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철화 반도체 인수전(2)
살다 보면 첫인상은 개떡 같았지만, 종국에는 친분을 다지게 되는 관계가 있다.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핏덩이니 재벌의 기강을 잡겠다느니 하며 술자리에서 반말조로 나를 몰아세우던 그 사람.
“아이고, 한 회장님 오셨소? 어서 앉아요, 앉아. 정종 덥혀둔 것 아직 안 식었네. 한잔 쭉 받으시고.”
하지만, 리만 브라더스라는 핵폭탄을 인수할 뻔한 것을 미연에 막아준 후, 상당히 싹싹한 태도로 나를 대하는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내 앞에 앉은 이 중년인의 아우라에서는 재벌 잡는 개장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푸근한 동네 아저씨의 모습만이 남았을 뿐.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기다리긴. 나도 방금 왔으니 신경 쓰지 말고 어여 잔부터 받으시고.”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올라오는 흥.
왕골 다다미가 깔린 모 일식집 안. 작은 도자기 술잔이 몇 바퀴 돎과 함께, 식탁 위에는 텅 빈 사케 병이 줄줄이 쌓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우리 한 회장님 아니었으면 역사에 큰 죄를 질 뻔했잖소. 아직도 그때 생각만 허면 아찔하다니까. 허허허.”
“모른다면 또 모를까, 뻔히 눈에 보였으니까요.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그 큰 업보가 저에게도 왔을 겁니다.”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행정고시 출신의 금융 엘리트로서 프라이드로 꽁꽁 뭉친 그는 내 대답이 퍽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적당히 올라온 취기, 눈에 보일 정도의 호감.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나는, 천천히 오늘의 용건을 입 밖으로 꺼내 들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제게 또 원치 않는 희한한 업보가 다가오려 드는 것 같더군요.”
“업보? 허허, 어떤 마구니가 한 회장님 어깨에 올라오려 드는 거요?”
“이야기가 좀 길긴 합니다만. 밤도 깊었고 하니, 조금 길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국방부 신무기 도입 사업부터 시작된 이야기의 흐름은 어느새 상류를 지나 굵직한 본류를 향해 흘러갔다.
서윤지와 임재호, 철화그룹 서씨 집안의 집안싸움과 <상하이 캐피탈>.
술 위에 뜬 채로 둥실 떠가는 이야기는, 어느새 중국의 유령회사를 거쳐 철화 반도체라는 바다를 앞에 두었다.
“…그래서, 저희 탄약그룹에서 이번에 시장에 나온 철화 반도체를 인수하고자 합니다.”
“흐음… 그게 그렇게 된 것이군. 하기야, 서국철 회장 그 양반이 그리 쉽게 대어를 놓아줄 리가 없을 터.”
팔짱을 낀 채, 까끌까끌한 턱수염 자국을 매만지며 고민을 이어나가는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애당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에 부합하게, 그가 내게 건넨 대답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류의 것이었다.
“산업은행이 철화 반도체 대주주인 것은 사실이요. 매각의 키를 쥐고 있는 것 또한 맞고.”
“하지만 그 키를 총재님 뜻하신 대로 돌릴 수는 없겠지요.”
“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철화 반도체 아닌가. 지켜보는 이는 VIP뿐만이 아닌, 야당과 산업계 전체일 터.”
현대사의 물줄기 속에서 숱하게 많은 주인의 손을 거쳐 간 철화 반도체.
그 잠재력이야 어찌 되었든, 정부에게 있어서 이는 덩치만 큰 미운 오리 새끼나 다름없는 셈.
더군다나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치를 재보궐 선거가 다가오는 상황.
그렇기에…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안하다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공정성. 아주 높은 수준의 공정성의 잣대가 드리워질 터. 안타깝지만 편의를 봐 드릴 수는 없으이.”
“이야기가… 조금 잘못 전달된 것 같습니다.”
