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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69화 (69/300)

69화인재를 발굴하는 법(4)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텅 빈 회장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극소수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가 퇴근한 야심한 밤.

철제 캐비닛에서 꺼내진 한 남성의 인사 파일.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세심한 눈으로, 모든 내용을 검토했다.

“미셸 푸코 수석연구원… 업계 경력 21년에, 탄약그룹에서 10년 동안 근무라.”

뿔테 안경에 뭔가 착하게 생긴, 전형적인 공돌이 관상의 뚱뚱한 40대 백인 남성.

그러나 순둥순둥해 보이는 그 외모와는 달리, 생각보다 강단이 있는 이 남자.

오늘 낮, 병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채로, 그는 자신이 겪어온 경험을 통해 앞으로 그려 나갈 미래를 즉석에서 이야기했다.

‘일단… 군대 물부터 빼야 할 겁니다. 수직적인 직급부터 최대한 간결하게 바꿔야 하고요.’

노란 머리칼에 푸른 눈. 붉은 기가 도는 허여멀건한 피부색.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모와는 달리, 유창한 한국어로 나를 설득했던 미셸 푸코.

그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다.

‘프로젝트별 팀 조직을 그때그때 만들어 유연한 인력 관리를 하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모 회계법인이 이런 식의 근무를 처음 도입해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들이닥친 놀라운 감정.

평소 내가 김원철 아저씨와 함께 상의했던 내용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미셸 푸코 수석연구원.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어눌한 발음으로 말할지언정, 그 안에 담긴 것은 확신 그 자체였다.

‘아예 관리자는 딱 관리자 트랙만 정해서 가게 하는 방식으로요. 실무진으로 남을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 현업에서 뛸 수 있게끔….’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조직문화. 탄약 전자 소속 임원 그 누구도 먼저 말한 적 없는 개념들.

탁,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감과 함께, 검은색 바깥 커버가 덮인 인사 기록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모든 것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복기가 가리킨 결론은… 단 하나의 방향만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모든 낡은 것을 새롭게 개혁할, 혁신으로의 방향을.

* * * *

“같이 갑시다.”

“……!”

사흘 후.

다시 찾은 미래사업부 연구소.

갑작스러운 수락에 긴장했는지 자리에 선 채 얼어붙은 미셸 수석연구원.

나는 잔털이 수북한 그의 손등을 양손으로 와락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잡아 쥐었다.

“미셸 수석연구원께서 보여 주신 인사이트. 탄약 전자 전체에 적용해보고 싶습니다. 분명 할 수 있을 거고요. 저와 같이 가 봅시다.”

“어… 회장님? 그, 너무 갑작스러워서…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왜요? 변화를 넘어 혁신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은 미셸 수석연구원이 먼저 말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

생각이 많아 보이는 미셸 수석연구원. 무언가 말할 것을 고민하는 듯, 입가에 주름이 잡힌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저 꽉 잡은 손에 묵직한 힘을 준 채로, 아래로 쳐진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그리고… 혁신을 꿈꾸던 남자에게서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그날 이후 짐을 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탄약그룹 내에서 제 의견이 먹히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퇴원 후, 탄약 전자 본사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고. 조용히 넘어가지 않으면 인생이 피곤해질 거라며.”

어처구니없던 소위 ‘탄약 교육대’ 사건 이후, 내가 이택규 사장에게 내린 임시 처분은 근신 및 재발 방지였다.

그러나 어느 하나 제대로 지켜지기는커녕, 협박과 회유를 통해 모든 잘못을 은폐하려는 그의 모습.

나는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힌 채,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어진 미셸 선임연구원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이 집단은 도저히 답이 없다는 것을요. 원래는 오늘 이걸 꺼내려고 했습니다만.”

체크무늬 난방 위에 아무렇게나 덮어쓴 실험용 가운.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간 미셸 수석연구원이 흰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사직서입니다. 오후 업무가 끝나는 대로 위쪽에 올리려 했습니다.”

“후우, 일단… 그거 이리 주시겠습니까?”

