. 하실 말씀이라도?”
몸속 깊은 곳에서 통증이 느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양쪽 눈을 모두 찡그리는 서국철 회장.
“후우… 거, 주치의가 뭐라 그러드나? 저번 건강검진 결과 나온 것 말일세.”
“일전의 수술로 큰 고비는 넘기셨습니다만… 호전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일단 악화되는 것만이라도 늦춰 보자며….”
“허어. 거, 참.”
답답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는 노인.
맨주먹으로 일어나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그였으나, 영원한 젊음은 그 어떤 대가로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 필요 없고, 5년만 버티게 만들어 보라 해. 젊은 놈들처럼 쌩쌩하게 쏘다닐 만큼.”
“회장님?”
“지독한 약을 때려 넣든, 외과 수술로 몸뚱이를 잘랐다 붙였다 하든 상관없다. 그저….”
점점 꺼져만 가는 생명의 기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국철 회장은 마지막 심지를 불태워야만 했다.
모든 것을 물려줄, 그의 아들을 위해서.
“윤석이 녀석 성인 될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이면 된다. 핏줄만, 오로지 서 씨 핏줄에게만 내 철화그룹이 이어질 수 있게끔.”
덜컹, 차량이 주차장 과속방지턱에 걸려 살짝 흔들리자, 그제야 창밖을 바라보는 서국철 회장.
푸르른 언덕 위, 경사진 지붕에 철제 십자가가 올려진, 붉은 벽돌집.
그 앞에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하나가, 이름 모를 수녀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환한 미소를 띠고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자네도 보이지?”
“윤석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눈에 잘 담아 둬라. 저 콩알만 한 녀석이 곧 미래니까. 철화그룹 서씨 집안의 미래.”
흐뭇함과 고집스러움.
두 가지가 한데 뒤섞인 노인의 탁한 목소리가, 뎅그렁거리는 교회 종소리를 배경 삼아 함께 울려 퍼졌다.
“그 탄약그룹 한서준이 놈은 제 홀로 해내야 했다지만, 우리 윤석이 녀석은… 내가 전부 만들어주고 갈 게다.”
* * * *
강남역 인근 SA 그룹 본사 38층.
테헤란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사무실 안.
의자에 앉은 한 남성이 손목시계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영감은. 아니, 장인은 언제 온다고?”
“아까 3시께 출발했다 했으니, 10분 후쯤 도착할 듯합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의 임재호 부회장.
빽빽한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칼 같은 성격. 재계 서열 1위 그룹의 후계자라는 위치.
그런 그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과 같이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 꼴에 서출 딸년 하나 시집보냈다고 유세라도 떠는 건가?”
“기도원에서 있다가 오는 모양입니다, 부회장님. 그 서출 늦둥이 아들이 숨어있다는….”
“아아, 그래. 그거였나.”
피식, 비웃기라도 하듯 코웃음을 치는 임재호 부회장.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모습.
분명 임재호 부회장은 철화그룹에 있어 외부인인 입장임에도, 그 기도원에 얽힌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다릴 가치가 있지. 그 어린 것 덕분에 철화 반도체를 얻게 생겼으니 말이야.”
“서국철 회장도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듯싶습니다. 딸들을 싸움 붙이는 동안 늦둥이 아들에게 상속할 준비를 마치겠다니 말입니다.”
철화그룹 지주사의 지분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는 SA 그룹.
그 막대한 규모는 서국철 회장이 비밀리에 서자 늦둥이 아들의 기반을 마련하기에 충분했다.
탐욕스러운 노인이 철화 반도체를 SA 그룹에 넘길 각오를 할 정도로.
“결국, 그 멍청한 딸년들은 자기들끼리 다투느라 신경조차 쓸 수 없을 것이고요. SA-철화 테크원이라는 미끼만을 바라본 채로….”
마치 흐름을 탄 것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임재호 부회장의 수행비서.
그의 떠벌리는 모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임재호 부회장의 불쾌한 표정이 얼굴에 깃든 후부터는.
“아…! 그, 그게… 그러니까.”
조금 거슬린다는 듯, 한쪽 눈을 움찔거리는 모습.
제 주인의 심기를 곧바로 파악한 그는, 곧바로 머리를 땅에 박을 듯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은 발언을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모님께….”
“되었다. 어차피 상관없는 것이니. 용도가 다하면 금방 내칠 년이고.”
심드렁한 대답을 내뱉고는 장식장으로 향하는 임재호 부회장의 시선.
유리 너머로 보이는, 고대 시대에 만들어진 근동의 토기 인형 문화재.
푹 파인 눈과 엉성하게 붙은 팔다리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은 꼭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몸짓을 취하고 있으나, 정작 제자리에 굳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서윤지의 모습을.
“지금이야 그저 경영 놀이나 하면서 뭐라도 된 듯 나다니고 있지만, 철화 반도체만 손에 들어온다면 그딴 년이야 더는 볼 일도 없을 터.”
