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폭풍이 불기 전, 조용한 순간(2)
완연한 겨울.
후, 하고 입김을 불면 그 자리에서 하얗게 얼어버릴 것만 같은 강추위의 12월.
회장실 한쪽을 장식한,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유세나 보좌관의 취향이 담긴 크리스마스트리.
뾰족한 침엽수 맨 끝에 달린 황금색 별 모양 장식품. 거기에는 미셸 탄약 전자 사장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이상으로 탄약 전자 개혁 현안에 대한 보고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미셸 사장은 정말 수고가 많았으니까.
조직문화 개편부터 인적 자원 물색, 진행 중인 사업에 대한 전면 재검토까지.
내 앞에 선 뚱뚱한 남자는 최근 두어 달 새 폭삭 늙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만년필을 꺼내어 서명을 마친 나는 그런 그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고생 많았습니다. 일단 개혁안은 이대로 계속 가시죠. 그런데 추가로 보고할 사항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도 보안을 요하는.”
“아, 예. 일단….”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뒤를 돌아보는 미셸 사장.
상당히 중차대한 것인지, 옆에서 사무를 보던 유세나 보좌관에게도 자리를 비워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적막감만이 흐르는 집무실 안.
그는 허리춤에 끼고 있던 또 다른 결재판 하나를 내게 건네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얼마 전… 저희 쪽에서 파견 간 감찰팀 인원으로부터, 마음에 걸리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내 눈에 들어온, 결재판에 끼워진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거나하게 취해 고주망태가 된 이택규 전 사장. 그리고 그와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어디론가 다른 술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신원 미상의 남성.
미간에 주름이 잡히기도 전에 미셸 사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여기 이택규 전 사장과 함께 있는 이가 백덕규라는 자인데, 현직 헤드헌터입니다. 중국 광저우 쪽에서 주로 활동하는.”
“중국, 중국이라. 그것도 광저우….”
내 머릿속 기억 창고에서 순간적으로 생각난 장면 하나.
얼마 전, 이 방에서 목제 지구본을 돌리던 김원철 아저씨의 모습.
마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그때의 기억은 영화 필름처럼 하나하나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핑그르르 돌아가던 지구본이 멈추자, 손가락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곤란하다는 듯 내뱉었던 그 말 한마디.
‘음, 사실 그것 때문에 좀 이래저래 알아보았는데 말이지. 퇴사한 인원들 최종 행선지가 결국 한 곳으로 수렴하더라구.’
모든 정황이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방향.
그곳은 바로.
‘중국, 광저우 IT 산업단지. 그것도… 상하이를 경유해서.’
“광저우… 그리고 상하이.”
이제까지 막연히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불쾌함과 찝찝함이라는 감정들.
그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형태를 갖추어 내 목을 감싸 안은 채 손아귀 한가득 힘을 주고 있었다.
서서히 질식되는 줄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가 너무 안이했었나 보군.”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 퇴사자로 인해 인력 부족에 따른 문제가 있습니까?”
쉬이 답할 사안은 아닌지, 고민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는 미셸 사장.
똑딱거리는 시곗바늘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울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당장 시급한 것이…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입찰 건입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이지요.”
“안 그래도 SA-철화 테크윈에 비해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번 핵심 인력 이직으로 그 공백이 더 커졌습니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땅바닥을 스멀스멀 기어 다가온 외부의 경쟁자들. SA-철화 테크윈의 서윤지, 그리고 <상하이 캐피탈>.
발목을 잡힌 듯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손은 어느새 모래밭 안쪽에서 솟아올라 내 한쪽 발을 잡고 있었다.
“조금… 호승심이 올라오네요. 이번 건, 반드시 이겨야겠습니다.”
숙부와의 갈등 이후, 다시 새롭게 불붙은 투지. 나는 잡혀 있는 줄도 몰랐던 발 한 짝을 거칠게 털어냈다.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뒷걸음치는 미셸 사장. 이를 잔뜩 앙다문 채, 오른손 주먹을 꽉 쥔 모습이 조금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건, 세부 내역 곧바로 올리라고 하시겠습니까? 그, 별지에 붙어있는 심사 점수표 부분.”
