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맞물려가는 톱니바퀴(1)
산업은행 여의도 본관은 마치 자본주의라는 종교의 신전답게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높은 천장 아래 쏟아지는 겨울 해의 은은한 빛.
그것은 이 신성한 공간 아래 금융의 미사를 드리러 온 이들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공교롭게도 방문 시간이 겹친 모양이었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이는 서윤지의 모습.
“간만에 뵙습니다. 서 대표님. 저번 전경련 모임 이후 처음이지요?”
“우리가 서로 여러 번 본다고 한들 좋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한 회장님?”
“그도 그렇지요. 아무래도… 서 대표님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니까 말입니다. 회사 일이든, 개인 일이든.”
불쾌함으로 점철된, 예의 바른 인사말이 형식적으로 오갔다.
여전히 내게 적대감을 감추지 않고 버젓이 드러내는 서윤지.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에 수많은 것을 투영한 듯, 여러 색으로 덧칠한 것처럼 보였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질시라는 붉은색.
한없이 아래에 있는 자신을 마주할 때 느끼는, 열등감이라는 짙은 청색.
그리고… 얄궂은 남동생의 존재가 나와 꼭 겹쳐 보이기에 느끼는, 불쾌함이라는 보라색까지.
그 응축된 감정이 부득이하게 나를 향한 작금의 상황. 그러나….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습니다. 서 대표님.”
나 역시 피할 생각일랑 일절 없다.
이 정도 장애물조차 가볍게 넘어서지 못한다면, 스스로 이 자리를 지킬 자격이 없는 꼴이니까.
“서 대표님이 나를 어떻게 여기든 상관없이, 나는 그저 내가 나아갈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
탄약그룹이라는 회사, 작게는 가족과 측근들부터 크게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협력업체 직원들까지.
그들을 어깨 위에 지고 더 넓은 영토를 향해 말발굽을 내달릴 수 있겠냐는 첫 시험지. 그것이 바로 철화 반도체 인수전이니까.
“그렇기에…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서 대표님의 사정과 부딪히더라도.”
“…어디 오늘 이후로도 그런 말이 나올까 싶네요.”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에 신경질적인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떠나는 서윤지.
뒤돌아선 그 모습이 오늘따라 유달리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의 뭉치처럼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윽고 내 눈에 들어온, 그녀 뒤편에 서 있던 서국철 회장과 임재호 부회장.
두 사람은 서로가 실권을 쥔 후견인을 자처한다는 양, 각기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심지 끝까지 불을 댕겨 생에 마지막 불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는 엉성한 소꿉놀이를 끝내고 그토록 바라던 전리품을 챙겨가기 위해서.
“서국철 회장님께서도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편찮으셨다 들었습니다만.”
“노인네가 죽을 때 된 것이 무에 대수라고. 그런 것 따위야 개의치도 않네만, 이거 영 안녕치는 못 허네.”
얼굴에 띈 언짢은 표정을 감출 생각일랑 일절 없어 보이는 서국철 회장.
그는 은밀하게 진행해야 할 판에 갑자기 나타나 재를 뿌린 내게, 여과 없는 힐난의 말을 내뱉었다.
“가족만이 참가할 수 있는 이 판에 굳이 탄약그룹이 불청객으로 올 줄은 몰랐으니 말일세. 아니 그러한가?”
“괜히 어깃장을 놓아서 죄송합니다만, 가짜 가족놀이보다 더 중요한 게 제 어깨 위에 있어서 말입니다.”
“말은 잘 허는군. 역시 이어지는 핏줄은 못 끊어내는 법이지. 자네도, 자네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뒷말을 흐리는 서국철 회장.
미처 못다 한 자신의 늦둥이 아들에 대한 것을 입안으로 삼킨 그는, 지팡이에 몸을 싣고는 그대로 안쪽으로 떠나가 버렸다.
절뚝거리는 발걸음. 균형이 맞지 않는 움직임은, 태엽이 다한 인형의 마지막 몸부림을 연상케 했다.
“한 회장과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이런 자리가 되다니. 이거 유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만.”
두 부녀와 내가 나누던 대화를 가만히 바라만 보던 임재호 SA그룹 부회장.
그저 한없이 사무적인 기계 같은 얼굴. 그러나 원치 않은 가족놀이에 외부자로서 참여한 그에게, 더 이상의 인내심은 없어 보였다.
복잡하게 얽힌 철화그룹 서씨 집안의 가정사.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최대한 빨리 전리품을 챙기고 이 어설픈 가짜 가족의 연을 끊는 것뿐일 터.
“나 역시 여기에 들인 공이 많거든. 아주 지긋지긋할 만큼 말입니다.”
“지긋지긋… 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아직 밥이 설익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임 부회장님께서는, 조금 더 마음고생하실 운명이거든요.”
“뭐요?”
불쾌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
분명… SA 그룹의 정보력이라면 서윤지가 바깥에서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터다.
“전리품은 못 드립니다. 하지만… 어쩌면 제 손으로 직접 그 마음고생의 원인 정도는 끊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임재호 부회장의 모습.
손목을 틀어 시곗바늘에 표시된 숫자를 보니, 어느새 성큼 다가온 예정된 시각.
붉은색 넥타이를 고쳐 맨 나는 그의 어깨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잔향처럼 말 한마디를 남겼다.
“이제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릴 때가 되었으니까.”
* * * *
“하… 씨, 진짜. 똥을 밟아도 이렇게 밟냐.”
서울 강남 경찰서 앞.
노란색 고급 스포츠카에서 위쪽으로 문을 열고서 내린 김범호.
