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80화 (80/300)

80화맞물려가는 톱니바퀴(3)

“아주 말세여, 말세. 쯧쯧쯧….”

초저녁부터 동네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노가다꾼 김씨. 그의 시선은 가게 한편에 놓인 낡은 브라운관 TV를 향했다.

-T그룹 차남 김범호 이사와 SA-철화 테크윈 서윤지 대표의 간통으로 세상이 떠들썩한 가운데, 마약 관련 혐의 또한 수사선상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뎅그렁, 찌그러진 막걸리 잔이 탁자 위에 거칠게 놓이는 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벌건 얼굴의 술꾼이 토해내는 한 마디.

“있는 것들이 말이여! 무슨 동네 개새끼도 안 할 짓이나 하고 다니고 말이여!”

“어따, 김 형. 또 취해부렀어.”

“취하긴! 저거 봐라, 저년 저거. 즈 서방 놔두고 외간 남자랑 붙어먹은 년!”

화면에 비친 서윤지의 사진. 그녀에게 얽힌 각종 혐의가 나열되는 가운데, 화면이 바뀌고 앵커가 다음 소식을 전했다.

-서윤지 대표의 논란으로 인해 철화 반도체 인수전 또한 상당히 예상 밖의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요.

-산업은행 측에서는 최종 공정성 평가에서 탄약그룹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최근 논란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쓴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탕!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친 노가다꾼 김씨.

소맷자락으로 입가에 묻은 막걸리를 닦아낸 그가 입을 열었다.

“거럼! 그래야지! 철화 반도체, 그 큰 회사가 저런 것들 손에 넘어가면 쫄딱 망하는겨! 아주 순식간에 파산한다 이말이여!”

“하이고, 김 형! 그만 마시고 좀 가자고! 꼴에 자기도 파산 한번 해봤다고 또 유식한 척은.”

“뭣이여?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아주 말주접을 떨고 앉아있네잉!”

쨍그랑!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선술집 분위기.

술꾼들의 몸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가게 집기가 공중을 날아다녔고, 접시 몇 개는 브라운관 TV가 있는 쪽을 향했다.

“하이고! 싸우지 좀 마소! 그래 치고받을 거면 자기들 집에 가 카든가! 와 남의 술집에서 행패인교!”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선술집 사장 할머니.

이 촌극 한가운데, 접시를 맞아 액정에 금이 간 브라운관 TV.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는 뿌연 화면 속, 갑자기 전환된 장면에서는 상단 좌측에 ‘실시간’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서울의 모 경찰서 앞에서, 고개를 늘어뜨린 서윤지의 모습과 함께.

-네. 지금 서윤지 SA-철화 테크윈 대표가 포토라인에 섰습니다. 현장 연결합니다.

* * * *

“서윤지 대표님! 간통, 마약 투여. 모든 혐의를 전부 인정하시는 겁니까?”

“성실히 수사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벌가 사건·사고 사후 처리 발언의 정석 코스를 밟고 있는 서윤지.

그녀는 ‘모르겠습니다.’라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라는 식의 변호사가 써준 모범답변만을 앵무새처럼 말하고 또 말했다.

천둥처럼 쏟아지는 카메라 셔터 속에서, 지금 이 순간보다 훨씬 더 모멸적인 상황을 반추하며.

‘하등 쓸모없는 년! 네 애미도 그랬다!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네년만 낳아 놓고 제멋대로 죽어버렸지!’

철화 반도체 건으로 인해 병상에 드러누운 서국철 회장.

병마가 찾아온 그의 얼굴은 당장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진한 흑색 빛을 띠고 있었다.

‘쿨럭, 쿨럭! 이… 쓰레기 같은 년! 네년 탓에 철화그룹 서씨 집안의 승계가 꼬일 대로 꼬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라!’

끝까지 올라가지도 않는 팔로 힘겹게 지팡이를 든 서국철 회장.

아프지도 않은, 그러나 너무나도 아픈, 지팡이를 맞았던 그 팔을 움켜쥐며 서윤지가 고개를 들었다.

