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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84화 (84/300)

84화주사위 게임(1)

광저우, IT 산업단지.

서윤지와 약속했던 반도체 공장 기계의 수리 기한을 일주일이나 넘긴 지금.

이택규 전 사장은 새파랗게 어린 조카뻘 여자 앞에서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봐, 이택규 씨. 그쪽 두 달 전에 나한테 경례했던 거 기억은 나나?”

“기억… 하지요. 합니다요.”

“어찌어찌 기억은 하나 보네? 일을 그딴 식으로 하길래 아예 도룡뇽 대가리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봐?”

앞으로 한 달은 더 있어야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반도체 공장. 그렇기에, 총 책임자 역을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의 모습.

눈을 가늘게 흘긴 서윤지는 수십 명의 중국인 현장 인부들 앞에서 지휘봉으로 이택규 전 사장의 배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당신 그때 나한테 필승이라 했잖아? 반드시 이긴다며? 그런데, 지금 이딴 공장에서 일정 하나 못 맞추는 구더기가 뭘 어떻게 이긴다는 건가?”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지극히 모멸적인 촉감. 눈을 질끈 감은 이택규 전 사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릿속에서라도 서윤지를 두들겨 패는 것뿐이었다.

‘저, 저, 싹퉁머리 없는 계집년을 콱 씨! 아주 그냥 바리깡으로 대갈통 빡빡 밀어서 인천 앞바다에 빠트려 놓으면 소원이 없겄네!’

그러나 뇌내망상은 엄연히 머릿속에서 끝나야만 하는 법.

뒷짐 진 두 손을 꽉 주먹 쥔 이택규 전 사장. 그는 여전히 아랫배를 쿡쿡 찔러대는 지휘봉의 불쾌함에 애써 미소로 화답하며 입을 열었다.

“그… 기계 수리는 끝났는데, 현지 업체에서 설치 공사비 증액을 요구해서 말입니다.”

“하! 당신 진짜 머저리야? 배도 남산만큼 나온 인간이 그거 하나 못 휘어잡고 흔들려서….”

손을 올려 뒷자리에 수행비서를 부른 서윤지.

만년필로 몇 차례 서명을 마친 그녀는 이내 무언가 증서 비슷한 것을 이택규 전 사장에게 내밀었다.

“어음. 여기 현지 업체 새끼들한테 납기 맞추면 100% 지급, 아니면 절반밖에 못 가져간다 해.”

“아… 감, 감사합니다요, 대표님!”

직각 인사와 함께 내민 손. 그러나 텅 빈 두 손이 무색하게도 어음이 그 위에 얹어지는 일은 없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서히 목을 올린 이택규 전 사장.

곧이어 그의 양쪽 뺨에 느껴지는 감촉은 전혀 아프지는 않은, 그러나 너무나도 모멸적인 것이었다.

“잘하자. 응?”

“…….”

“대답 안 해?”

마치 부채질하듯, 그의 얼굴에 대고 양옆으로 어음 용지를 팔락거리는 서윤지.

미처 마르지 못한 만년필 잉크가 이택규 전 사장의 뺨에 조금씩 흔적을 남겼다.

그 자리에 모인, 수십 명의 아랫사람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표님.”

* * * *

-와장창!

“옘병하고 자빠졌네! 미친 또라이년이 진짜!”

일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이택규 전 사장.

다짜고짜 의자를 걷어찬 그는 벌겋게 부어오른 발목을 붙잡고 자신과의 닭싸움을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니미 개똥 같은! 끄흐으으… 드럽게 아프네, 진짜!”

“하이고, 행님아. 진정 좀 해라. 서윤지 고 기집아가 보통 미친년이가? 즈 남편에 내연남까지 싹 잡아다 묵어뿌는 년인데.”

얼굴이 홍당무가 된 이택규 전 사장의 어깨를 주무르는 백덕규.

SA-철화 테크윈의 사람인 그의 업무 중에는 이택규 전 사장이 일을 끝마치기 전에, 홧김에 그만두는 것을 막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백덕규는 호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따 자신의 영업 대상에게 건네었다.

