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철화 반도체 인수전(3)
-언제나 함께하는 철화그룹 협찬 여러분의 교통방송. 오후 4시를 알려드립니다.
덜컹, 북한산 자락의 거친 도로 탓에 흔들리는 차량.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운전기사는 조심스레 백미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으음….”
주름진 얼굴. 그늘진 그 깊이만큼이나 항상 남 위에 군림해온 서국철 회장.
자칫 잘못하다가는 곧바로 뒤에서 철제 재떨이가 날아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격.
그러나, 최근 요 며칠.
병상에서 몸을 털고 일어난 서국철 회장은 예전만큼의 독기를 마구잡이로 뿜어대지는 않았다.
“이봐, 운전이 거칠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시정하겠습니다!”
“쯧… 미련 맞은 티는 그만 내고. 거, 라디오 소리나 더 키워 봐.”
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다이얼. 이내 뒷자리에서 눈을 감은 서국철 회장의 귀에 라디오 진행자의 선명한 목소리가 담겼다.
-최근 장안의 화제인 사안이 바로, 대한민국 전자 산업의 큰 별, 철화 반도체가 매물로 나왔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산업은행 주관 인수전에서 의향을 보인 측이 있는데요, SA그룹과 탄약그룹 이렇게 두 곳입니다.
-산업은행 측은 철화 반도체의 역사와 상징성 등을 감안하여, 이번 인수전에 강도 높은 공정성을 기할 것이라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휘휘 내젓는 서국철 회장.
눈치 빠른 수행비서가 운전 기사에게 지시해 황급히 소리를 줄이게 했다.
“꼴에 나랏돈 만진다는 놈들이 아주 별 트집도 다 잡겠답시고 엄포를 놓는군. 쓰레기 같은 놈들이 공정성은 무슨!”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인지라, 아무래도 정권 차원에서 신경을….”
“썩어 터질 잡놈들! 그렇게 돈을 퍼먹여도 늘 한때다! 중요한 순간마다 도움이 되는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쿨럭, 쿨럭!”
솟아오르는 성질을 터트리려다, 이내 각혈을 하는 서국철 회장.
흰 손수건 위에는 검붉은 생명의 꽃잎이 내려앉았다. 이젠 얼마 남지 않아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회, 회장님! 어서 병원으로…!”
“임자, 그 청승 좀 그만 떨어. 아직 완전히 죽을 때는 안 되었다.”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려다 문득 고개를 가로젓는 서국철 회장.
긴 담배 한 개비가 그의 손아귀에 쥐어진 채, 금세 바스라졌다.
이제는 연기조차 들이쉴 수 없는 몸. 그러나, 그의 마음속 남아 있는 의지만큼은 아직 불꽃을 당기기에 충분한 모양이었다.
수행비서를 향해 물음을 건네는 서국철 회장.
“윤석이 그 아이. 호적 고치는 일은 어찌 되었어? 가능하다 하드나?”
“두 살 정도 올리는 것까지는 문제없다고 합니다. 해외 출생이신지라 아무래도 용이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년 기준선인 스무 살까지 올리기는 어렵다, 이 말이로군.”
조금 피로한 모양인지 창가에 머리를 기대는 서국철 회장의 모습.
조금씩 가까워지는 약속 장소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중간에 거간꾼 년을 하나 끼긴 해야겠구먼.”
“윤지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서윤지를 낳은 후, 곧바로 하늘 위로 떠나가 버린 그녀의 생모.
그렇기에 철화그룹 서씨 집안 내에서 서윤지의 취급은 ‘길에서 주워 온 아이.’ 그 정도였다. 애정 따위 일절 바랄 수도 없는, 그저 손익계산의 도구로만 쓰일 법한.
햇빛 때문인지 미간을 찌푸린 서국철 회장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 쓸모도 없던 길손이 년이 제 밥값을 할 때가 된 게지.”
어느새 한강 다리에 들어온 차량.
노을에 비친 강물은 황금빛으로 넘실거렸다.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이거, 윤지 그년에게도 밥상 하나는 차려 주어야겠어. 언니라는 두 년은 앞으로 동냥밥조차 못 얻어먹을 팔자인데 말이지. 끌끌끌.”
