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철화 반도체 인수전(1)
광저우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SA 그룹의 전용기 내부는 한겨울만큼이나 냉랭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심복들을 포함한 수행원 모두를 뒤쪽으로 물린 채, 차단막을 내린 임재호 부회장.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완전히 잠기자, 그는 오른쪽 손목을 흔들어 차고 있던 금속 시계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곧바로 기내를 울리는 거센 파열음.
-짝!
벌게진 뺨을 부여잡은 체, 산발한 단발머리를 앞쪽으로 늘어뜨린 서윤지. 아랫입술을 앙다문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
“가지가지 하는군. 외국까지 나가서 망신을 시켜? 수치스러움도 모르는 더러운 년.”
“하, 그 더러운 년하고 같이 사는 당신은, 얼마나 깨끗하기에 이러시나 몰라?”
“이 쓰레기 같은 계집이, 아직도 주둥이를 함부로…!”
또다시 올라가는 임재호 부회장의 팔.
그러나 다시 그의 팔이 서윤지의 뺨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검은색의 진한 눈화장을 한 서윤지. 그녀의 가느다란 손아귀가 남편의 텅 빈 손목을 꽉 잡아챘기에.
“당신, 연극에 과몰입하네?”
무언가 스위치를 누른 듯, 분노 섞인 몸짓으로 서윤지의 손을 뿌리친 임재호 부회장.
흉악하리만치 일그러진 그의 얼굴. 어두운 밤, 비행기 창문에 비친 장면은 피멍이 맺힐 만큼 강하게 목을 조르는 모습이었다.
“이년이… 지금 뚫린 입이라고 아무 소리나 내뱉는 거냐!”
“쿨럭! 쇼윈도 부부로 살겠다는 것. 애초에 알고 있었을 텐데?”
숨이 넘어가기 바로 직전, 가까스로 풀린 손아귀.
악에 받친 서윤지. 두려움 따위는 일절 개의치 않는 걸까?
목 정중앙에 보랏빛으로 물든 손가락 자국을 매만진 그녀는, 겉껍데기에 불과한 남편을 향해 소리쳤다.
“머리가 나쁜가 보네. 쉽게 설명해 줄게. 그냥 이렇게 생각하자고.”
타는 목을 재우기 위해 들이켠 붉은 포도주 한 잔.
속에서 끓어오른 피인지, 아니면 단지 포도주 자국에 불과한 것인지, 소매로 입술 자락을 거칠게 훔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철화 반도체를, 내 아버지는 그 잘나 빠진 2세 승계를, 그리고 나는….”
거칠게 탁자 위로 내리쳐진 유리잔.
그 안에 생겨버린 작은 실금 사이로 서윤지의 목소리가 떨리듯이 울렸다.
“생존 그 자체를.”
-쨍그렁!
덜컹거림을 이기지 못한 유리잔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산이 조각난 파편.
때마침, 말릴 상황만을 찾고 있던 수행원들. 그들은 황급히 객석 사이로 들어와 청소를 빙자한 몸부림을 보였다.
“괜… 괜찮으십니까?”
“별일 아니다, 이거나 치워.”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두 부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비행기 엔진 소리만이 고요함의 배경음악이 될 뿐이었다.
붙어 앉는 것조차 싫었던 것일까?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지. 복도를 걷던 중 돌아선 그녀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 채 비행기 뒤편을 향했다.
“이 소꿉장난의 본질에나 집중해. 고작 이상한 중국 놈 하나 때문에 심기 거슬린 티 내지 말고.”
“…싸구려 사생아 년 티를 못 내서 안달이군. 역시 첩 새끼답다. 종자가 천한 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멀어져가는 남편 아닌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서윤지.
첩 새끼.
가슴 한쪽에서 끓어오르는 불쾌감은 그녀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천한 반쪽짜리 핏줄. 분명히 뼈저리게 알고 있고,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사실.