“그냥, 다 팔자다, 팔자. 그래 생각하고 쫌만 참자. 알긋제?”

“니미, 아주 사주팔자가 꼬여도 어지간히 꼬여야지. 맘 같아서는 확 때려치우고 싶다야. 서윤지도 같이 때리면 더 좋고.”

홧김에 일을 때려치운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백덕규.

이대로라면 자신이 서윤지에게 약속받은 금액의 잔금 부분이 날아갈 상황.

불같은 이택규 전 사장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황급히 사탕발림 섞인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 행님아! 그라도 행님이 돈복은 있다. 결국에 그거 어음 울궈낸 거 아이가?”

탁자 위에 놓인, 하얀색 어음 한 장.

현지 중국 설치 업체에게 주어야 할 금액의 정확히 2배가 적힌 그 어음은, 이택규 전 사장이 일부러 공사 일정을 연기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반까이 하믄, 행님이 먹는 돈이 한국 돈으로다가 30억이다. 때리칠 때 때리치더라도, 돈은 먹고 때리치아야지.”

“후우, 그건 또 맞기는 헌디….”

방 안에서 피어나는 담배 향의 뭉게구름.

워낙 세기로 유명한 중국 담배 탓일까? 살짝 어지러운지 멍하니 눈을 흐리는 이택규 전 사장.

눈치 빠른 백덕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행님아. 거, 칙칙하게 예서 이러지 말고, 내리가 한판 땡기러 가자.”

“슬롯머신 땡겨 봐야 못 먹는 거. 인자 재미도 없어부러.”

“에헤이, 머신 말고, 그 있잖아. 그거.”

손바닥을 싹싹 비비는 시늉을 하는 백덕규.

회색빛 연기를 깊이 토해낸 이택규 전 사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니미, 계집년한테 털리고 인자 카드로 또 털리라고? 장희빈, 양공주 둘 다 손에 안 맞는다니까.”

“카드 말고, 주사위!”

“주사위…?”

그제야 비로소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이택규 전 사장.

괜히 고민한답시고 찬장에 있는 위스키를 꺼내 홀짝이던 그가, 잡고 있던 폼을 풀어버린 것은 뒤이은 백덕규의 말 한마디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하모! 내 저번에 한 번 말했다 아이가. 그… 졸부 한 명하고 몸매 하나는 기깔나는 가스나 하나 같이 댕긴다꼬.”

* * * *

그 시각, 서울.

환한 보름달 빛에 지지 않겠다는 양, 늦은 밤에도 낮처럼 불을 밝힌 탄약그룹 본사 빌딩.

이는 비단 저층의 실무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꼭대기에 가까운 고위 임원들의 집무실 역시 낮밤을 구분하지 않는 상황.

“으메, 뭔 일이 이렇게 많은 것이다냐. 사람 잡겄네 아주.”

“자네 평소에 바쁜 척은 다 하면서, 이 정도 일에 쩔쩔매는 겐가?”

쌓인 문서 앞에 항복의 표시로 양 손바닥을 든 김원철 비서실장.

그런 그를 옆자리에 끼고 있는 양택수 부회장은 괜시래 입가에 웃음을 짓고는 작은 타박을 주었다.

“아, 바쁜 척은요. 우리 회장님 가시는 길에 꽃길 깔아드리는 게 얼마나 힘든디.”

“되었네. 어서 그룹 구조 개혁안 결재 올라온 것이나 좀 보게나.”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다시 시작된 업무.

그러나 오늘 임자를 잘못 만난 대머리 비서실장은 이미 탈진한 모양이었다. 쓰러지듯 책상 위에 몸을 엎드린 김원철.

휑하니 텅 빈 이마에 반사된 전등 불빛이 괜히 거울에 비쳐 반짝일 때쯤, 엎어진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 회장님은 지금쯤 뭘 할라나? 유세나 보좌관 데리고 카지노 가서 아주… 히야, 부럽다. 부러워.”

