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철화 반도체 인수전(5)
멀미도 나지 않는 건지,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김원철 아저씨.
어젯밤, 김범호를 불러 마약, 간통에 대한 자수를 권유한 나. 그 이야기가 나오자 김원철 아저씨는, 자신도 내막을 좀 깊이 알아야겠다며 대뜸 증거 자료를 보겠다며 보챘다.
“히야… 요새 도련님들은 이렇게 논단 말이지? 이렇게, 이렇게 화끈하게? 어후, 장난 아닌데?”
찌릿, 자동차 앞자리 조수석에 앉은 유세나 보좌관의 눈빛.
무슨 말도 그런 안되는 망언을 내뱉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은, 룸미러를 타고 김원철 아저씨의 대머리에 반사되고 있었다.
내가 팔꿈치로 가볍게 톡톡 누르며 무언의 신호를 준다고 한들, 영 씨알조차 먹히지 않는 상황.
“크흠, 김 비서실장님?”
“이야… 이건 완전 어디 미국 영화에나 나올 그런 유흥이다야. 막말로다가 나도 딱 20년만 젊었으면 진짜 이런 혈기가….”
결국, 듣다못해 뒤를 돌아본 유세나 보좌관.
김범호에 대한 경멸로 입이 툭 튀어나온 그녀는, 김원철 아저씨의 이런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서윤지에게 뺨까지 맞아가며 직접 증거 자료를 수집하다 온 입장에서 당연히 그럴 법도 할 터.
“으잉? 유 보좌관은 왜 또 그렇게 이상하게 보고 그런다야. 무슨 눈에서 광선총 발사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두 손을 모아 광선총 흉내를 내는 김원철 아저씨.
저 얄미운 악동 같은 표정은 알면서도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이 분명하다.
“뿅, 뿅! 뿅! 지지지직!”
저 유치한 아저씨 개그에 넘어가 웃으면 안 된다. 참아야 한다.
괜히 심기 불편해진 유세나 보좌관과 함께 일할 것을 막기 위해,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됐고요. 노트북이나 도로 주시죠. 본가 갔다 온 다음에 차후 일정 재조정해야 하니까.”
* * * *
간만에 찾은 평창동 본가.
소나무 가지 위 소복이 쌓인 눈, 고풍스러운 집 외관은 늘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나를 반기고 있었다.
물론 가장 격하게 나를 반기는 사람은 단연 엄마였다.
내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버선발로 튀어나오다시피 한걸음에 달려 나온 엄마.
“어머! 우리 서준이 왔어? 세상에,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주 좀 들르지! 얼른 들어와.”
정식으로 탄약그룹 한씨 집안 호적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엄마의 삶은 평탄하기 그지없는 것처럼 보였다.
때때로 무료한 듯한 느낌이 나긴 했으나, 아직은 큰 문제가 없는 상황.
“이렇게라도 우리 서준이 얼굴 보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안 그래, 청주댁?”
“맨날 사진으로 보시면서… 사진허구 실물허구 별 차이는 없구먼유.”
“어머! 이 아줌마가 진짜, 어쩜 이렇게 낭만도 없고 그래!”
평소처럼 화목한 모습.
몇 가지 신변잡기식의 대화를 마친 후, 나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른쪽, 늘 숨 막히는 중압감을 주던 할머니의 서재. 그러나, 이제는 항상 평안한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게 된 지혜의 공간.
끼익, 금속제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늘 들어왔던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래, 왔구나. 게 앉거라.”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너무 드문드문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 입 발린 말이 제법 많이 늘었구나.”
내 말에 작게 코웃음을 치는 할머니.
이전의 서태후 소리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겨울철 강물처럼 얼어붙었던 표정은 조금 녹아내린 듯 부드럽기까지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얹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서준이 네가 앉은 그 자리는 원래 여유가 없는 게다. 어깨 위에 수십만 명이 올라타 있으니, 바쁘지 않을 수가 없거늘.”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큰 결정을 하기에 앞서, 선인의 지혜는 늘 필요한 법이니까요.”
“내 김원철이 고 뺀질거리는 놈에게 대략적인 전말은 먼저 들었다. 철화 반도체를 인수하기로 결론이 났다지?”
아까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사라져버린 김원철 아저씨. 그때 이미 서재에서 무언가 두 사람만의 사담을 나눈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할머니는 이내 내게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국방부 신무기 개발사업을 위한 중간다리 역할이지만, 철화 반도체는 그 자체로도 잠재력이 있는 기업이다.”
“그 말씀은 역시….”
“그래. 이번 기회에 철화 반도체는 반드시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할 터. 그리고.”
잠시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앉은 채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할머니.
잠시 서재에 찾아온 침묵.
할머니는 평소 보인 적 없던 묘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마치 무언가 연주한 지 오래된 악보를 기억에 의존해 연주하기라도 하듯.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이것 참, 피는 못 속이는구먼. 네 애비 또한 이전에 철화 반도체에 손을 대려 한 적이 있었지.”
“아버지가… 말입니까?”
약 20년 전쯤, 탄약그룹이 급격히 확장하던 시기.
여기저기서 자금 여력이 되는 대로 회사를 사들였다는 이야기는 한 번쯤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철화 반도체를 인수하지 못해 안타까워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
옛 기억을 반추하던 할머니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말을 건넸다. 아련한 눈빛과 함께.
“그래. 점점 똑 닮아가는구나. 생긴 것이나 하는 행동이나, 전부.”
이제 세상을 떠난, 아버지라는 먼지 쌓인 옛 악보의 연주가 끝난 할머니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음 장을 넘겼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오선지 위에 잠시 멈춘 주름진 손가락.