그러나… 같은 첩 새끼임에도 모든 것을 얻어낼 그녀의 남동생.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얻어낸 한 사람, 한서준.
“…거지 같네.”
이럴 때마다 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두 사람의 얼굴.
분풀이하듯, 그녀는 힘껏 쥔 주먹 망치로 기내 옆면을 연신 두드렸다.
-승객 여러분. 본 항공기는 이제 곧 한국의 인천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어느새 통화권 안으로 들어온 비행기. 아직도 흉터처럼 통증이 내려앉은 뺨과 목을 거울로 비추어 보던 서윤지.
약을 발라주는 수행원에게 역정을 내는 그때, 갑자기 탁자 위에 놓인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잉.
철화그룹 비서실장이었다.
“뭐야, 김 실장. 당신은 왜 또 나한테 전화질이지? 또 시답잖은 소리나 지껄이려고?”
“아가씨, 급한 일입니다.”
착 가라앉은 남성의 목소리.
전화기 너머 묘한 기시감이 서윤지의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한 시간 전쯤… 회장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현재 부산에 있는 철화 의료원에서 수술 중입니다.”
* * * *
삼도천 언저리를 보고 오기라도 한 모양이다.
코와 입에 산소호흡기를, 양팔에는 이름 모를 약을 내려보내는 호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서국철 회장.
평탄한 직선에 가까웠던 심박 모양. 아직 죽기에는 이른 것일까?
마지막 생명을 쥐어 짜내며 거친 숨을 토해낸 서국철 회장이 눈을 떴다.
“쿨럭! 이, 이봐! 이것들은 다 뭔가?”
“회… 회장님? 의료진! 회장님께서 깨어나셨다! 어서 조치를!”
분주하게 달려온 의료진. 몇 차례의 검진 끝에 의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천운입니다. 그 무리한 일정에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내부 장기들이 이만큼 버틴 것이 용할 만큼.”
“이봐, 의사 양반. 그렇다는 건… 이제 산송장 꼴로 지내야 한다는 겐가? 이 서국철이가!”
“지금처럼 계속 무리하셨다가는 아마 언제 쓰러지셔도 이상할 게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악다구니를 쓰듯 고집을 피우는 서국철 회장.
그러나 연이은 의사의 말에 그는 예의 평범한 노인들이 그러하듯 왜소해진 어깨를 축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천운이 따를지는, 저 역시 감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되었네. 그만 나가 봐.”
텅 빈 병실 안. 서국철 회장의 눈길은 바깥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향했다.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메마른 잎사귀. 당장이라도 거센 바람이 불면 맥없이 날아갈 것만 같은 잎사귀는 꼭 자신의 모습과 같이 느껴졌다.
“…….”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인지, 버튼을 눌러 커튼으로 창을 가려버린 서국철 회장.
잠시 홀로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는 이내 수행원을 호출했다.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비서실장을.
“회장님, 이제 정말 건강상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봐, 임자. 자네도 잔소리인가? 의대나 다시 들어가지 그래?”
“하지만 더 이상 무리하신다면….”
“알아, 나도 아네. 그래서… 이왕지사 이리된 것, 아예 일정을 앞당겨야겠어.”
일정.
늦둥이 아들로의 승계를 빠르게 매듭짓겠다는 서국철 회장의 의지.
이제 철화그룹 서씨 집안 내에 거센 파열음이 나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이 늙은 육신이 내구연한을 다해 고꾸라지기 전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떠나겠다는 마음뿐.
“윤아, 윤미. 고 두 계집년들은 내 쓰러지고 뭐라 하더나?”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저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만….”
“되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는 년들이지. 독거미 같은 년들! 지 애미랑 똑 닮았다!”
치밀어오르는 분노 탓에 피를 토하는 서국철 회장.
독한 항생제를 몇 통이나 들이부은 후에야 진정이 된 그는, 다시금 비서실장과 논의를 이어나갔다.