“서 대표님! 철화 반도체 인수 실패의 주요 원인이 이번 혐의라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무어라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포토라인에서 떠나는 서윤지.

습관처럼 깨문 아랫입술.

카메라에서 쏟아지는 빛줄기를 등 뒤로 받은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험악하게 바뀌었다.

경찰서 안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는 서윤지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짙은 화장 아래 감춘, 붉게 달아오른 한쪽 뺨이 유독 얼얼한 모양이었다.

명목상 남편인, 임재호 부회장에게 얻어맞은 뺨이.

‘넌 뭐 하는 년이냐?’

퉤, 바닥에 피 섞인 침방울을 뱉어낸 서윤지는 제 남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쇼윈도 부부로 살겠다고 말했잖아. 당신 머리가 나쁜가? 뭘 또 새삼스럽게 난리지?’

‘하! 이년이 아직도 약 기운이 안 가신 건가! 지금 이 꼴을 만들어 두고 감히 무슨 낯짝으로 입을 놀려!’

다시금 팔을 걷어 올리던 임재호 부회장. 서윤지는 그런 그의 몸 안쪽을 향해 한 발짝 걸어 나갔다.

붉게 물든 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진행할 거야. 협조해.’

‘미친년. 철화 반도체가 끝났다. 내가 너희 집안에 협조할 이유도 없고, 협조해서 네년이 살아날 방법도 없고!’

‘날 핏줄 취급도 않는 그 서씨 집안 빼고. 나하고만 협조하자고. 방법이 있어. 당신도, 나도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철화 반도체 인수가 무산된 이후 난감해진 임재호 부회장.

경영 일선에서 업적을 쌓고 주주들에게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지금 상황은, 다시 올라가는 그의 손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

떨리는 임재호 부회장의 눈동자.

턱 끝으로 서윤지를 향해 말할 것을 지시한 그의 귓가에 들린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가능성 있는 제안이었다. 차마 거절의 말을 던지기 힘들 정도로.

‘중국. 중국 반도체 업체를 인수할 거야. <상하이 캐피탈>이 중간다리를 놓은 업체를.’

* * * *

탄약그룹 본사 꼭대기 층, 회장 집무실.

펑! 오전 일정을 마치고 약간 늦은 출근을 하니, 들어가자마자 웬 폭죽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으앗, 깜짝이야!”

“서프라이즈. 프레지던트 한. 콘그래듀레이숀!”

역시나 예상했던 바와 같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탄약그룹 전체를 통틀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고깔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채 입에 리코더를 문 김원철 아저씨.

바람 소리가 색색 새어 나가는 그 싸구려 리코더에서는, 생일 축하 노래에나 쓰일 법한 멜로디가 어색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철화 반도체 인수를 축하합니다.”

“뭘 또 따로 축하하고 그럽니까, 남사스럽게. 아닌 말로 어제도 같이 축하연에 있으셨잖아요.”

철화 반도체 인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탄약그룹 소유의 호텔 플로렌스에서는 성대한 규모의 축하연이 열렸다.

정계, 재계의 숱한 인사가 모인 축하연. 워낙 철화 반도체라는 기업 자체가 골치였긴 했던 모양이다. 단순 장관급 인사를 넘어 국무총리까지 참석했으니까.

‘한서준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철화 반도체… 아니, 이제는 탄약 반도체겠네요. 부디 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하기를 바랍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총리님.’

‘감사는 제가 해야지요. 역시 젊은 기업인이 나서야, 뭔가 일이 훅훅 해결되고 그러나 봅니다. 허허허.’

아직도 내 손끝에는 그의 악수의 흔적이 통증처럼 남아있었다. 거친 들짐승처럼 털이 수북한 양반이 세게도 쥐어댔으니.

“총리 양반이 어지간히 기대하는 눈치드만. 숫제 인간 비데를 자처하던데?”