“회장님, 그 말씀은 혹시… 일전에 쓰러지신 것과 그 두 분께서 연관이 있으시다는 말씀이신지….”
아랫사람으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의심. 그렇기에 조심스레 입 밖으로 꺼낼 단어를 고르고 있는 수행비서.
그런 그를 본 서국철 회장은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한숨 섞인 마지막 말을 건네었다. 노기 섞인, 그러나 무언가 슬픈 표정과 함께.
“나 죽거든 가장 이득 볼 쪽이 그년들인 것을. 당연한 순리겠지.”
* * * *
대한민국 대기업 중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으로 최고를 꼽자면, 그건 단연 탄약그룹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지난번 탄약 전자 개혁안과 함께 상당 부분 개선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룹 전체로는 예전의 위용을, 아니, 오명을 씻어내지 못하는 상황.
“이거 선글라스 어때? 크흐… 옛날 특전사 때 해외 훈련 가서 썼던 건데, 그땐 아주 여자들이 나만 봤다 하면 그냥….”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치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김원철 아저씨.
도대체 어떻게 이 뺀질이 양반이 그 악명높았던 과거의 탄약그룹에서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그 당시 스페인 왕실 막내 공주님이 나한테 그랬지. 원철 씨, 당신을 사랑해요! 저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요!”
점점 싸구려 로맨스 영화 시나리오가 되어 가는 아저씨의 허풍.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올라가려 했기에, 나는 얼른 손을 들어 주제를 환기했다.
“그 영화 속 공주님 이야기는 됐고요. 왕자님 이야기나 좀 해 보죠. 스페인 말고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
“아니. 기껏 아름다운 추억을 말하고 있는데, 그 시커먼 양반이 갑자기 왜 튀어 나온다야.”
“그 양반이 필요한 자금의 절반을 투자해 준다고 했으니까요. 이만하면 왕자가 공주보다 낫지 않습니까?”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
그와의 인연은 쿠데타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었다.
<코코아>의 가능성을 엿본 그는, 내게 탄약그룹의 신사업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투자금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경영권에 대해 일절 간섭 없이, 오직 미래에 커질 가능성만을 보겠다는 빈 살만 왕세자.
그렇기에 사우디 쪽 자금에 대해서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는 한, 얼마든지 조달이 가능한 상황.
“그건 또 그렇다야. 하긴, 그 공주님은 지금쯤 나랑 똑같이 배 나온 아줌마가 되었을 거고.”
“돈은 젊음처럼 시드는 법이 없으니까요. 일단… 투자 쪽은 그렇다 치고,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부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 전, 나는 김원철 아저씨에게 철화 반도체 인수를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자금이 필요한지에 대해 보고를 올리라 지시했다.
회귀 이전, 내가 기억하는 SA 그룹의 철화 반도체 인수가액은 3조 원.
물론 이는 탄약그룹이라는 경쟁자 없이, 거의 단독입찰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오간 금액이니만큼 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철화 반도체 인수에 필요한 자금이 아마… 탄약 경제연구소 추산으로는 3조 3천억 원 정도로 잡고 있어.”
“3조 3천억 원이라.”
3천억 원의 차이.
탄약그룹이라는 존재 자체로 인해 10%가 더 뛰어버린 금액.
아마 탄약 경제연구소의 인재들이 판단한 것은 맞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재무적인 논리로만 보았을 때만.
“음….”
상세한 내용이 기재된 보고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나.
몇 군데, 신경 쓰이는 부분에 빨간 펜으로 직직 줄을 긋고, 코멘트를 적고 나서야 보고서 결재판이 닫혔다.
“다시 산출하라 하세요. 처음부터.”
“다시?”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금융쟁이들 기업가치 산정하는 방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예상 인수가액 못 맞춥니다.”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김원철 아저씨.
머리 위에 큼지막한 물음표 하나가 둥둥 띄워놓은 상태에서, 아저씨는 뭔가 억울하다는 듯이 내게 대답했다.
“이거 원래 예상 인수가액이 2조 8천억이었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한 번 더 거르고 올리라 한 건디.”
“서국철 회장의 욕망. 그러니까… 철화그룹 2세 승계에 필요한 자금을 거기에 모조리 더해야 합니다.”