* * * *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올라온 옌룽은 여유를 가질 만한 시간도 없이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늘 그렇듯, 집무실 가죽 소파에 누워 동북아시아 지도가 조각된 나무 문양만을 바라보는 그의 주군, 제임스 왕 이사.
그는 제 수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을 끝마친 김에 짓궂은 장난을 친 모양이구나, 옌룽.”
“힘과 정보의 우위를 알려주기에는 다소 거친 방법을 써도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SA 그룹의 임재호 부회장과 SA-철화 테크윈의 서윤지 대표이사.
광저우에서 있었던 불편한 만남은 옌룽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가 있던 것이었다.
“또한, 양측이 합심하지 못하게 먼저 갈라 두어야, 저희 쪽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가짜 소꿉장난일지라도 부부의 연이 거슬렸던 모양이군.”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은 것인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제임스 왕 이사.
고개를 숙인 옌룽을 향해 다가간 그가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탄약그룹에 대한 견제 자체는 계속해나가되,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안으로만 갈 것.”
“주군. 허나, 저번 일로 저희 상하이방의 위신이…!”
“그만.”
거친 외모와 탁한 목소리와는 달리 부드러운 어투를 유지하던 제임스 왕 이사.
그러나 평소와 달리,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유독 피곤함과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이제 차기 권력을 논할 때가 되었다. 당분간 최대한 힘을 비축해야 할 터.”
“그렇다면… 지난주 베이징에 가셨던 이유가 혹시….”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는 제임스 왕 이사.
의자에 앉은 채, 몸을 깊게 묻은 그는 눈을 감고 한참을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 바깥으로 새어 나온 잠정적인 결론.
“지금처럼 유령회사를 통한 우회로를 마련하는 등의 행위는 계속하되, 거액의 자본이 들어갈 일은 자제하도록.”
그의 시선은 다시금 천장을 향했다. 광활한 중원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자그마한 반도 하나.
꼭 대륙을 향해 날을 세운 비수 같은 그 생김새에, 제임스 왕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1년. 1년 후, 새로이 자금성의 주인이 될 자가 정해지면… 그때 본격적으로 움직이도록 하겠다.”
* * * *
“읏샤! 나이스 샷. 히야, 좋다!”
회장 집무실에 찾아온 김원철 아저씨.
꼭 새로운 게 생기면 한번 만져 보고 싶은 모양이다.
선물로 들어온 실내용 골프 연습대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세로 스윙 흉내를 내는 아저씨.
나도 골프를 그다지 즐겨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저 자세는 객관적으로 봐도 영 아니올시다였다.
“개판인데요.”
“어딜 봐서.”
“모든 점에서요. 그 자세 그대로 필드 나가셨다가는 그날 술값은 무조건 비서실장님이 내게 생겼네요. 양심적으로 안 그렇겠습니까?”
“몰러. 흐흐흐. 사실 한 번도 안 쳐봤걸랑.”
살아생전 골프 따위 친 적 없다는 김원철 아저씨.
하긴 단거리에나 쓸 퍼터를 장거리용 드라이버처럼 휘두르는 걸 보았을 때, 골프 문외한 티가 나긴 했다.
“쓸데없이 남의 잔디밭 위에서 쇠막대기 휘두를 바에야, 차라리 낚시나 하러 가지.”
“물고기 낚는 것보다 사업 낚는 건 훨씬 재밌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십니까, 그 심사 점수표?”
“아아, 이거?”
국방부 신무기 사업 입찰 건에 대한 세부 심사 점수표.
별지만 300페이지에 달하는 그 문서에는 항목별로 세세한 기준점이 적혀 있었다.
업체가 보유한 전문인력, 기술력, 산업시설, 그리고 단가까지.