낚아채듯 반쯤 강제로 사직서를 빼앗은 나. 힘이 잔뜩 들어간 왼손에 쥐어진 흰 봉투가 금세 우그러지는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같이 갑시다.”

“어제 잘난 듯이 말씀드렸지만… 제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번 건으로 확연히 느꼈어요. 탄약 전자 내부에 벽처럼 쌓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고작 사흘 동안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치 사채를 독촉당하듯 미셸 수석연구원을 향해 쏟아졌던 전화 폭탄.

그 압박은 상상 이상으로 악랄했다.

자신뿐만이 아닌, 한국에 체류 중인 가족들의 신분 문제까지 들먹이며 행해졌던 협박.

조직적인 이지메에 가까운 이 행태에 그는 염증을 느낄 대로 느낀 모양이었다.

“저는… 조직 내부의 더러운 싸움은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냥 생각만 많은 기술자일 뿐입니다.”

“그럼 내가 그 더러운 진흙탕에서 대신 싸워 주면 되겠네요.”

“회장… 님?”

파열음과 함께 봉투째로 찢긴 사직서.

머리 위로 흩날린 흰 종잇조각이 눈꽃처럼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칼질은 내가 하겠습니다.”

내 의중에 부합하는, 통찰력을 가진 인재.

그런 사람 앞에 가시밭길이 깔려있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큼지막한 몽둥이를 들고, 삐죽삐죽 돋아난 못난 가시들을 모조리 두들겨 패 없애버리는 것.

“위쪽 우두머리들의 머리통을 모조리 날리고, 아래쪽 실무급들을 만신창이로 만들면 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회, 회장님….”

“격변하는 물결에 다시는 저항할 생각일랑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밟아서 말입니다.”

다시 미셸 수석연구원을 향해 내민 손.

당황해하는 모습이 온몸에 서린 그를 향해, 결의에 찬 내가 굵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만신창이가 된 패잔병들을 휘어잡는 것은 할 수 있을 겁니다. 피는 내 손에 묻힐 테니… 당신은 그저 시체 더미 위에서 능력을 입증해주길 바랍니다.”

* * * *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요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챙이 긴, 빨간 모자를 쓴 나.

군 복무 시절, 저 유격 모자를 쓴 사람만 보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건만. 내가 이걸 쓰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정말 꿈에서도 몰랐다.

“와, 그래서. 진짜 이렇게 하려고? 직접? 미치겠다, 진짜. 흐흐흐흐.”

감자칩을 우걱거리며, 웃음을 참을 생각일랑 일절 없는 김원철 아저씨.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아예 철제 요대까지 건네주는 모습에 나는 해탈한 듯이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겠습니까. 몽둥이질은 제가 직접 한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요.”

머리 아래로 내려간 시선.

거울에 비친 내 몸에는 퀴퀴한 예비군복이 걸쳐져 있었다. 군화까지 세트로 맞춘, 국방색 얼룩무늬가.

“이택규 사장이야 미셸이 오니 바로 모가지를 날릴 수 있었지만, 밑에 임원급들은 좀 달라서요.”

“하긴, 자기네들 산하기관에 있던 사람이, 그것도 외국인이 대가리라면 무조건 반발할 테니까.”

오로지 곤조 하나로 똘똘 뭉친 탄약 전자의 이택규 사단.

이택규 사장을 날렸다 한들, 기선 제압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 개혁에 반기를 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

결국, 당장 필요한 것은 오로지 몽둥이질뿐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의.

“읏차. 다 됐네요. 어떻게, 같이 참가하시겠습니까? 왕년에 특전사 갔다 오셨다는 분이, 찐하게 한번 뛰어 보시죠.”

군화 끈을 질끈 동여매며,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아 아무런 말을 던진 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김원철 아저씨가 손사래를 쳤다.

“흐흐흐. 내가 미쳤수? 거길 또 기어들어 가게.”

“그럴 거 같았습니다. 아무튼… 전 고생하고 올 테니, 나머지 필요한 부분은 알아서 마무리해주십시오.”

오랜만에 덕지덕지 바른 위장 크림.