잠시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걸쳐놓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 김원철 아저씨.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내 말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머리 위에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었다.
“아아, 그렇지.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히야… 우리 회장님 진짜 귀신이여. 그래서, 어느 정도의 엄밀성이 필요한 건디?”
“상대보다 15% 이상 차이 나게 써서는 못 먹습니다. 적든 많든 그 구간만 맞추면 됩니다.”
15% 룰.
이번 철화 반도체 인수전에서 제시된 규칙은 조금 독특했다.
양측의 희망 인수가액 차이가 15% 이하인 경우, 동등한 금액으로 간주하고, 곧바로 공정성 평가로 간다는 규칙.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마냥 높은 금액을 쓸 수도 없다.
양측이 부른 금액이 너무 차이가 난다면, 재검토에 따른 시일이 더 소요되니까.
“정부랑 산업은행이 원하는 건 이거네. 금액을 적당히 맞춰서 써내라. 나머지는 여론 상황 보고 자기네들이 정하겠다.”
“그렇지요. 진짜배기 판단 영역은… 공정성에 대한 부분이니까.”
“근데, 그러면 탄약그룹이 불리한 것 아닌가? SA 쪽에서는… 전자 쪽 전문 수출업체로 판을 짤 것 같은데.”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모호함.
화려하게 빛나는 대의명분이라는 무대 뒤편, 캄캄한 어둠 속에는 치밀한 뒷공작이 오간다.
누군가는 무대장치를 조정하는 줄을 잡아당기고, 조명을 임의로 끌 수도 있고.
회귀 전에 그러했든, 엄연히 SA 쪽에 유리한 상황.
그렇기에… 나에게는 이 판을 뒤집을 조커 한 장이 필요했다.
경영자의 윤리관과 도덕성, 그리고… 그룹 단위에서 불법을 저질렀는지 여부라는, 여론의 이목을 집중시킬 카드가.
“서윤지… 그 여자는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요. 그렇기에.”
그제야 무언가 눈치챈 듯, 부처님처럼 빙그레 웃는 김원철 아저씨.
최근 갑자기 일이 많아졌다고 하소연했지만, 오히려 나는 아저씨의 어깨 위에 짐덩이 하나를 더 얹었었다.
탄약그룹의 칼자루. 감찰팀이라는 조직을.
“제가 그룹 감찰팀에 유세나 보좌관을 잠깐 파견한 것이기도 하고요.”
* * * *
여의도. K 호텔.
청소부 복장의 젊은 여성. 탄약그룹 감찰팀에 파견된 유세나 보좌관은 호텔 취사장 뒤편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아… 정말 우리 회장님. 하필 나한테 이럴 일을 시키고.”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강제로 떠맡은 임무. 그러나 유세나 보좌관의 머릿속에 떠오른 주군의 말 한마디는 그녀를 움직이게 하기 충분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맡길 수 있는 일이거든요.’
조금 붉어진 그녀의 두 뺨.
그러나 그와 별개로 유세나 보좌관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업무 자체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다. 그저… 같이 일하게 된 외부 파트너의 존재가 조금 불편했을 뿐.
“맨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 지금쯤이면 김범호 금마 서윤지하고 한창 뿅 가 있겠구먼.”
긴 양복으로 감추었으나, 팔뚝에 험한 문신이 잔뜩 새겨진 남자.
과거 피비린내 나는 뒷골목에서 명동 악바리 유태촌 밑에서 칼밥을 먹던 그는 흥신소 용역 노릇을 꽤나 오래 한 모양이었다.
긴 흉터 자국이 난 눈가를 씰룩거리며 취재용 캠코더와 녹음기를 내미는 사내.
“가스나, 꼭 일도 즈 아부지 닮아서 험한 것만 골라서 하네. 뭐, 그럼 즐거운 취재하고 온나. 흐흐흐.”
덩그러니 취사장 뒤편에 남겨진 유세나 보좌관.
위장용 청소 카트 손잡이를 꽉 쥔 그녀는, 직원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우리 회장님이 나 죽을 일을 시켰기야 했겠어? 일단 가 보고 생각하자.”
-딩동! 35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풍겨오는 몽롱한 냄새. 시끄러운 두 남녀의 말소리.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보통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아, 아니!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