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76화 (76/300)

76화철화 반도체 인수전(4)

개판.

이 광경을 개판이 아니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마구잡이로 굴러다니는 빈 술병들. 탁자 위에 흩뿌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여멀건 가루.

물담배 파이프에서 나오는 몽롱하고 달콤한 잿빛 연기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조금씩 유세나 보좌관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미치겠네… 이건 진짜 무슨 뉴스에서나 볼 광경인데.”

본인이 모아올 자료가 뉴스에 나오리라는 생각까지는 못 한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둘러 녹음기를 켠 유세나 보좌관.

청소부로 위장한 그녀는 이리저리 널브러진 환락의 도구들을 치우는 시늉을 했다. 소중한 증거가 될 것들을.

“아, 맞다. 캠코더, 캠코더.”

주머니를 뒤지며 캠코더를 찾는 유세나 보좌관.

그 순간, 고개를 떨군 그녀의 앞에, 무언가 자신의 것이 아닌 그림자가 짙게 서렸다.

‘들… 들킨 건가?’

꿀꺽, 방 안 가득 소리가 울릴 정도로 목구멍 사이로 거칠게 넘어가는 침방울.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앞에 서 있는, 반라의 차림인 두 사람.

서윤지와 김범호였다.

“야, 이 개 같은 년아! 당장 그거 도로 가지고 오지 못해? 어서!”

반쯤 풀려버린, 붉게 충혈된 눈.

분명 어딘가 한 군데 맛이 간 듯한 서윤지의 모습.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라도 번쩍 든 듯, 유세나 보좌관을 향해 맨발로 성큼성큼 달려왔다.

“예, 예?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이 역겨운 년, 이거 안 되겠네!”

-짝!

다짜고짜 유세나 보좌관의 뺨을 때리는 서윤지.

붉게 상기된 볼은, 통증 탓에 순식간에 뜨겁게 올라왔고, 통제 밖으로 벗어난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상황.

정말 들킨 걸까?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카트 위에 하얀 가루 그거. 내가 함부로 치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말을 못 알아 처먹어!”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첫 근무여서 그만….”

안도의 한숨과 함께 토해낸 변명.

머리 꼭대기부터 흘러 내려온 식은땀은 어느새 유세나 보좌관의 온몸을 적셨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생각난, 회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직접 당부한 말 한마디.

‘서윤지와 김범호. 둘 다 아마 제정신이 아닐 겁니다. 적어도 여의도 K 호텔에 있을 때만큼은요.’

실로 옳은 말이긴 했다.

다른 의미로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렇지.

푸른색 작업복 소맷자락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느라 젖어갈 때쯤, 가운 하나를 들고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김범호.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서윤지를 뒤쪽에서 안고는 무어라 입을 열었다.

좀 더 많이 취하기라도 한 건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뱉어내면서.

“어우야, 우리 이쁜 청소 누나 눈 호강 그만 시키고 이거나 좀 입어라. 흐흐흐.”

“미친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됐고, 피곤하니까 김범호 네가 알아서 마무리해!”

문제의 하얀 가루만을 챙기고는, 곧바로 물담배 파이프가 있는 소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서윤지.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다가온 적막감. 이윽고, 김범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세나 보좌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크흐… 청소 누나야, 봤지? 쟤 성깔이 아주 예술작품이여. 괜히 또 싸대기 맞지 말고, 다음번엔 조심 좀 하고. 알았지?”

“아, 예. 예에… 감사합니다, 도련님.”

청소용 유니폼 앞주머니에 집히는 대로 만 원짜리 현찰 몇 장을 아무렇게나 구겨 넣는 김범호.

뒤돌아선 채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 사이로, 참 태평한 말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쁘게 생겼네. 이따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줘. 그럼 청소 열심히 하고. 수고!”

* * * *

강남, SA 그룹 본사 부회장 집무실에는 어설픈 소꿉놀이가 한창이었다.