“인간 비데… 어감이 좀 그렇긴 한데, 그 양반은 그럴 법도 합니다. 그 자리에 온 사람 중에 빈 살만 왕세자도 있었으니까요.”

철화 반도체 인수 과정에서 쩐주 노릇을 자처한 빈 살만 왕세자.

따로 마련된 별실에서, 나는 그에게 이후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부터 향후 IT산업의 발전 로드맵을 그려 보였다.

‘그래서… 해당 사업으로 IT 역량을 극대화한 후, 곧바로 스마트폰 OS 개발에 나설 겁니다.’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까지 전부 통합한다라. 성공만 한다면 투자금 회수 정도는 문제가 아니겠군.’

‘아주 빠르게 전 세계 시장을 먹어 치울 겁니다. 2년… 길어도 3년 이내에.’

<코코아>에서 시작된 로드맵.

손안에 든 작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에 빈 살만 왕세자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필요한 모든 자금을 일절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블라인드를 걷어 쏟아지는 겨울 햇살을 받아낸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그 산만 넘으면 됩니다.”

“거의 다 넘은 거나 다름없잖어. 철화 반도체 인수하고서 산업 설비 쪽 점수는 거의 퍼펙트니까.”

“그건 저쪽이 지금 상태 그대로 주저앉았을 때 이야기고요. 이제까지 한 것으로 봐서는… 그냥은 안 넘어갈 겁니다.”

서윤지와 임재호 부회장.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사건 이후로도, 두 사람이 이혼 소송을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일절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수풀 속에서 조용히, 날카로운 발톱을 발밑에 감춘 채로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손에 힘을 주어 옆에 놓인 대형 목재 지구본을 한껏 돌렸다.

“일단, 실장님께서 좀 고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 그러니까 또 고생을 하라고? 여기서 더?”

빙그르르 돌아가는 지구본.

그와 함께 내 머릿속 어딘가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잦아드는 회전. 손끝에 닿는 어딘가 익숙한 공간.

외부에서 이번 일을 관망하던 자들이 있는 바로 그곳은.

“그룹 본부에 새로운 조직을 만들 겁니다. 오로지… 해외 정보 수집만을 위한 조직을요.”

광저우.

<상하이 캐피탈>이 서윤지를 위해 만들어준 유령 IT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

* * * *

철화 반도체 인수 건 불발로 인해 쓰러져버린 서국철 회장.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함박웃음을 지은 이들은 핏줄로 이어진 딸들, 서윤아와 서윤미였다.

“너도 들었지? 그 망할 영감탱이 쓰러졌다는 거.”

벅차오르는 듯한 모습의 첫째 서윤아. 조금 흥분한 듯한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분간 그 사생아 새끼한테 그룹 넘기려는 짓거리는 못 할 거야. 진짜 천만다행이지. 안 그래?”

“하아, 언니. 지금 그게 맞는 말이라 생각해?”

제 언니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둘째 서윤미.

언니보다 배는 더 명석한 그녀는 이 상황을 그리 달갑게 보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탁자 위에 올려진 문서들. 이미 기업법 전문 변호사를 통해 계산이 끝난 그 문서에는 예상 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뭔데? 철화그룹 지분 구조 개편안? 미친… 진짜 이걸 하겠다고? 영감탱이가?”

“죽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확신한 거지. 그래서 해선 안 될 짓까지 하려는 거고.”

병색이 완연한 서국철 회장. 시간이 없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극약 처방뿐이었다.

서씨 집안으로 이어지는 승계. 부작용이 있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비록 철화그룹의 팔다리 하나씩을 외국 자본에 떼어줄지라도,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기에.

“노친네가 진짜 미쳤나 봐! 이제… 이제 어쩌면 좋지?”

“뭘 어쩌면 좋긴. 남은 건 하나뿐이지.”

자료를 들고 벽난로 앞으로 다가간 서윤아.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한 장 한 장 종이를 집어넣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미친 망상이 현실이 되기 전에… 먼저 태워버려야지. 영감탱이도, 그리고 그 핏덩이 사생아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