“모든 것을 윤석이에게 상속한다. 혹여나 그 녀석 성인 되기 전에 내가 떠난다면… 자네가 후견인을 맡고.”
“회장님, 그런 말씀은 부디….”
“맡아. 자네 말고는 맡을 놈도 없다. 충성심의 대가는 절대 섭섭지 않게 안겨 줄 터이니. 그러려면 우선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는 서국철 회장. 이내 자신이 연기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몸임을 깨달은 그는,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아, 윤지. 그 길손이 년이 드디어 쓰임새를 다 하겠군.”
“지금 귀국하자마자 바로 오고 계십니다.”
“그러겠지. 그년은… 제 언니들 이상으로 독하디독한 년이니까. 돌아가는 꼬라지를 죄 알고 있을 게야.”
비서실장에게 손짓하는 서국철 회장. 떨리는 손으로 승계 관련 자료를 쥔 채, 가만히 생각을 이어나가던 노인.
마침내 그는 결심을 마친 듯,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산업은행에 연락해. 철화 반도체. 인수 대상자를 찾겠다고.”
* * * *
철화 반도체.
손바뀜이 많았던 비운의 기업.
그럼에도 기업이 가진 잠재력만은 항상 깊었기에, 마지막으로 주인이 된 서국철 회장은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이 회사를 손에서 놓았다.
오로지… 서씨 집안 핏줄로의 승계를 위해서.
“히야, 진짜 용하네. 용해. 우리 회장님은 이걸 어떻게 안 것이여?”
내가 이야기한 대로 철화 반도체라는 대어가 시장에 풀리자, 감탄사를 아끼지 않는 김원철 아저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검은 백조가 호수에 나타나자, 어지간히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돗자리 하나 사다 줘?”
“무슨 돗자리요.”
“대기업 회장 말고 점쟁이나 박수무당 하는 게 더 많이 벌 것 같은디. 흐흐흐.”
별 희한한 오해를 하는 김원철 아저씨. 괜히 그룹 내에 이상한 소문이 퍼질라, 나는 적당한 변명을 입 밖으로 술술 늘어놓았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저번에 전경련 모임 갔다가 대충 돌아가는 꼴이 그리 보여서 말했던 겁니다.”
“그것도 참… 무슨 통찰력이여. 아무튼, 그래서. 빈 살만 왕세자한테 투자금 땡겨서 업어 오면 되나?”
반짝이는 이마만큼이나 머릿속에서 희망 회로를 번쩍번쩍 돌리고 있는 김원철 아저씨.
물론 헛된 희망을 단번에 깨는 것이 제맛이다.
“그건 아닙니다. 단순히 돈만 가지고는 못 사거든요.”
“아니, 왜? 어째서? Why?”
무슨 서양인이라도 된 듯, 양어깨를 W 모양을 하고서 강한 물음을 표시하는 김원철 아저씨.
미셸 사장하고 양평 낚시터를 갔다 왔다더니, 별 이상한 제스쳐만 배운 모양이다.
“애초에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거간꾼으로 껴 있잖아? 그러면 인수 협상에 공정성이 필요한 건 필연적이고.”
“그게, 좀 더 깊은 사정이 있습니다. 가문과 혈통이라는 물보다 진한 사정이.”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철화그룹 서씨 집안과 SA 그룹 임재호 부회장과의 관계를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뒤이은 일정 가운데 덜 중요한 부분은 모조리 취소해버릴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납득하는 김원철 아저씨.
“히야… 그러면 철화 반도체 인수 조건 자체를 엄청 애매모호하게 잡을 텐데. 그럼 어떻게 하려고?”
“다 방법이 있지요. 일단은.”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나는 꽉 채워진 연락처 목록을 보며, 누군가를 찾아내었다.
비록 시작은 그리 좋지 않은 인연이었으나,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기도 하는 세상.
그렇기에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입가에 웃음을 띠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오래간만입니다.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님. 혹시… 이번 주에 시간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