의미 모를 말을 마치고는 잔을 들어 따뜻하게 덥힌 정종의 향을 음미하는 나.
곧이어 향긋한 곡식 내음새가 화한 느낌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흘러 내려갔다.
감았던 눈을 뜨니,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그래, 분명 이해하기 힘들겠지. 이제까지 겪어왔던, 그리고 생각해왔던 전개와는 전혀 달랐을 터.
애초에… 나는 이 자리에 한낱 부정 청탁이나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한 회장…? 방금 그게 무슨 말이오? 잘못 전달되다니?”
다른 것은 다 필요치 않다.
나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산업은행이 제시할 입찰가액부터 SA의 임재호 부회장이 흰 종이 위에 써 내려갈 최종 인수가액까지 전부.
그들의 모든 것을 손바닥 안에 두고 훤히 알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필요한 공정성.
나는 그저 바깥에서 불어오는 알 수 없는 바람이 손아귀,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만 하면 될 뿐이니까.
“총재님께서는 본인의 업에 충실하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제가 총재님께 바라는 것이 그 공정성이니까요. 그러니 부정이나 그런 부분은 일절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단지.”
놀라움으로 가득 찬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예상했던 범주에서 아득히 벗어난 나를 보는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기울여진 술주전자.
정종 향과 함께 잔 안에 의지를 가득 따르며, 나는 마지막 말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철저한 공정성. 부디 그것만은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칼같이 엄정하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쥐구멍을 찾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 * * *
-쨍그렁!
도자기 접시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집안에 찾아온 공포감.
철화그룹 첫째 딸 서윤아. 표독스러움이 잔뜩 얼굴에 서린 그녀는, 집안의 사용인을 향해 거칠게 쏘아붙이듯 소리쳤다.
“아줌마! 약 바꿔놓은 것 맞아? 똑바로 한 거 맞냐고!”
“했… 했습니다요. 사모님. 분명 지시하신 대로 하얀 약 두 개는 빼고 주신 걸로 바꿨는디….”
“이년이 그래도 말대꾸를 하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네년이 영감탱이 살리는 바람에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지!”
벌벌 떨고 있는 사용인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쪽 팔을 들어 당장이라도 손찌검을 할 기세인 서윤아.
순간, 계단 위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그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말 한마디를 던졌다.
“그걸 걔가 살리고 싶어서 살렸겠냐? 영감탱이 명줄이 오지게 질긴 거지. 하여간, 언니는… 생각이나 좀 하고 살아.”
“뭐야?”
검은색 안경을 낀, 도도한 분위기의 둘째 서윤미.
제 아버지의 약을 부작용이 심한 것으로 바꿔놓겠다는 계획을 짠 장본인인 그녀.
그럼에도 서윤미는 포악한 성정을 마구 드러내는 언니와는 달리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자, 이거나 보고 말해.”
“이 종이쪼가리는 또 뭔데!”
동생이 건넨 종이를 건네받은 서윤아. 부산 철화 의료원에서 전송된 문서에는 서국철 회장의 몸 상태에 대해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영감탱이. 길어야 1년이라네. 그 전에 뒤져도 이상할 게 없고.”
“1년, 1년… 그럼 절반쯤은 성공한 건가?”
“그래. 그러니까 일단은 말이야.”
겁에 질린 사용인에게 다가가는 둘째 서윤미.
지극히 가식적인 웃음을 얼굴에 건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이 보이는 사용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아줌마는 죄가 없다는 거지. 안 그래, 아줌마?”
“예, 예에… 그, 그렇구먼유.”
“그런데… 죄가 생기는 경우가 또 있긴 하거든. 그게 뭔지 알아?”
양손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인의 양옆 입가를 꼬집은 그녀.
손등에 핏줄이 설 만큼 가득 힘을 실었기에, 공포로 눈가가 젖은 사용인은 그 자리에서 발버둥 쳤다.
“읍, 읍….”
