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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82화 (82/300)

82화피보다 진한 돈(2)

백색의 국화 꽃잎 사이로 보이는 서윤지의 모습.

그녀는 웃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 장례식임에도.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졌다가 허탈하게 내뱉은 웃음이 아니었다.

울다 만 벌건 눈으로 술에 취해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큼지막한 족쇄 하나를 벗어던진 듯 후련한 표정.

그리고 그 모습은 나와 눈이 마주한 순간,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한서준… 회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

주변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공적인 장소라 여겨서였을까?

내게 말을 높이는 서윤지.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찌푸려진 한쪽 눈가에 파르르 작은 경련이 일었다.

“저도 이런 자리에서 다시 찾아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쎄. 우리 한 회장님이 간절히 비는 것은 내 아버지의 명복이 아니라, 내 파멸이 아니던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늘어트리는 그녀.

복도 양옆, 백색의 국화꽃 조화 사이에서 나와 서윤지의 시선이 허공에 맞닿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수면 위로 올라온 불쾌한 대립각.

이미 복도에 지나다니는 재계 인사들 몇몇은 이 광경을 보고는 자기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철화 반도체 인수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으로 점화된 갈등.

굳이 불필요한 관중을 늘릴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이런 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은 것이 내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달리는 열차에 속도가 붙었다는 건 아실 겁니다. 서 대표님.”

“끝까지… 내 앞을 막고 계시겠다?”

시작되어버린 대립과 엉켜버린 갈등.

너무나도 깊게 얽힌 이해관계는 호랑이의 등에서 내릴 수 없게 만드는 법.

분노 때문일까?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 서윤지의 목소리.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인 내가 대답했다.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여기서 반대쪽으로 열차 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단지 내 위신이나 치적 때문이 아니다. 내가 머리 칸에 올라탄 이 탄약그룹이라는 기차에는 끝도 없이 줄줄이 이어진 칸들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돌릴 수 없는 방향타.

결심을 마친 내 입에서는 다소 잔혹하리만큼 단호한 말이 새어 나왔다.

“파멸의 굉음은 탄약그룹을 향할 겁니다. 그러니… 부디 불필요한 발버둥 없이 희생을 감내해주시길 바랍니다. 서윤지 대표님.”

“그럼 어디 한번 끝까지 잘 봐 두시죠.”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변한 서윤지의 얼굴에는 실타래처럼 엉킨 감정이 덧칠해져 있었다.

망자를 위한 향이 타오르는 냄새가 코를 찌름과 함께, 입을 연 그녀.

“더는 물러설 곳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포식자 위에 올라타 모가지를 물어뜯는지를.”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 속에 확고히 정해진 입장.

점점 몰려오는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며 복도를 가득 메웠다.

“후우….”

더는 길게 끌 것도 없는 상황.

머리칼을 위쪽으로 쓸어 넘긴 나는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뒤로 돌렸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것으로 하시죠. 보는 이도 많고, 서 회장님 가시는 길에 굳이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

“가시는 길이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윤지의 목소리. 점점 멀어져가는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작아지는 목소리는 내 귓가에 간신히 내려앉았다.

조금은 슬픈 듯한 느낌으로.

“여기 그 누구도 진심으로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곧바로, 내 눈에 보이는 상주들의 모습.

검은색 옷 위에 핀으로 고정해 둔 삼베 조각을 한 그들을 모습을 눈에 담으며, 나는 이 불쾌한 자리를 떠났다.

“저기 저 존속 살해범들까지도 전부. 안 그런가?”

* * * *

탄약그룹에 있어 관리직의 정수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십중팔구 백발의 노신사를 가리키며 이렇게 답할 것이다.

양택수 부회장. 그 어르신만큼 할 사람을 찾기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을 것이라고.

“허어, 과찬이십니다. 이 늙은이가 한 게 무에 있다고.”

“살짝 미친 회장과 아예 미친 비서실장이 폭주하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하시지 않습니까. 직원들 사이에서 명망도 훌륭하시고.”

“허허허. 회장님께선 농담도 잘하십니다.”

다시 찾은 양평 낚시터.

낚싯바늘에 떡밥을 끼워 멀리 흩뿌리듯 대를 던진 양택수 부회장.

퐁당, 약간의 소리와 함께 물에 잠긴 낚싯바늘은 잔잔한 호 모양의 물결을 몇 개 그리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있는 듯, 없는 듯, 수면 아래에 잠긴 채 수많은 일을 짊어진 제 늙은 주인처럼.

“부회장님께 늘 감사하지요. 특히나 이번 해외 정보 조직 창설에 많은 도움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저 자문 역할에 불과합니다. 허투루 살지는 않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물어다 주는 파랑새들도 아직 새장 안에 있을 뿐이고요.”

업계 전체에 걸쳐. 아니, 업계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정도로 발이 넓은 양택수 부회장.

단순히 재벌 그룹 산하의 인원들뿐만이 아닌, 하청 업체 중소기업에까지 그의 귀는 늘 열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SA-철화 테크윈. 그리고… 서윤지에 대해 세간에 떠도는 모든 말들을 들을 수 있게끔.

“그래서, 그 파랑새가 뭐라고 지저귄 겁니까?”

“우선 두 가지입니다. 먼저 서윤지 대표에 대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분히 저수지를 바라보는 양택수 부회장.

노인 앞에 놓여 있던, 미동조차 하지 않던 낚싯대에 무언가 반응이 왔는지 약간의 움직임이 보였다.

“서국철 회장이 그렇게 작고하기 직전까지, 서윤지 대표는 광저우 IT 산업단지 쪽 일정을 소화했다는 전갈입니다.”

물고기가 떡밥을 문 모양이었다.