거울 속, 시커먼 위장을 한 얼굴 안쪽으로 동그란 눈알 두 개가 참 무섭게도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집어 든, 어른 팔뚝 길이만 한 떡갈나무 몽둥이 하나.

표면에 니스를 칠해 반들반들해진 몽둥이를 전깃불에 비춰보며, 나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탄약 전자 임원들에 대한 참교육의 시간이 있을 거니까요.”

* * * *

-삐익! 삑! 삑! 삑!

“뛰어! 뛰어! 뛰어! 뛰어! 뛰라고! 뛰어!”

탄약 인재 개발원 대운동장.

금속 호루라기 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울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지치지도 않는 모양인지, 악다구니를 쓰는 것만 같은 거친 함성.

탄약 전자의 이택규 사단에 속한 임원들은 혀를 길게 내뺀 강아지처럼 헉헉거리며 연신 잔디밭을 뛰고 있었다.

“으헉… 으허헣… 하흐, 아흐. 진짜, 진짜 더는 못 뛰어.”

“아, 선배. 좀만 더 버텨봐요, 진짜. 저거, 저거… 신임 회장.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 아닌 것 같으니까.”

맨 앞에서 탄약그룹 깃발을 들고 질주하는 젊은 회장의 모습.

심지어 어깨에 멘 군용 더플백에는 탄약 전자에서 생산된 불량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쌀가마니 하나의 무게만큼.

“여러분이 그렇게 좋아 죽는 정신교육! 본 회장이 직접 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없… 습니다!”

사내 부조리 및 가혹 행위로 하루아침에 해임당한 이택규 사장.

우두머리를 잃은 탄약 전자 임원들이었으나, 그들은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누가 사장으로 온들, 실무진을 휘어잡은 자신들을 내칠 수는 없다고.

그리고, 잠시 숙였던 고개는 태풍이 지나가면 다시 빳빳하게 세울 수 있다고.

그러나 지금. 그들이 세워야 하는 것은, 비단 고개뿐만이 아니었다.

“고개 세운 상태에서 다리 45도 유지합니다! 거기, 송 상무! 다리 똑바로 듭니다!”

“끄허어억…!”

PT 8번. 온몸 비틀기.

철제 전투모를 쓴 상태에서 행해지는 고난의 유격 체조.

나이 지긋한 임원진들을 상대로 있을 수도 없는, 교육을 빙자한 훈육에 가까운 행위였으나, 그들은 반론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즐겨 사용했던, 군대식 교육을 이 미치광이 회장이 함께하고 있기에.

하늘 위로 뻗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때가 되자, 곧바로 하달되는 명령.

“자세 똑바로 합니다! 자, 하나에 탄약을, 둘에 개혁하자. 하나!”

“탄약을!”

“둘!”

“개…혁하자! 흐억!”

눈 흰자를 보이며 탈진한 임원들.

온몸의 근육이 동서남북으로 울부짖는 그 자리에서, 떡갈나무 몽둥이를 꺼내든 미치광이 회장.

힘이 빠져 내려가는 다리를 손수 몽둥이로 올려주면서, 그가 대성박력의 목소리로 외쳤다.

“신임 탄약 전자 사장에 미셸 푸코 미래사업부 수석연구원을 보합니다. 알겠습니까!”

“……!”

마침내 올 것이 왔다며 눈을 질끈 감는 이택규 사단.

자신들이 한 짓을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중인 그들은 이 정신 나간. 아니, 정신 나간 모습을 연출하는 회장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챘다.

묘해진 분위기. 핑그르르 굴러가는 눈동자.

그러나 이미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거 봐라? 대답이 없어?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악다구니를 쓰는 회장.

시커먼 위장 크림 안쪽에 지어진 표정은 살기등등했다.

그리고 마침내, 땅바닥으로 내려가는 그들의 군홧발이 다시 떡갈나무 몽둥이로 인해 올라가자 마지못해 나오는 대답.

“알겠… 습니다!”

세계 1위 기업, 탄약그룹의 중추 역할을 맡은 탄약 전자의 개혁.

훗날 호사가들에 의해 회자되는 그 시작은, 떡갈나무 몽둥이로부터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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