서국철, 임재호, 서윤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일이 없는 세 사람. 그러나 우연히 맞아떨어진, 이해관계라는 촉매는 이들이 연기하는 가족놀이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일단 윤지, 네년이 대표로 있는 SA-철화 테크윈이 중간 다리 노릇을 할 게다.”

책상 절반을 가득 채울 만큼 큼지막한 종이 한 장에는 철화 반도체 인수에 관한 도식이 그려져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복잡하게 얽힌 지분 구조를 하나하나 짚어내는 서국철 회장.

꺼지기 직전의,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촛불 같은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SA 그룹이 가지고 있는 철화그룹 지주사 지분, 그리고 철화그룹이 가진 철화 반도체의 지분이 네년 회사를 통해 오간다고 보면 된다.”

“…….”

숨겨두었던 사생아 아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서윤지에게 공개한 서국철 회장.

뒷짐 진 그녀의 손아귀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쥐여졌다.

이제껏 서출이라 받았던 차별, 그러나 같은 서출임에도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또다시 받아야 하는 차별.

그리고, 그런 것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제는 숫제 자신을 상속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아버지의 태도.

“밥값을 제대로 한다면, 네년에게도 밥상 하나는 차려질 터. 철화 재단과 내 개인 소유 부동산 법인을 네게 주겠다.”

마치 적선하듯, 딴에는 두둑한 현찰 다발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말 한마디.

이제까지 그래왔듯, 지금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진정한 딸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후우….”

이곳에 오기 전 김범호와 즐겼던 쾌락 탓일까?

울화통이 터질 만큼 피가 끓어올랐지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아내는 서윤지.

그녀의 얼굴 위에는 어느새 효녀의 가면이 살포시 올라와 있었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간신히 가릴 정도의 작은 가면이.

“…시가로 따지면 제법 되겠지요?”

“네년이 이제껏 누렸던 것쯤이야 계속 누린들 재산에 손실 따위 나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면… 하겠어요. 그 중간 다리 역할.”

환한 미소를 연기하는 서윤지.

분홍빛 물감을 찍은 붓을 들어, 가면 위에 가족애라는 꽃잎을 그려 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윤석이라고 했지요? 그 아이, 서씨 집안의 대는 이어야 하니… 저도 협조해야 마땅하겠지요.”

가면 뒤편에 흐르는 피눈물.

마음에도 없는, 마음에 담기조차 싫은 말을 억지로 내뱉으며 서윤지는 다짐했다.

자신에게 동냥하듯 뿌려질 저 현찰 다발. 비록 지금은 후퇴하더라도, 언젠가 통째로 철화그룹을 집어삼키는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마치…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는 탄약그룹의 회장직에 앉은 그 사내처럼.

* * * *

유세나 보좌관에게 추파를 던졌던 김범호의 태평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탄약그룹 소유 호텔 플로렌스.

서울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 라운지 바는 늘 사람이 붐비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화려하리만치 넓은 장소가 무색할 만큼, 이곳에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오로지 나와 김범호뿐이었다.

“어우야, 서준이 네가 날 다 불러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디.”

“못 부를 건 또 뭐 있겠어. 놀 때 제대로 놀 줄 아는 범호 형인데. 안 그런가?”

“응? 잠깐만, 잠깐만. 이거 혹시….”

잠시 말을 아끼는 김범호.

무언가 깊은 생각이라도 하는 듯한 것이 아닐까 하는 내 예상은, 과녁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그대로 빗나가 버린 지 오래였다.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금세 철딱서니 없는 모습으로 손뼉을 치는 모습.

“역시 한서준이도 남자였어! 내가 또 그룹 승계 이런 거랑은 거리가 멀어도, 유흥 쪽 하나는 빠삭하걸랑.”

“뭐, 내가 그쪽하고는 거리가 있지.”

“크흐… 이래서 탄약그룹 한씨 집안 가풍이 문제여. 애를 무슨 선비로 만드는 걸 넘어서, 숫제 군바리로 만들어 놨어.”

