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70화 (70/300)

70화인재를 발굴하는 법(5)

“크흐… 우리 빨간 모자 회장님의 육성이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는다니까. 하나에 탄약을! 둘에 개혁하자!”

“하아, 그거 진짜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한 거라니까요.”

보고하러 온 건지 사람 속을 긁으러 온 건지, 특유의 얄미운 표정과 함께 내 앞에 선 김원철 아저씨.

하필 보고서 커버에 그려진 탄약그룹 로고도 빨간색의 불꽃 모양이다.

만년필을 꺼내 아무렇게나 서명을 마친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유사 훈련소 놀이, 두 번은 안 합니다. 아마 탄약그룹 역사상 마지막으로 적힐 겁니다.”

“어지간히 신경 쓰이긴 했나 보네. 밑에 직원들은 또 시원하다는 반응이드만.”

워낙에 기업 문화가 군대식이기로 유명한 탄약그룹.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부조리가 심각하다는 탄약 전자.

그날 이후, 직장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상상 이상의 반응이 일었다.

-탄약그룹 신임 회장. 군대 문화 때려잡겠다고 탄약 전자 임원들한테 ‘너도 한번 해봐라!’ 했다던데. 찐또배기 군대식으로.

-아, 회장 본인이 40kg 완전군장 메고 앞에서 뛰어다니는데 꼰대 임원들이 별수 있겠냐 이거야.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대체로 시원시원하다는 반응.

특히나, 닉네임 앞에 탄약그룹 딱지를 달고 있는 사우들은, 숫제 압제자를 짓밟고 해방의 물결을 가져다준 메시아 취급이었다.

-탄약 전자 다니는데, 진짜 이 택규 전 사장 따까리 했던 임원들, 회장님한테 겸손 주입 당하고 사람이 차분해졌음. 좀 살맛 난다.

-현직 탄약 연수원 직원이다. 그날은 전설이었다…. 이택규 따라서 미치광이 코스프레했던 임원들, ‘진짜 광기’ 앞에서 전부 순한 양으로 변함.

생각보다 괜찮은 반응에 절로 웃음이 입에 걸린 나.

물론 내가 ‘진짜 광기’라는 정체불명의 타이틀을 왜 얻은 건지는 끝끝내 이해는 안 갔다만.

“흐흐흐. 말 안 통하는 임원들 상대로 이 방식 가끔 쓰는 것도 제법 괜찮다 싶고. 안 그랴?”

“다시는 안 쓸 겁니다. 그런 식의 필요악을 남발하면 저도 이택규 전 사장과 다를 게 없어지니까요. 그나저나….”

펄럭, 하도 두꺼워 책처럼 쌓인 보고서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듯 넘기다 보니 따로 표시해 둔 페이지가 나타났다.

정부 관청의 공문 사본과 함께 붉은 글씨로 표시된 그 문서.

노동청에서 발송된 진정서였다.

“노동청에서 먼저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이택규 전 사장이 워낙 패악질을 부렸어야지. 탈주 닌자… 아니, 퇴사한 젊은 직원들 몇몇이 같이 한 모양이야.”

이택규 전 사장은 단순 해임으로만 끝나지 않을 팔자였던 모양이다.

새벽 구보, 설악산 등반, 원탁의 기사와 같은 기행. 여기에 현장 불시 점검이라는 미명 하에 저질러진 폭언과 욕설, 모욕들.

그 업보는 결국, 이렇게 하나가 되어 이택규 전 사장 뒤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탈주 닌자들의 사내 괴롭힘이라는 표창이 되어서.

“굳이 덮으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룹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이 가지 않게 하시죠. 보상이나 사과 같은 부분까지 확실하게.”

“안 그래도 미셸 사장이 이야기하드만. 탈주자뿐만 아니라 기존 직원들 불만 쌓인 것부터 후딱 풀어야 한다고.”

“음….”

거한 칼춤이 끝난, 기존 탄약 전자 이택규 사단의 피로 물든 벌건 돗자리.