“허어, 김원철이 이 사람 참. 무슨 회장님이 카지노를 간단 말인가.”

양복 상의 목깃을 잡고는, 책상에 엎어져 있던 김원철을 일으킨 양택수 부회장.

갑자기 압박을 받게 된 경동맥 탓에 숨을 컥컥거리는 김원철의 반응 따위야 신경조차 쓰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켁, 켁. 아, 놓고 말하세요. 쫌.”

“내 회장님이 어린 시절부터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잡기에 능하신 분은 아닐세. 분명 다른 업무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으실 터.”

“그게,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걸랑요. 막 도박 이런 거 싫어하는 바른생활 어른이로. 근데 막상 겪어 보니까….”

엉킨 넥타이를 아예 풀어버리는 김원철.

그는 얼마 전, 갑자기 종이컵 안에 달그락거리는 무언가를 들고 온 회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볍게 식사 내기나 하자며 짓던 회장의 웃음.

그러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천진난만해 보이는 웃음은 먹이를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던 독사의 모습과 같았다는 것을.

“무지하게 잘해요.”

“카드를… 배우신 겐가?”

“아니, 아니. 카드가 아니라. 그 뭐냐. 어디서 배운 건진 몰라도 말입니다.”

달그락, 책상 서랍을 연 김원철이 조금 커다란 종이컵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든, 1부터 6까지의 눈이 그려진 주사위 세 개와 함께.

“주사위. 주사위 하나는 기가 멕히게 잘합디다. 제가요, 언제 한번 붙었다가 빤쓰 속까지 싹 털렸걸랑요.”

* * * *

“어서 오십시오. 오늘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는 카지노 웨이터. 가면을 쓴 나는, 말없이 지갑을 열어 빳빳한 초록색 달러 몇 장을 팁으로 주었다.

최근 일주일간 호텔 지하 카지노에서 먹고 자는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보낸 나. 그리고 유세나 보좌관.

곧바로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주사위 전용 룸. 그 큰 방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오늘. 이택규 전 사장이 올 겁니다.”

탄약그룹 본사에서 만들어낸 해외 정보 조직.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다름 아닌 이택규 전 사장을 이 자리로 불러오는 것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 녹색의 매끈매끈한 천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보다 신규 정보 조직의 역량이 기대할 만하더군요. 고작 일주일 만에 목표물을 여기까지 끌어오게 하다니.”

“회장님도 다른 의미로 역량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제게 이런 기술도 익히게 하시고.”

“절반은 유세나 보좌관 재능입니다.”

귀여운 토끼 가면을 쓴 채, 몸에 딱 맞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유세나 보좌관.

컵 입구를 손으로 막은 그녀는 크게 세 번, 짧게 다섯 번을 흔들고는 안에 들어있던 주사위를 테이블 위에 쏟아냈다.

-달그락!

나비처럼 유연하게 똑 떨어진 유세나 보좌관의 몸짓. 이내 시선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주사위 세 개를 향했다.

“5, 4, 6. 합이 15. 이 정도면… 유세나 보좌관 혼자서 해도 충분하겠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한두 번은 만들어도 연이어서 하는 건 못 합니다. 그나저나.”

조금 부끄러운 듯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유세나 보좌관.

다시 주사위를 집어 컵에 담은 그녀는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물음을 던졌다.

“회장님은 도대체 이걸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아주 오래전… 다른 세상에서 배웠다, 정도만 말하겠습니다.”

다른 세상.

교도소 담장 안쪽에서 배웠던 잡기. 별의별 희한한 사람들로 가득 찼던 그곳에서 심심풀이로 배웠던 주사위 기술을 써먹게 될 줄이야.

“하긴, 누가 다시 돌아올 거라 꿈에라도 알았겠냐만은.”

손바닥 안에 들어온 세 개의 주사위. 손아귀를 꽉 움켜쥔 나는 그 촉감을 생생히 느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유세나 보좌관에게 말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보도록 하죠. 탄약그룹을 위한 호구가 슬슬 들어올 시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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