흔들림이 심해지는 낚싯대.

나는 두 손으로 낚싯대 끝자락을 움켜쥐고는 서서히 힘을 주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떠오른 추론 한 가지.

“그렇다면 아마 이택규 전 사장도 거기 같이 있었을 테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확하십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택규 그 친구, 확실히 SA-철화 테크윈 쪽에 붙은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아예 산업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택규 전 사장.

예상했던 만큼. 아니,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더 한심하게 사는 그의 근황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기가 찰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불필요한 정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택규는 도박 중독 증상을 보인다 합니다.”

“도박… 카지노 말입니까?”

탄약그룹 소유의 호텔 플로렌스 초기 개장 업무를 도맡아 했던 양택수 부회장.

그 때문에 카지노 업계의 사람들과도 인연이 있던 모양이었다.

광저우 카지노 쪽에서 나름 큰 손으로 불리며 거액의 달러 뭉치를 아낌없이 써재낀다는 이택규 전 사장.

“늪에 빠진 게지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카지노, 카지노라….”

낚싯대를 타고 전해지는 격한 흔들림,

조금씩 릴을 감아올리며 하는 힘 싸움.

거칠어 보이지만, 섬세한 핀셋으로 자그마한 퍼즐 조각 하나하나를 맞추는 것과 같은 이 느낌은, 비단 낚시에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핏줄 솟은 팔뚝은 이내 몸쪽을 향해 당겨져, 점점 수면 위로 물고기를 끌어 올렸다.

마치… 이번 중국 관련 이슈처럼.

“<상하이 캐피탈> 쪽 정보는 어떻게 됩니까?”

“직접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서윤지 대표와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는 있습니다.”

찰랑, 물살 튀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낚싯줄에 매달린 채 내 눈앞에 펄떡이는 숭어 한 마리.

그리고 때마침 타이밍도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이 자리에서 직급으로는 제일 막내인 김원철 아저씨의 목소리.

“양 부회장님! 라면 다 됐어요! 들어와서 드실 겨, 아니면 제가 가서 서빙까지 해요?”

“내 자네헌테 너무 고생만 시키면 제 명에 못 살 게 뻔한데, 설마하니 서빙까지 시키겠나. 허허허.”

“또, 또, 혼자만 좋은 역할 다 가져가시고. 얼렁 오시기나 해요!”

자리를 정리하고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양택수 부회장.

탁본을 뜬 물고기를 대충 아이스박스에 집어넣은 나는, 그런 노인에게 말을 건네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딱 면이 퍼지기 전에 판단이 끝나서 다행이네요. 양 부회장님 말씀 듣고 나니, 어렴풋이 들던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걷다 말고 곧바로 뒤를 돌아본 양택수 부회장.

무언가 치기 어린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조금 불안한 표정의 그가 내게 조심스레 반문했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중국, 아무래도 제가 출장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광저우 시내에 있는 호텔 카지노… 전부를요.”

* * * *

시끄러운 음악을 배경 삼아 화려한 불빛을 내뿜으며 돌아가는 슬롯머신.

앙증맞은 물고기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유유히 거니는 영상과 함께, 그 속에서 떠다니는 행운의 숫자 7.

그 순간, 이택규 전 사장의 손이 그대로 큼직한 행운 버튼을 향했다.

“오케이… 거기서 스답!”

불가사리와 돌고래, 해마와 인어가 황금을 들고 유혹하는 헛된 세상.

늘 그러하듯, 세상은 꿈꾸는 자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저 처음부터 그와 같은 편이 아니었을 뿐.

“하… 나, 이거 진짜. 맨날 한 끗 차이로 못 먹네. 거기서 왜 또 불가사리가 나오고 지랄이여.”

“하이고, 행님아. 그 슬롯머신 같은 거 하지 말고 테이블이나 좀 앉자니까.”

어디선가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난 백덕규. 어느새 반 토막이 나버린 칩을 눈대중으로 세며, 그는 옆자리에 앉은 채,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블랙잭! 포카! 마, 서양화가 싫으면 동양화 쪽으로 가도 되고.”

“에헤이, 카드는 쳤다 하면 잃는다니까.”

“머신도 잃는 건 뻔한데, 그이 무슨 소린교?”

“에이, 옘병할. 그것도 그렇네. 내가 카지노를 끊던가 해야지.”

손바닥으로 슬롯머신 기계를 탕탕 두들기는 백덕규.

SA-철화 테크윈의 헤드헌팅 뢰주를 맡았던 그는, 최근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중국 반도체 회사. 그 겉껍데기에 불과한 회사가 그럴싸하게 포장지를 입을 때까지, 이택규 전 사장을 광저우에 붙들어놓는 일.

‘이 인간이 갑자기 웬 바른생활 어린이 선언을 하고 그라노. 괜히 불안하게.’

짜증과 함께 카지노에 안 오겠다 선언하는 이택규 전 사장.

비록 지키지도 못할 선언이었으나, 아직 한참이나 계약 기간이 남은 백덕규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조심스레 비위를 맞추기로 마음먹은 백덕규. 순간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 한 사내가 기억나기 시작했다.

가면을 쓴 채, 정체를 알 수 없던 부호 한 명. 주사위 게임만 한다던 그 남자 역시 파트너를 찾고 있던 상황.

“행님아. 그 카드가 싫다카믄, 주사위는 어떤데?”

“주사위? 그런 것도 있었나?”

조금 호기심이 동한 이택규 전 사장.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백덕규는 곧바로 영업을 시작했다.

“여 오는 사람 중에 주사위 좋아하는 놈아 하나 있다 안카나. 특히 그 옆에… 기깔나게 몸매 좋은 여자 하나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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