내가 깔아준 그 판 위에서, 미셸 사장은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별 팀 같은 실험적인 조직 구성, 주 1회 재택근무, CIC(사내독립기업).

파격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어옴과 함께, 혁신의 씨앗은 그렇게 조금씩 뿌려지고 있었다.

“미래사업부 내에서 실험적으로 행해졌던 조직문화, 탄약 전자 전체에 적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여.”

“그룹 본부 특별예산 일부를 할당하는 식으로 갈 테니 최대한 서둘러 달라고 말해주세요. 그런데 이건….”

보고서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마치 턱에 걸린 승용차처럼 순간적으로 멈춘 내 시선.

언짢음과 기시감, 묘한 불쾌함과 함께 내 직관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직 내가 채 인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급한 불은 끈 걸로 알고 있는데, 전자 쪽 핵심 인재들 대상으로 퇴사율이 확 튀었네요?”

갑작스레 퇴직한 탄약 전자의 연구원들.

분명 동종업계 이직 금지 조항이 걸려있기에, 마땅히 옮길 곳도 없는 상황. 지표가 보이는 비정상적인 모습은 내게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음, 사실 그것 때문에 좀 이래저래 알아보았는데 말이지. 퇴사한 인원들 최종 행선지가 결국 한곳으로 수렴하더라구.”

“한곳?”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자국 옆으로 이동한 김원철 아저씨.

그와 동시에, 바닥 위에 놓인 큼지막한 나무 지구본이 축을 따라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힘을 다하자, 점점 잦아드는 회전.

마침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멈춘 지구본 위에는, 투박한 손가락이 놓인 채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는….”

고개를 끄덕이는 김원철 아저씨.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지명은… 그들, <상하이 캐피탈>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전선을 정비했음을 의미했다.

“중국, 광저우 IT 산업단지. 그것도… 상하이를 경유해서.”

* * * *

광저우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에 있는 마카오.

이곳 중심지의 한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는 젊은 두 남녀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불 속에 들어가, 좀처럼 나올 생각을 않는 서윤지와 김범호.

벌겋게 술에 취한 채,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은 창문 너머 마카오의 야경을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좋냐? 하여간, 김범호.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흐흐흐. 당연하지. 역시 오길 잘했어. 서윤지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더니.”

능글맞은 웃음을 지은 채, 경박한 언사를 날리는 김범호.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검은색 서류 가방 하나를 꺼내어 자물쇠를 풀었다.

딸깍, 금속음과 함께 그의 눈에 들어온 초록색 달러 지폐 뭉치들.

마치 장난감을 선물받은 어린아이처럼, 김범호가 양팔을 하늘 위로 올리며 소리쳤다.

“휴가지는 마카오. 마카오는 카지노. 그럼 카지노는 뭐다? 흐흐흐. 꽁돈이다!”

“애도 아니고. 아주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 봐라.”

입 밖으로 내뱉은 언사와는 달리, 그런 한심한 모습이 꼭 싫지만은 않은 듯한 서윤지.

그녀는 내연남의 등을 발끝으로 콕콕 누르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적당히 땄으니까, 내일은 괜히 알거지 되지 말고 알아서 관광이나 다녀. 얌전히 여기 처박혀 있던지. 난 일정 있다고 말했지?”

“아, 그랬었지.”

공식적으로는 출장의 형식을 하고 온 마카오 유희.

최근, 자꾸 미행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붙은 것은 느낀 서윤지. 그렇기에 한동안 여의도 K 호텔에서의 밀회가 힘들어졌던 상황.

결국, 이렇게 회사 일을 핑계로 해외에 나가야만 했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 회사 일 또한 중한 것이었고.

“하여간, 쓸데없이 바쁜 여인네여. 근데 무슨 일정이라 했드라?”

“탄약그룹 출신 연구원들 중국 입국했다 했잖아. 그만큼 공들이고 돈 들여놓았으니, 최대한 빨리 써먹어야지 않겠어?”