촘촘하게 짜인 면직물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이 종횡으로 얽힌 점수표. 그러나, 나나 김원철 아저씨 두 사람에게는 오로지 그 위에 올라간 시커먼 얼룩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뻔하지?”
“뻔하죠.”
골프 백에서 우드 골프채 하나를 꺼내든 나.
허리에 힘을 준 채 자세를 바로잡고 힘껏 회전하자, 이내 허공을 가른 듯 들려오는 시원한 바람 소리.
마치 지팡이를 짚듯, 골프채로 바닥을 디딘 나와 김원철 아저씨는,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같은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산업시설.”
“산업시설.”
단거리용 퍼터로 골프채를 바꿔 든 나.
금속 면에 맞닿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연습대 끝 쪽 구멍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골프공.
다른 들어갈 만한 곳이라고는 오로지 그곳 하나뿐이었다.
“싹 다 뒤져 보고 검토했는데, 답 나오는 게 산업시설 그거 하납니다. 전문인력, 기술력, 단가. 셋 다 방법이 없더라고요.”
“전문인력이야 중국산 탈주 닌자로 전직하셨고, 기술력이랑 단가는 거기서 거기여. 토탈 점수 따져보면 비슷할 겨.”
그나마 다행인 것은 SA-철화 테크윈 또한 상황이 비슷하다는 점.
갓 만들어진 신설 법인이기에, 양쪽 모기업에서 지원받고 있음에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산업시설을 어떻게 증설하느냐인데… 우리 회장님도 알다시피 구미 화약 공장 재건은 시간이 1년쯤 걸리걸랑.”
“당장 없으면 사 와야죠. 당장 금전적인 부분은 걱정할 것은 없으니까요. 문제는.”
골프채를 거꾸로 쥔 채, 쪼그려 앉은 김원철 아저씨.
마치 낚싯대를 쥔 채로 물고기와 힘겨루기를 하는 듯한 모습.
양평에서 물고기는 그렇게 많았건만, 지금 내가 원하는 물고기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이 상황을 행위예술로 표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시장에 대어가 없지.”
“없기야 하죠.”
“요즘 같은 시기에, 그런 대규모 IT 쪽 산업시설을 누가 풀겄어.”
맞다. 맞는 말이다.
좀처럼 매물로 나오지 않는 산업시설.
당장의 뼈아픈 손실을 껴안을지언정, 미래의 텃밭을 파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기업을 통째로 판다면 또 모를까.
마치, 예전 회귀 전 그때처럼.
“조만간 나오긴 나올 겁니다. 제 기억엔 아마 이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니까요.”
“이때…쯤? 그건 또 뭔 뜬구름 잡는 소리여?”
저번 전경련 회의에서 있었던 서윤지의 도발. 그리고 SA그룹 임재호 부회장과의 결혼.
기억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분명히 뇌리에 떠올랐던 사실.
저 집구석. 콩가루다. 그것도 아주 막장으로.
그리고 그 콩가루 집안에 본격적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였던 것이 바로…
“철화 반도체.”
“철화 반도체? 서국철 회장 그 혹부리 영감이 그걸 내놓는다고?”
내가 세운 계산식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모습의 김원철 아저씨.
당연한 반응이다. 아직… 그 누구도 저 콩가루 집안의 소꿉놀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아저씨가 거꾸로 쥔 골프채 끄트머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고래는 가끔 수면 위로 물을 내뿜으러 나오거든요. 거대한 등허리를 활처럼 튕기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곧바로 잔뜩 힘이 들어간 손.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골프채를 움켜쥔 나는 마치 작살이라도 잡은 양, 사냥꾼과 같은 얼굴이 되었다.
단 한 번의 순간을 결코 놓치는 일 없이, 대왕고래의 숨통을 끊어 놓을 사냥꾼이.
“곧바로 머리끝을 향해 작살을 던질 겁니다. 절대 빠질 일이 없는 견고한 작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