더러운 것을 떠올린 것처럼 눈을 찌푸리는 임재호 부회장.
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천박하게 몸뚱이나 놀리고 다니는 쓰레기 같은 년.”
서랍에서 꺼내진 여러 장의 사진. 아내 서윤지와 내연남 김범호가 K 호텔에 출입하는 모습과 야외에서 입맞춤하는 모습까지.
한 장 한 장 사진이 나올 때마다, 임재호 부회장의 관자놀이에 튀어나온 혈관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더 모아둬.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이혼 소송까지 갈 것도 없이, 단번에 이 더러운 년의 모가지를 물어뜯을 수 있도록.”
“예! 아랫것들이 작업하는 데에 일절 실수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은 긴장되는 분위기 속.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여직원 하나.
그녀는 철화그룹의 서국철 회장이 온 것을 알리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난 임재호 부회장.
“산송장이 행차하셨군. 당분간 죽어서는 안 되는 영감탱이가.”
이윽고, 문이 열리기 무섭게 순식간에 바뀌는 그의 표정.
양팔을 활짝 벌린 임재호 부회장은 사람 좋은 사위를 연기하며 마음에도 없는 장인을 반겼다.
“오셨습니까. 장인어른.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거 최소한의 격식은 차려 주니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구먼.”
지팡이를 짚은 채, 거친 목소리로 거짓 환대에 대답하는 서국철 회장.
날카로운 뼛조각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어서 빨리 이 가짜 가족 관계를 끊어버릴 날이 왔으면 하네. 아니 그런가?”
“물론이지요. 이 너저분한 소꿉놀이가 불편하다는 점은 저도 동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서로 간의 이해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가족 관계.
메마른 노인의 등허리에 손을 얹은 임재호 부회장이 그 관계만큼이나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앞으로 5년간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만큼은 장인어른이신 서국철 회장님.”
* * * *
경기도 고양시 탄약 전자 미래사업부 연구소 인근 모 종합병원 특실.
내 앞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노란 머리의 뚱뚱한 프랑스인 남자. 침대 머리맡에 붙은 환자 인식표로 보아 그의 이름은 ‘미셸 푸코’인 듯했다.
이윽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의료진들.
“미셸 수석연구원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은 겁니까?”
“아아, 계단을 구르면서 온몸에 타박상이 좀 있기는 합니다만, 일단 MRI 검사상 뇌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기다리면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는 말과 함께 회진을 마친 의료진.
그나마 다행인 상황.
그러나… 기가 차고 화가 나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김원철 아저씨에게 말했다.
“김 비서실장님.”
“예,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주변에 보는 이가 있어 말을 높이는 김원철 아저씨.
이미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듯,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이택규 사장. 지금 어디 있습니까?”
“외부 일정이 있다고 용인 내려갔답니다. 골프 치러요.”
골프, 골프라.
참 팔자도 좋다. 아니면 단단히 미쳤거나.
“하아, 그러면… 이 사건, 인지하고는 있고요?”
“탄약 전자 쪽 보고 라인은 작동했는데, 들어보니 별 시답지 않은 일로 부르지 말라 하더군요.”
“그러니까… 교육을 빙자한 가혹 행위 도중 직원이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이게 시답지 않은 일이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철제 침대 난간을 우그러트리기라도 하듯 꽉 잡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내 표정이 안 좋기는 어지간히 안 좋은 모양이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이내 병실 바깥으로 나간 수행원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이택규 사장. 당장 해임합시다. 이건 도저히 고쳐 쓸 수도 없어.”
“아이고, 우리 회장님아. 그 일단 분노 좀 가라앉히고… 지금 이택규 사장을 갈아치워도 대체재가 없걸랑.”
두 사람만이, 정확히는 혼수상태의 미셸 수석연구원과 함께 세 사람만이 남게 되자 다시 말을 편히 하는 김원철 아저씨.
내 손을 꼭 잡은 아저씨는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밑에 상무급들까지 자기 라인으로만 채워 놓아서, 내부에서 누굴 올려도 답이 없어야. 이택규 2호기, 이택규 3호기꼴이 날 것이여.”
“하아, 대안은 없습니까? 외부 인사를 스카웃한다든지 하는.”
“동종업계 외부 인사 영입… 요즘 같은 때에는 불가능하고. 차라리 컨설팅 쪽에서라도 사장 역할을 맡을 사람을 찾아서 하는 편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IT 업계.
그렇기에 컨설팅 출신을 쓴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찌푸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김원철 아저씨의 대안을 승낙하려는 그 순간. 갑자기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외국 억양이 섞인 묘한 한국말.
“그, 그 역할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미셸 수석연구원?”
언제 깨어난 건지, 아예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미셸.
막 혼수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내뿜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끄응… 예전부터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탄약 전자. 저한테 한번 맡겨 주십시오. 변화를 넘어 혁신을 만들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