일 이야기가 나오자 머리가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관자놀이를 매만진 채, 방 한가운데 놓인 월풀 욕조로 들어간 서윤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김범호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입을 열었다.

“나처럼 적당히 한량으로 사는 선택지도 있는 것인디. 원래 첩 자식은 내일이 없걸랑.”

김범호의 말을 듣자 물에 젖은 몸 그대로 욕조에서 나오는 서윤지.

느릿한 걸음으로 침대맡으로 간 그녀는 샤워 가운 차림의 김범호를 잡고서 다시 욕조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 한심한 범호.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어우야. 이렇게 대놓고 다가와 주면 계속 정신 못 차리지.”

풍덩, 대리석 바닥 위로 물이 튀는 소리와 함께 욕조 안에서 포개진 두 사람.

아래쪽에 들어앉아, 배 위에 올라간 김범호를 끌어안은 서윤지.

서로의 콧대가 맞닿자 그녀는 김범호의 윗입술을 살짝 깨물듯이 스치고는 말했다.

“첩 자식이 내일이 없는 건 야심이 없어서 그런 거야. 너처럼.”

“흐흐흐. 그럼 여기엔 아주 야심으로 드글거리고?”

그런 그녀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만지작거리는 김범호.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은 서윤지는 양팔로 깍지를 끼고는 곧바로 물속에 그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우웁! 읍! 야, 서윤지, 너…!”

“탯줄 잘 타고 내려온 무능한 언니 년들. 아직 오줌 싸는 법도 모르는 핏덩이 남동생. 이래도 못 먹으면 나도 똑같은 머저리 년이지. 안 그래?”

물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버둥거리는 김범호.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서윤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언젠가는… 철화그룹 서씨 집안의 허울뿐인 소꿉놀이를 끝내게 된다면, 그녀가 그토록 증오하는 가족들의 머리통을 절망이라는 물속에 집어넣을 터.

그때도 분명,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희망 없는 발버둥을 칠 것이다. 숨도 똑바로 쉬지 못한 채로, 온몸을 허우적거리며.

“푸하! 아, 진짜. 코에 물 들어갔어….”

“멍청한 티 그만 내고 빨리 나오기나 해. 슬슬 배고프거든. 룸서비스 안 부르고, 그냥 내려가서 먹을 거야.”

온몸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낸 채, 구시렁거리며 옷을 입는 김범호.

드라이기로 머리칼을 말리던 그가 지나가듯 말 하나를 툭 던졌다.

“근데, 그 탄약 전자 연구소 출신 애들 말이야. 중국 유령 회사에 위장 취업시킨 거지? 동종업계 재취업 금지 조항 피하게 하려고.”

“그렇지. 그건 왜?”

“흐흐흐. 혹시 그 중국 유령 회사 말이야. 어디가 실소유주인지 알아? 너랑 같이 협업하는 그쪽.”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떠보듯 내뱉은 한마디.

그러나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는 내연녀의 눈빛에, 그는 무언가 찔린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흠칫, 양어깨 사이로 머리통을 집어넣는 김범호.

“아, 아, 주식 안 넣어! 나 못 믿어? 그거 넣을 돈도 요새 없어 죽겠구만.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것이여. 정말로.”

“하여튼 생각하는 거라고는… 주식 넣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범호 네가 아예 손도 못 쓸 곳이니까.”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던 서윤지.

움츠러드는 내연남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던 모양이다. 가벼운 코웃음을 친 그녀가 립스틱 뚜껑을 닫고는 그의 품에 안겼다.

“잘 들어 김범호.”

“엉. 알았어. 나 사고 안 친다니까?”

김범호의 목덜미에 진한 핑크빛의 키스 자국을 남긴 서윤지.

끈적거리는 입술을 떼며 그녀가 말했다. 섬찟한 웃음과 함께.

“위험한 놈들이니까 괜히 엮이려 들지 마. <상하이 캐피탈>, 그놈들… 아주 한서준이 한테 칼을 갈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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