눈에 들어온 다음 장의 악보에는 도돌이표라도 적혀 있는 모양이었다.
방금 연주했던 것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화음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앞으로의 곡 진행이 더욱더 기대되는 듯한.
“늙은이 생각을 듣고자 온 것이면, 내 굳이 장황하게 떠벌릴 생각은 없다. 그저.”
그 순간, 유리창 안쪽으로 들어온 저녁노을. 햇빛은 할머니의 책상에 놓인 회색빛 신문을 비추었다.
폐단으로 가득 찼던 탄약 전자의 개혁, 그리고 이번 철화 반도체 인수 건에 대해 논설하고 있는 특집 기사를.
“쭉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게다. 서준이 네 녀석이 가고자 허는 목적지까지 흔들리지 않고.”
* * * *
여의도 K 호텔.
늘 문제가 많던 예의 펜트하우스 층에서는 평소보다 몽롱한 향이 덜 풍겨 나왔다.
긴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 입가에 댄 파이프를 잡았다 뗀 서윤지.
여느 때처럼 하얀 가루를 태운 연기를 들이마신 그녀는, 조금 풀린 눈으로 내연남 김범호를 바라보았다.
“웬일이야, 김범호? 그렇게 미친놈처럼 입에 파이프 달고 살던 게, 오늘처럼 점잔빼는 날도 다 있고.”
“아, 달고 살긴 누가 달고 살았다고.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김범호.
차라리 서윤지를 따라서 한 모금 깊게 빨아 마시고 싶었던 마음이었지만, 그는 참아야만 했다.
그에게 나락으로 떨어질 절망과 더불어, 낡은 동아줄일지언정 희망까지도 함께 던져 주었던 탄약그룹의 주인을 떠올리면서.
‘자, 김범호 이사님. 그럼 내가 하나 묻겠습니다. 그 흡입했다던 하얀 가루는 투약 흔적이 언제 사라지지요?’
‘어… 어, 아마 일주일 내로 몸에서 빠지는 걸로 압니다. 이게 생각보다 막 세거나 엄청 중독성 있지는 않걸랑요.’
‘일주일. 딱 좋네요. 시나리오대로 진행하기에.’
무서울 정도로 환하게 웃던 탄약그룹의 주인.
김범호에게 있어 간통 혐의는 그대로 가지고 가되, 마약 투약만큼은 무죄로 만들겠다는 그의 말.
소파에 거칠게 몸을 던진 김범호는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 씨… 딱 좋긴 개뿔이 좋아. 아주 후달려서 사람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데.”
“…김범호?”
단순했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 김범호.
평소 잘 쓰지 않았던, 두뇌라는 기관을 혹사해서일까?
그는 옆에서 자신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는 서윤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혼자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야, 김범호!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지금?”
“어? 어어…? 왜 그래, 왜 또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하, 아주 듣지도 않았다? 네가 오늘 제대로 미쳤구나?”
카랑카랑한 서윤지의 목소리로 고막이 울리고 나서야 김범호는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물론 정신을 차렸다 한들, 그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지지는 않았지만.
“그 계집애는 어떻게 됐냐고 내가 몇 번을 물어!”
“아니, 계집애 누구. 난 너 말고 여자 아무도 없다니까. 도대체가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믿는 것이여.”
“누구긴 누구야. 지난주에 여기 청소부로 왔던 그 계집년 말하는 거지!”
“아… 그때, 그….”
하필이면 청소부로 잠입했던 유세나 보좌관에 대해 이상한 오해를 하는 서윤지.
무어라 말을 꺼낼 수도 없기에 답답한 가슴을 움켜쥔 김범호의 입에서 마음의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옘병….”
“표정 보니 맞네. 분명히 또 일 끝나고 따로 만나자 했겠고.”
사실이긴 하지만, 그 이면은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 거짓말을 늘어놓기에는 재능이 없는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걔는 그… 사실 따로 보자고는 했는데, 그렇게 막 잘되지는 않았어.”
“아주 자랑이다, 등신아.”
“끄합!”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김범호의 맨살 등판 위에 날아든 서윤지의 여래신장.
자신이 만들어낸 벌건 손바닥 자국을 본 서윤지는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철화 반도체랑 지분 맞교환 끝나면 임재호 그 인간하고 이혼까지 금방이야. 알아들어?”
“거럼. 당연하지.”
“그 말은, 그때까지 괜히 다른 년한테 눈알 굴리면 김범호 너는 나한테 죽는다는 거야. 이것도 알아들을 수 있겠지?”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범호의 모습. 서윤지는 그것이 퍽 귀여웠던 모양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양 볼을 잡은 채, 짧은 입맞춤을 한 서윤지.
블라우스 단추를 모두 채운 그녀는, 여성용 재킷을 걸치고는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자신이 애완동물로 여기는 이 멍청하지만 매력 있는 남자가, 실상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칼날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로.
“얼마나… 걸리는데? 그 철화 반도체 건 말이야.”
“오래 걸리지는 않아. 길어야 한 달 정도? 바로 오늘 오후부터, 드디어 입찰 과정이 시작되니까.”
오늘따라 조금 이상한 내연남. 그러나 서윤지는 그런 작은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의 심리적 여유가 있지 않았다.
이곳, 여의도 K 호텔을 떠나, 얼마 걷지 않아 나오는 산업은행.
바로 그곳에서… 서윤지 그녀의 모든 것이 결정될 터이니.
“내가 이길 수 있어. 아버지, 언니년들, 남동생까지 전부. 그러려면….”
대리석 바닥으로 된 복도에 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
꽉 쥔 그녀의 주먹에 색칠한 손톱이 날카로운 의지처럼 조금씩 박히었다.
“한서준. 그놈부터 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