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83화 (83/300)

83화피보다 진한 돈(3)

“실망이구나, 이번 일은.”

“…….”

아들에게 있어 이토록 뼈아픈 아버지의 말이 또 있을까?

비수처럼 날아와 임재호 부회장의 가슴팍에 그대로 박힌 SA그룹 임계현 회장의 말 한마디.

휠체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동하기 힘든 몸. 그러나 노인의 정신만큼은 아직 총기를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어떤 노여움도 보이지 않은 채, 지극히 기계적인 힐난의 말을 이어나가는 임계현 SA그룹 회장.

“네 처를 똑바로 다스리지 못한 것이야 내 굳이 논하지 않겠다. 애초에 그 아이는 며느리로도 생각지 않았으니.”

“…송구합니다.”

“허나, 그룹의 백년지계를 다투는 사안을 고작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내 묵과하기 어렵구나.”

일어설 수 없는 다리 대신, 제 아들 쪽을 향해 앞으로 몸을 기울인 임계현 회장.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그 눈에는 그 어떤 분노나 역정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깊은 가련함. 부족하고 모자란 아들에 대한 애잔함이 가득 서려 있었을 뿐.

“역시… 역량에 한계가 있는 아이에게 내 너무 큰 짐을 물려 주었어. 돌고 돌아 내 탓인 게지.”

견디다 못해 눈을 질끈 감은 임재호 부회장.

그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두움 때문이 아니었다. 부족한 아들로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그 생각이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제게 욕이라도 내뱉지 그러십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제게 아무 물건이나 던지시는 것이 제가 덜 아플 것 같습니다….”

“어리석구나. 그리고 유약하기도 허고. 힘이 들 게야. 분명 괴로울 게고.”

답답한 듯, 가슴팍을 주먹망치로 두드리는 임재호 부회장.

뿌리를 좀먹는 괴로움은 그의 심장을 타고 자존감이라는 줄기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늘 그렇듯, 임재호 부회장의 고개는 수확하지 못한 벼처럼 한없이 수그러들었다.

그가 아내라고도 말하기 민망한 여자, 서윤지와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짝!

철화 반도체가 SA그룹의 품에서 그날, 산업은행 본관 테라스에서 임재호 부회장은 있는 힘을 다해 서윤지의 뺨을 후려갈겼다.

퉤, 피 섞인 침방울을 바닥에 내뱉던 그녀.

눈물을 보이지도, 불쌍한 척 아련함을 연기하지도 않던 서윤지. 그녀는 벌게진 뺨을 그대로 보인 채, 임재호 부회장 앞으로 다가가 말했었다.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진행할 거야. 협조해.’

악다구니를 쓰는 것인 줄로만 알았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바닥 위에 앉아, 생떼를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그녀의 말 한마디.

‘중국. 중국 반도체 업체를 인수할 거야. <상하이 캐피탈>이 중간다리를 놓은 업체를.’

구석에 몰린 상황에서 찾아낸 쥐구멍 하나.

충분히 수상했다. 충분히 미심쩍었다.

저 캄캄하고 스산한 구멍에 몸을 들이미는 순간, 그대로 어둠 속에 갇힐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러나 지금. 태산처럼 거대한 자신의 아버지라는 존재 앞에서, 임재호 부회장은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넘을 수 없는, SA 그룹의 거인. 그렇기에… 그는 가로질러서라도 자신의 역량을 보여야만 했다. 저 좁고 불길한 구멍에 자신을 집어넣을지라도.

“…어쩌면 철화 반도체를 떠나보낸 것이 더 이익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익이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고?”

몸은 휠체어에 앉아 아래에 있을지언정, 시선만큼은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는 임계현 회장.

그는 자세히 이야기를 꺼내 보라며 턱 끝을 조금 움직였다.

“내수용과 미국 수출 물량으로는 SA 전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기에… 이 이상의 확장을 노리려면 눈을 옆으로 돌려야겠지요.”

“어디 계속 말해 보거라.”

억눌렸던 무언가를 분출해내듯, 감정 섞인 설명을 이어나가는 임재호 부회장.

임계현 회장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성실하겠다 애쓰는 아들의 속마음을 아는 그이기에.

“중국, 중국 광저우의 반도체 회사를 인수할 겁니다. SA-철화 테크윈을 통해서요.”

“중국이라.”

“그렇게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을 따내면, SA 그룹의 역량은 한층 더 높아질 겁니다. 중국 반도체 회사도 분명 알짜배기가 되어….”

“그만. 그쯤 하면 되었다.”

갑자기 손을 들어 아들의 말을 끊는 임계현 회장.

분명… 뻔히 보이는 실패가도. 그러나 그는 이번만큼은 손에 쥔 고삐를 느슨하게 풀었다.

자신의 눈동자에 그려진 아들의 모습이, 석회벽에 여러 겹 덧칠한 유화처럼 금방이라도 스스로를 지워버릴 것만 같았기에.

“뜻대로 해 보거라. 그룹 차원에서 지원토록 하마.”

“아버지…?”

“네가 시작한 일이니 끝내는 것도 온전히 네가 해야겠지.”

얼떨떨한 얼굴의 임재호 부회장.

그것을 본 임계현 회장의 입가에는 씁쓸한 주름이 잡혔다.

이미 다 커버렸으나,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위로하기라도 하듯이.

“성과를 내라고는 하지 않으마. 그저 네가 많이 배우고 느끼면, 그것만으로도 이 애비는 족할 듯싶구나.”

“감사… 합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 되었으니 이만 나가 보거라. 피곤이 밀려오는 모양이다.”

끼익, 문의 금속제 경첩이 닫히고 자리에서 물러난 임재호 부회장.

