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피보다 진한 돈(1)
부산, 철화 의료원 특실.
가슴팍을 움켜쥔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서국철 철화그룹 회장.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는 것조차 힘든 모양이었다.
“회장님, 지금 막 막내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곧장 안으로 들라 해. 병원 직원년놈들 입단속 한 번 더 하고.”
사막에 옮겨 심어진 나무처럼, 이미 비쩍 말라비틀어진 그의 손. 앙상한 손끝이 뻗어진 곳은 창문 너머의 나무였다.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마지막까지 붙어 있던 잎새는 더는 버틸 힘이 없었나 보다.
떨리는 서국철 회장의 손. 바람에 흔들리는 황량한 가지는 그를 향해 어서 오라며 인사하듯 손을 내미는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아버… 지.”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온 앳된 소년.
소년은 이 상황이 조금은 어색한지 몸을 쭈뼛거리며 제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윤석이.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무거운 왕관을 머리 위에 얹기엔 아직 한참이나 어린 소년.
서국철 회장 또한 그것을 알기에, 그는 제 아들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철화그룹이라는 왕관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봐, 임자. 박 변호사가 준 그거. 이리 가지고 와라.”
“예. 회장님.”
병실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금고. 금속 문을 연 비서실장이 꺼낸 것은, 철화그룹 지주사 지배 지분 증여에 필요한 문서였다.
얼굴에 솜털이나 조금 올라왔을 소년을 옆에 앉힌 서국철 회장.
그는 서류 한 장 한 장을 제 손으로 넘기며 급히 승계 작업을 시작했다.
“그래. 그렇지. 거기에 지장 찍고 서명까지 하면 된다. 다음 장에도 똑같이.”
조막만 한 손으로 제 아버지의 말에 따르는 소년.
아직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어린 아들의 모습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걱정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서국철 회장.
“쓰면서 듣거라. 당장 내일부터 계열사 사장단과 만나야 헌다. 앞으로 5년간 이 애비를 대신할 고명대신들이니 반드시… 쿨럭! 쿨럭!”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피가….”
흰 환자복에 피를 쏟아낸 서국철 회장.
최근, 요 며칠 새 그는 급속도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바깥에서 거센 입김을 불기라도 한 듯이.
“쿨럭, 쿨럭…! 되었다. 이 애비는 괜찮으니 그거나 마저 하도록 허고.”
어느새 마무리된 문서 작업.
서국철 회장은 서명이 끝난 서류를 충복인 비서실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처리까지 전부 얼마나 걸리겠나? 최대한 빨리한다손 쳤을 때.”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 그때까지는 내 죽어도 죽을 수가 없겠구먼.”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팍을 움켜쥔 서국철 회장.
그는 서서히 멈추기만을 바라는 이 느림보 같은 심장이 오늘따라 유독 야속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핏기 섞인 한숨을 토해내고 나니, 갑자기 바깥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실례합니다. 회장님, 복약 시간이십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담당 의료진의 모습.
그들에게서 한 뭉텅이나 되는 약을 받아 든 서국철 회장. 그는 평소 곧장 입에 약을 털어 넣었던 것과는 달리, 그저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의사 양반. 약이 바뀐 겐가? 양이 는 것 같은데?”
“아, 아무래도 일전에 쓰러지신 이후로 폐와 심장 기능이 더 떨어지신지라… 좀 더 센 약을 추가했습니다.”
의사는 시선을 피한 채, 그저 기계적으로 약리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고지했다.
효과가 강한 만큼 부작용이 심하지만, 생명 연장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말과 함께.
“그렇구먼. 알겠네. 의사 양반은 더 말할 필요도 없어.”
피로가 극에 달한 서국철 회장.
흙빛 얼굴을 한 그는 손바닥에 알약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살려면 괴롭더라도 버텨야겠지.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산송장처럼 눈만 떠 있으면 될 터이니.”
열 개 가까이 되는 약을 모두 삼킨 서국철 회장.
몽마(夢魔)라도 찾아온 걸까? 점점 잠겨만 가는 그의 눈꺼풀.
점점 가늘어져 가는 시야 주위로 찾아온 어둠. 어느새 자리에 누운 서국철 회장의 힘 빠진 목소리가 작게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후우… 조금 피곤하구먼.”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아아, 그래. 거, 잠시 나가들 있게. 내 눈 좀 붙여야겠으니….”
꺼진 카메라 렌즈처럼, 완연히 어둠으로 접어든 서국철 회장의 시야.
그 후, 앙상하게 메마른 노인의 눈이 다시 떠지는 일은 없었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몽마(夢魔)가 아닌, 검은 옷을 입고 망자를 인도하는 사신이었기에.
* * * *
중국, 광저우 IT 산업단지 외곽.
폐허나 다름없는 반도체 공장. 아니, 공장이었던 무언가.
차에서 내린 이택규 전 사장. 그는 이 황량한 풍경을 보고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곧바로 뒤통수를 긁었다.
“하, 이건 글러먹었는디.”
난색을 표하는 이택규 전 사장.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산업시설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그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거 때려죽여도 작동 못 혀유. 그냥 싹 다 고철로 그램 수 재서 파는 게 제일 이득입니다.”
“어떻게,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
이택규 전 사장의 뒤를 따라 공장에 들어선 한 여성.
칠흑 같은 검은 단발머리를 한 서윤지는 얼굴에서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급 품질이라도 생산만 되면 상관없어. 당신, 이쪽 최고 전문가라며? 뭐라도 해결책을 만들어 봐.”
“아니, 이런 고물딱지로 무슨 반도체를 만든다고 그러쇼. 어떻게 고친다손 쳐도 시장에서 팔릴 건 뽑아내지도 못해부러.”