의경이 보초를 서는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그는, 애꿎은 자갈 하나를 발로 차고는 화단 근처 디딤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범의 아가리를 향해 제 발로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김범호가 무어라 읊조렸다.
“내가 미쳤지. 그 이쁜 애들 그렇게 많은데, 하필 서윤지랑 그 짓거리를… 이거 아부지 아는 순간, 바로 뚜드려 맞고 미국으로 쫓겨날 게 뻔한디.”
비록 서자가 벌인 일일지언정, 집안 내에서 벌어진 일이 풍문으로 비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T그룹의 회장.
아마 그 불같은 성격상, 오늘 김범호의 엉덩이에도 T그룹 회장이 휘두른 골프채로 불이 붙을 것이었다.
애꿎은 동백꽃 잎사귀만 한 장 한 장 떼어내는 것만 반복하는 김범호. 지난주, 급하게 부른 변호사의 자문을 들었던 그였기에 이제 와서 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 그래서. 이거 해결 방안 같은 건 좀 어떻게 안 되는 거예요, 변호사님?’
‘상대방이 말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그 증거 자료가 사실이라면, 지금은 그쪽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어느새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동백꽃. 마지막 잎사귀에 서려 있던 얼음 알갱이를 아무렇게나 소매에 닦아낸 김범호가, 스스로에게 타협하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확실히 감옥보다는 미국이 낫긴 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 김범호. 어느새 경찰서 유리 문손잡이의 금속 질감이 그의 손으로 전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서윤지는 망해도 나는 살겠지. 일단 변호사 말대로, 그리고… 한서준이 그놈이 시킨 대로 가자.”
* * * *
대어(大魚).
산업은행이 오랜 시간 대주주 지분을 쥐고 있던 철화 반도체.
그 상징성에 걸맞은 대우는, 인수전의 처음을 산업은행장의 수장이 직접 진행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붉은색 카펫을 따라 연단 앞에 걸어 올라간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
“영 꼰대지? 암만 봐도.”
“어련하겠습니까. 금융 엘리트 정체성 가지고 평생 산 사람인데.”
그 실물은 처음 본 김원철 아저씨.
마치 수산 시장 수족관에 들어간 신기하게 생긴 물고기를 품평하듯, 아저씨는 관상가 흉내를 내기에 바빴다.
“꼬장꼬장하게도 생겼다야. 딱 보니까 자기 윗선 지시는 무조건으로다가 밀어붙이는 스타일.”
“그러니 공정성이라는 그 모호한 단어에 그렇게 목을 걸지 않았겠습니까. 뭐, 그 덕분에.”
지이이잉, 내 손아귀에 쥔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
자그마한 화면 속에 적힌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본 나는, 당장이라도 승기를 잡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유세나 보좌관] 방금 김범호 쪽 자수 완료되었습니다. 추가 사항 발생 시,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일이 편하게 되어가고 있으니 다행이죠.”
“흐흐흐. 드디어 시작했구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둘 다.”
이젠 완전히 깔려버린 판.
마이크 쇳소리에 섞여 나오는 김한성 산업은행 총재의 목소리.
그는 아직도 자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내가 설계한 판 위에서 춤을 추는 목각인형이라는 것을.
“아, 아. 크흠, 먼저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부터 철화 반도체 인수에 대한 건의 진행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당을 겸한 행사장은 연단을 중심으로 바깥쪽으로 반원이 둘러싼 형태였다.
그 반원의 양 끄트머리에 앉은 인수 희망자들. 참 얄궂게도 내 눈에 보이는 모습은, 서윤지의 긴장한 표정이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가시를 뾰족하게 내민 채, 당장이라도 다가오는 포식자의 앞발 사이를 찌를 듯한.
-뎅그렁!
이윽고 들려오는 황동제 종이 울리는 소리.
드디어… 희망 인수가액을 적어넣을 시간이 찾아왔다.
받아든 흰 종이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던 내가 김원철 아저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상대와 15% 내의 차이가 나야 합니다. 탄약 경제 연구소에서 마지막으로 뽑힌 금액이 얼마지요?”
“최종 추산 금액이 3조 7,000억 원. 데이터 자체는 내가 봐도 합리적이여.”
3조 7,000억 원.
회귀 전, 실제 철화 반도체 인수 금액인 3조 원보다 훨씬 더 뛰어버린 금액.
숫자는 합리적이었다. SA 그룹의 여유 자금과 철화그룹 지분의 가치. 은행 이자율과 조달 가능한 자본의 규모까지 전부 고려했으니까.
“그러니까 저쪽이 3조 1,450억 원부터 4조 2,550억 원 사이의 금액만 적어 내면 되는 거지. 이만하면 밑에 애들이 계산 잘 한 겨.”
그러나… 데이터로 표현할 수 없는 직감이라는 판단 근거.
정면에 보이는, 상대 쪽 이해 당사자 세 명.
이곳, 강당에 들어오기 전부터 느꼈던 그들의 감정선은 분명 갈망하고 있었다. 철화 반도체라는 존재를,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기를.
“조금… 부족하네요. 예측값과 현장과의 괴리가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그게 무슨 소리여?”
“저기 저 세 사람의 욕망. 숫자로 환산하기 힘든 저 욕망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오늘 느꼈거든요.”
재킷 안쪽에서 꺼내든 만년필 한 자루.
묵직한 잉크 냄새와 함께 금속 펜촉이 흰 종이에 닿는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씁시다. 아니, 더 써야만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가면 딱 맞지 싶습니다.”
“도대체 얼마를 쓰려고 그러는디….”
서걱거리는 소리. 마지막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나온 최종 결괏값은… 이제까지의 예측치를 아득하게 벗어난 것이었다.
“아… 아니! 회장님아,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