“함부로 주둥아리 놀리는 그 순간, 아줌마는 나한테 죄인이야. 아줌마뿐만 아니라, 저기 저 하꼬방에 기생충처럼 붙은 당신 딸년까지 전부!”
고함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용인. 씻을 수 없는 두려움의 파편이 심장 속에 박힌 그녀는, 뒤이은 축객령을 듣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참 독한 년이야. 너도.”
“언니만 하겠어? 아무튼…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으니, 생각 좀 하자고.”
소파 귀퉁이에 걸터앉은 채,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문 둘째 서윤미.
거실 샹들리에에 뿌연 회색 구름이 걸리자, 그녀의 언니가 재촉하듯 대답을 보챘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이대로 그냥 둘 거야?”
“그대로 두자고? 언니 정말 아무 생각이 없구나? 첩 새끼는 서윤지 그 한 년으로도 차고 넘쳤는데, 하나가 더 늘었어. 그것도 아들!”
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으로 언니를 쏘아보는 서윤미.
숨을 토해내듯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그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을 내뱉었다.
“핏줄 타령하는 영감탱이 생각 뻔해. 1년도 짧은 시간 아니니까,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해.”
클러치 백 안에서 꺼내 든 사진 한 장. 소년 한 명이 이름 모를 수녀 한 사람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중, 삼중으로 신변 보호가 되고 있기에 차마 직접 접근할 수 없는, 철화그룹의 핏줄을 이을 막둥이.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얼굴 위에 아직 타다 남은 벌걸 꽁초가 그대로 짓이겨졌다.
“서윤석… 이라고 했지? 이 핏줄도 더러운 서자 새끼가 내 위에 올라올 일은 꿈에도 없을 테니까.”
* * * *
광저우의 모 호텔 지하.
외국인 전용 카지노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슬롯머신. 반짝이는 불빛과 함께 돌고래와 문어, 불가사리와 숫자 7의 유혹.
그 앞에는, 중국에 온 이후 얼굴이 핀 이택규 전 사장이 앉아 있었다.
“오케이… 거기서 스답!”
혼신의 힘을 다해 누른 빨간 버튼. 그러나 언제나 도박사의 기대는 배신당하는 법.
연달아 두 번 나온 숫자 7은, 결코 세 번째를 허용하는 일이 없었다.
“아흐… 이걸 못 먹네. 한 끗만 더 갔으면 끝인디.”
“하이고, 행님아. 인자 앵꼬 아잉교? 슬슬 고마하고 가지?”
“에잉, 아쉬워서 그렇지. 어이구야, 칩도 벌써 다 썼네.”
백덕규의 손사래에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택규 전 사장.
앉은 자리에서 30분 동안 잃은 돈의 액수는 한화로 약 1,000만 원가량. 보통 사람 같아서는 피눈물이 쏟아지고 창자가 끊어질 듯한 후회가 밀려올 금액이다.
그러나, 이택규 전 사장에게는 그 정도쯤이야 한낱 유희에 불과한 듯해 보였다.
“거, 돈 들어오면 또 하지, 뭐. SA-철화 테크윈이 좋긴 좋아. 전향자 어깨 뽕도 살려주고.”
“거 보이소. 행님은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 아이요. 다만, 이제….”
이택규 전 사장이 넘긴 것은 그저 인적 자원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탄약그룹에 재직하면서 얻어온 숱한 경험과 노하우.
그 모든 것이 끓는 물 위에 녹는 눈처럼 SA-철화 테크윈에 스며들고 있는 상황.
함박웃음을 짓는 그가 조금은 걱정된 모양이었다.
함께 어깨동무를 한 백덕규.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말을 꺼내었다.
“어디 가가 딱 입조심만 하면 돼. 괜히 유령회사 어쩌고 얘기 나오는 순간….”
호텔로 올라가는 두 사람.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백덕규가 입을 열었다.
“중국계 산업 스파이로 몰리면, 찍! 소리도 못 하고 인생 시마이 치는 지름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