새파랗게 어린, 거진 조카뻘의 서윤지에게 반말을 들은 이택규 전 사장은, 괜히 툴툴거리는 태도로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고물딱지 기계로 고물딱지 반도체 찍어봐야 어느 미친놈이 산다고… 괜히 허공에 용쓰지 말라는 게 내 의견입니다.”
“그러니까, 수리는 된다는 것이로군.”
왜 결론이 그런 식으로 나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이택규 전 사장.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땍땍거리는 계집애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말을 좀 들어 먹으라며 일갈하는 상상을.
그러나.
“크흠. 수리, 수리야 가능합죠. 제가 또 지휘봉 잡고 오더 내리면, 두어 달 만에 순식간에 껍데기는 만듭디다.”
찌푸린 표정과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긍정의 말.
최근 카지노에 맛을 들이느라 가진 돈을 거의 탕진한 그였기에 돈이 급한 상황.
굳이 먹이 주는 손을 물 생각은 없는 이택규 전 사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대답을 만족스럽게 들었는지, 그제야 얼굴에 웃음기가 돌기 시작한 서윤지.
“뭐야, 할 수 있으면서 쓸데없이 서론이 길었던 거네? 그럼 결론은 났으니, 이제 당신이 최대한 빨리 복구 작업 지휘해서 성과 만들어 봐.”
“아니, 저기 그런데 우리 서 대표님 자꾸 말씀이 지나치게 짧으신 부분이….”
“성과급은 공장 복구 작업 끝나는 대로 지급. 기존 연봉과 별개로 원화로 5억 원. 어때?”
“필! 승! 이 한 몸, 뼈가 부서지도록 충성을 다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요, 서 대표님!”
돈 앞에서는 반말 따위 중요치 않다는 것을 증명한 이택규 전 사장.
민간인 따위에게 경례하지 않는다는 30년 신조는 카지노의 반짝거리는 불빛 앞에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도박 중독자 늙다리 부리는 것은 이걸로 끝이고.”
경례 자세로 굳어버린 이택규 전 사장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공장 바깥으로 나가버린 서윤지.
그녀는 얼마 전 있었던 <상하이 캐피탈>의 옌룽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산업 설비 점수에서 탄약그룹을 다시 앞서가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서 대표님.’
철화 반도체를 빼앗기고 절망에 차 있던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던 <상하이 캐피탈>.
그들이 건넨 선택지는 미처 독을 제거하지 않은 복어나 다름없었다.
그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거품 산업 설비. 분명 중국 반도체 공장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적자투성이가 될 것이 분명했지만, 서윤지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을 따내기만 한다면, 그렇게 탄약그룹을 짓눌러버릴 수 있다면.’
분명 치명적인 독성이 달콤한 살 안에 박혀 있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상황.
이어진 옌룽의 말에 서윤지가 집어 든 복어 살은 점점 입가로 향했다.
‘그때까지… 여기 중국 공장에서 나올 손실의 절반은 저희 <상하이 캐피탈> 측에서 부담토록 하겠습니다.’
한 끗 차이로 영영 일어나지 못할 반신불수가 될지도 모르는 위험.
그러나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져 살이 지져지고 있는 서윤지에게는 그런 것쯤이야 전혀 중요치 않았다.
“한서준… 이제 그놈을 꺾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 위에는 잿빛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불쾌한 냄새. 근처 무허가 화장터에서 올라오는 사람 타는 냄새에 손가락으로 코를 쥔 그녀에게 무언가 묘한 직감이 찾아왔다.
“기분… 탓인가?”
스스로를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젓는 서윤지.
그러나… 그 순간, 코트 안쪽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한국에서 걸려 온 그 국제전화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그녀가 느낀 직감이 옳았음을 곧바로 증명했다.
“서 대표님! 지금… 회장님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어서, 어서 한국으로 들어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
흰 국화꽃 수백 송이 사이로 보이는 서국철 회장의 영정사진.
고인을 위해 울어주는 이 하나 없는 장례식장. 나는 상주 역할을 맡은 철화그룹 첫째 사위에게 맞절한 후,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크흐, 저기 저 액자 안에 들어간 영감님. 진짜 갈 때도 예술로 갔다야.”
나를 따라 바깥으로 나온 김원철 아저씨. 영정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저씨가 내게 무어라 귀엣말을 했다.
“본부인이 낳은 딸랑구 둘이, 영감탱이 먹는 약에 뭔 짓거리를 했다는 썰이 파다해.”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요. 서국철 회장이나, 두 딸이나 양쪽 모두 시간 싸움이었을 테니까.”
미처 호적에 정식으로 올라가지도 않은 건지, 장례식에 참석조차 하지 못한 꼬마 후계자.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두 딸을 향해 성토의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계열사 사장단.
철화그룹. 그 거대한 공룡의 몸통 한가운데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참으로다가 말세여, 말세. 그렇지?”
“돈은… 피보다 더 진하니까요. 아마 철화그룹 서씨 가문 그 누구도 진심으로 애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줄지어 선 조화에서 국화꽃 한 송이를 만지작거린 나.
조금 안쓰러운 기분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국철 회장의 죽음과 철화그룹의 분열. 과연… 이 모든 변수는 탄약그룹과 내게 어떤 인과율을 불러일으킬 것인가에 대해.
“비서실장님. 아무래도 장례식장에 조금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 아아. 그래, 그럴 만도 하네.”
백색의 꽃잎 사이로 점점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모습.
검은색 여성용 상복을 입은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도무지 읽기 힘든 표정을 얼굴이라는 도화지에 가득 칠한 채로.
“한서준… 회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