적막감과 고요함.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이곳에서 임계현 회장이 허공에 대고 무어라 말을 내뱉었다.

“저 아이가… 홀로 끝맺음할 수 있게 놔둬.”

“회장님, 그 중국 반도체 회사는 <상하이 캐피탈>과도 관련이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만….”

병풍 뒤편에서 들려오는 탁한 목소리. 자신의 등을 믿고 맡긴 충복에게 SA 그룹의 작은 거인이 대답했다.

“괜찮다. 너무 큰 사건이 되기 전에만 고삐를 당기면 될 터이니.”

“그렇다면, 하루 단위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냥 그렇게 지켜보기만 허자고.”

팔락, 휠체어에 앉은 노인의 손끝에 닿는 흰 종이의 질감.

돋보기안경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임계현 회장은 한참을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침내, 모든 실마리를 종합한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어라 한숨 섞인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번 판에서 이득 보는 쪽은… 그 탄약그룹 한서준이 말고는 없게 생겼구먼.”

* * * *

중국, 광저우의 모 5성급 호텔.

항상 내가 어디 출장을 떠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나와 딱 붙어 다니던 김원철 아저씨는 오늘 함께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시킨 일이 워낙 많아서이기도 했거니와, 이번 출장에서는… 최대한 캐릭터가 강한 측이 있는 것은 빼는 편이 나았기에.

“저기… 회장님? 이건 도대체….”

대신, 이번 출장길에 나를 따라온 유세나 보좌관.

광저우 시내의 모 호텔 스위트룸. 침대 위에 올려진 물건들을 본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음을 던졌다.

“회장님, 이 가면들, 갑자기 꺼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일단 거기서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서 써보시면 됩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어디 보자.”

여행용 트렁크에서 꺼내진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수십 개의 가면.

하회탈이나 각시탈 같은, 뭔가 착용하고 나면 곧장 단소를 들고 독립운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것부터, 귀여운 호랑이나 토끼 가면까지.

고민에 빠진 유세나 보좌관에게 나는 대충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것을 건네며 말했다.

“토끼. 토끼 좋네요. 하얀색이 꼭 유세나 보좌관 느낌이기도 하고.”

“토끼… 제가 토끼를 닮은 건가요, 회장님?”

“네, 뭐. 인상은 얼추 닮았다고 봅니다. 일단 중요한 건 아니니, 딱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겠네요.”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이내 다시 위아래 입술을 맞닿는 유세나 보좌관.

얼굴 반쪽을 가리는 토끼 가면을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을 보니, 딱히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기에, 나는 대강 코앞에 있는 큼지막한 가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 그냥 이걸로 하죠. 튼튼하고 좋네.”

“그건 설마 딸기 모양… 하아, 진짜.”

빨간색 딸기 가면.

뭔가 탄약그룹의 상징인 불꽃하고도 닮아서 마음에 들기도 했다.

“저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어디 보자… 대충 사이즈도 딱 맞네요.”

딸기 가면을 쓰고 눈구멍으로 거울을 보니 제법 그럴듯한 모습.

뭔가 의사결정이나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아저씨 취향인 것이 정감이 가기도 하고.

“하아, 오늘따라 유독 김 비서실장님의 문화적 영향력이 밉네요.”

“네? 그게 무슨 말인 건지?”

“…아닙니다. 그, 일단 쓰고 계신 가면은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내뱉고서는 가면 더미를 뒤적거리는 유세나 보좌관.

무언가 적당한 것을 찾은 모양이었다. 대뜸 내게 회색빛 가면을 건네주는 그녀.

“딸기보다 차라리 이게 나을 겁니다. 무언가… 이택규 전 사장에 대한 단죄의 느낌도 있고요.”

“단죄, 단죄라.”

돌로 된 천사 조각상 같은 가면은 그 느낌이 사뭇 무거웠다.

기도하듯 감긴 눈. 그 밑에 세로로 죽 그어진 참회의 눈물 자국과 철로 된 가시면류관까지.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 보이는 위압감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죄지은 자 앞에 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마음에 드네요. 이걸로 하지요.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합시다.”

“저, 회장님. 어디로 가신다는 건지 아직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다만.”

“유세나 보좌관은 그냥 따라만 오면 됩니다. 그저 내 옆에서 시선만 끌어주시면 그걸로 충분하고요.”

오직 빨간 단색으로 된 옷이지만, 입는 사람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화려함이 돋보이는 드레스.

유세나 보좌관의 몸태가 잘 드러나는 그 옷에 하얀 토끼 가면이 귀엽게 올라가 있으니, 누가 봐도 매력적이라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딸각!

한쪽 손에 주사위 두 개를 쥐고서 맞물리듯 소리를 내는 나.

오래간만에 잡아본 주사위지만, 감각을 되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전, 지금의 삶으로 돌아오기 전. 꽉 막힌 교도소 내에서 심심풀이로 열린 내기판.

자잘한 간식 따위를 놓고 벌이던 주사위 게임은, 도박 따위 일절 모르던 내가 유일하게 잡기를 익힐 기회가 되었다.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감각은 대충 익었고… 이만하면 초보자 상대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네.”

“회장님?”

“아아, 아직 내가 유세나 보좌관 질문에 대답을 안 했네요.”

머리 위에 물음표 표시가 한가득인 유세나 보좌관.

아마 지금부터 본인이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면, 분명 놀랄 것이다.

무언가 저번 김범호 잠입 때부터 자꾸 고생만 시키는 듯한 묘한 느낌. 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가면 아래 숨기고는 입을 열었다.

“같은 호텔 바로 밑.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는 지하의 카지노로 갑니다. 신분을 숨긴 채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