그는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리를 꼰 채, 내 앞에서 양해도 없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마치 막냇동생에게 으스대기라도 하듯, 가슴팍을 팡팡 두들기는 김범호의 모습.

“흐흐흐. 너에게 있어서 형은 인자 일종의 예수여, 예수.”

“예수?”

“딱 내가 가는 길만 고대로 따라가면 천국이 보장된다 이거지. 안 그래도 서윤지 그년도… 크흠!”

하던 말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한 김범호.

제아무리 생각이 없는 그였지만, 나와 서윤지와의 관계를 머릿속에서 막 떠올리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삽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김범호는, 양 눈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데굴데굴 굴려가며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았다.

“아니, 그러니까. 서준아 그게 뭐냐면.”

“괜찮아. 윤지 누나가 천국 위에서 논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정색에 가까우리만치 굳은 내 표정과 그것을 본 김범호.

그리고 순식간에 몰아닥친 묘한 침묵은 곧 공포라는 그림자를 함께 불러왔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마수가, 피할 수 없는 형태로 다가와 목을 조를 것이라는 공포가.

그렇게 삽시간에 싸해진 분위기는 머리 위로 얼음물을 쏟아붓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앉은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먼저, 이것부터 보는 게 더 빠르겠네.”

아무렇지도 않게 까딱인 내 손짓에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유세나 보좌관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노트북 한 대.

“아… 청소 누나?”

안구 가득 경멸의 시선을 담아, 찌릿 소리가 날 정도로 김범호를 노려보는 유세나 보좌관.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하드 디스크 회전하는 소리가 잦아들 때쯤, 화면 속에는 영상과 녹음본 하나가 비쳤다.

마약과 간통. 경영자의 도덕성에 얼마든지 흠집이 잡힐 만한, 여론이 묵과할 수 없는 최악의 행태가 담긴.

“…….”

“자,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그 전에 어투부터 고쳐야겠네요.”

오줌을 지린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나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을 높였다.

“이제부터 사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조금 공적인 대화를 할까 합니다.”

“서준아… 아니, 아니, 한서준 회장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T그룹의 김범호 사외이사님.”

* * * *

“윽, 더러워요.”

긴 생머리 사이로 드러난 유세나 보좌관의 눈동자에는 환멸이라는 감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서윤지와 김범호의 부적절한 모습을 생방송에 이어 재방송까지 여과 없이 시청해야 했던 그녀.

“저희 아버지 밑에 있던 삼촌들도 이 정도로 문란하게 놀지는 않았습니다. 칼밥을 먹던 사람들인데도요.”

“김범호는 재벌집 자식들 사이에서도 워낙 이런 쪽으로 날고 기는 사람이니까요.”

노트북 화면을 닫은 나는 방금 전까지 김범호가 있던 자리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맞은 편에 놓인 의자가 아닌, 내 바로 앞 발밑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다시피 한 그 자리를.

그리고 떠오르는 회상.

‘헤헤, 한 회장님… 뭔가 제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제가 꼭 고치도록….’

‘김범호 이사님께는 사실 별다른 불만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갑자기 찾아온 희망에 천사라도 만난 듯 눈을 반짝이는 김범호.

사실 이 사고뭉치에 대한 권선징악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저… 김범호라는 철딱서니와 관계된 서윤지가 나와 외나무다리 위에서 대립한다는 것이 문제일 뿐.

‘여기 영상에 같이 계셨던 여성분께서 저와 함께하실 수 없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윤지… 말인가요? 아!’

‘저희가 바라는 타이밍에 맞춰서 자수해 주시죠.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자수라는 말에 지진이 일어난 듯 떨려오는 김범호의 동공.

절망이라는 눈꺼풀로 감겼던 그의 눈이 떠진 것은 다음에 이어진 내 말을 듣고 난 후부터였다.

‘김범호 이사님께 해가 가는 부분은 최소한의 증거가 제출될 겁니다. 집행유예가 나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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