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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85화 (85/300)

85화주사위 게임(2)

광저우 호텔 지하 카지노.

오늘, 이택규 전 사장은 입구에 놓여 반짝거리는 불빛으로 자신을 유혹하던 슬롯머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을 천천히 걸어, 가장 깊숙한 방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

비록 카지노에는 거울은 없었으나, 들고 있는 유리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으로도 이택규 전 사장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 이제까지 겪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두근거림이,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여기부터는 두 분 모두 가면을 착용하셔야 합니다.”

“가만있어 보슈. 내 가지고 왔으니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류 가방에서 가면 두 개를 꺼낸 이택규 전 사장.

“어디 보자. 흐음….”

산양과 뱀.

전혀 다른 두 개의 가면을 각기 손에 올린 채, 고민에 빠진 그의 모습.

천칭 저울을 든 심판관 조각상이라도 된 듯, 이택규 전 사장은 그 자리에 선 채로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행님아, 뭘 또 고민하노? 그냥 산양 해라, 산양.”

“왜 하필 산양인디?”

“바위틈에 발 디디면, 산꼭대기까지 쑥쑥 올라가는 거이 산양 아이가? 그라고 내는 오늘 뱀이 좋다.”

양 손바닥을 모아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흉내를 내는 백덕규.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꿀렁거리던 그의 손은 갑자기 쩍 벌어짐과 함께, 어느새 먹이를 향해 송곳니를 들이대는 독사 한 마리가 되었다.

“몰래 숨어가 바로 다른 연놈들 발모가지를 콱! 물어뜯을 끼다. 흐흐흐.”

“물어뜯긴, 무슨… 거, 끗발도 영 시원찮은 사람이.”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었으나, 동물 가면이 상징하는 것들이 사뭇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이택규 전 사장.

하늘 높은 곳을 향해 바위산을 타고 솟아오르는 산양.

탄약 전자에서 퇴출당한 후, 기껏 광저우까지 와서 조카뻘인 서윤지에게 수모나 당했던 그였다.

그러나… 이 산양 가면을 쓰고 도박사의 모습을 한 그의 자신감은, 맨얼굴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산양, 산양… 그래. 이걸로 하자. 뛰어오를 때가 되긴 했나보네잉. 거, 딜러 양반. 인자 슬슬 드갑시다.”

* * * *

방안은 넓었다.

천장 샹들리에에서 비치는 화려한 조명,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 묘하게 풍겨오는 백단향.

그곳에는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흐미… 별천지네, 별천지여. 거기다가 저 토끼 가면 여자는 무슨 모델 같은 거 하다 온 사람이다냐.”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토끼 가면 여자를 보고는 침을 질질 흘리는 이택규 전 사장.

가면 아래에 감춘 본모습이 엄청난 미인이라는 점은, 굳이 다른 증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특히나, 뭔가… 묘하게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는 느낌은 그를 더욱 자극하는 요소였다.

“근디 저 여자 어디서… 봤었나?”

“행님아, 그기 무신 쌍팔년도 작업 멘트고?”

“얌마, 작업이 아니라, 실제로 좀 느낌이 그렇다 이 말이여.”

“하이고, 돈 다 따고서 명함 하나 스윽 뿌리든가. 그라고 저기 저 으스스하게 생겨 먹은 천사 가면, 점마. 저거.”

토끼 가면 여자 옆에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목례하는 남자.

이마 자락에 둘러쓴 가시 면류관과 붉은 눈물 자국까지.

그가 쓰고 있는 무채색의 천사 가면은 약간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치… 자신과 대놓고 적대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저거? 저 친구는 좀 촉이 더럽다야. 저 천사는 뭐 하는 놈인디?”

“호구다. 그것도 상호구. 낄낄낄.”

“호구? 저게?”

눈 한쪽을 찌푸리는 이택규 전 사장.

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는, 당장 도망치라는 느낌과 정반대의 평가.

“한 일주일 동안 예서 꼴은 돈이 대충… 50억 원은 된다카데? 그래도 좋다꼬 실실 웃어 싼다.”

“졸부집 막내아들 뭐 그런 건가?”

그 어떤 말 한마디 없이 주사위 게임에만 집중하는 어수룩한 모습.

현재 진행 중인 판.

천사 가면 남자는 주사위가 컵을 요란 법석을 떨며 흔들더니, 이내 기세 좋게 테이블 위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타닥, 탁, 탁!

자기들끼리 부딪히기를 거듭한 주사위 세 개.

바로 옆, 산더미같이 쌓인 칩을 병풍 삼아 재주를 부리던 주사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는 얌전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울려 퍼지는 달러의 정갈한 목소리.

“3! 1! 4! 천사 가면의 신사분께서 던지신 주사위의 합은 8입니다. 이번 게임의 승자는 하마 가면의 숙녀분이십니다!”

“어머! 어머! 이게 웬일이래! 고작 10으로 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뚱뚱한 백인 여성 두 사람. 그녀들은 한화로 7억 원 정도의 칩을 자기 앞으로 당겼다.

터지는 환호성과 웃음소리.

추가로 게임을 더 할 것이냐는 딜러의 물음에, 하마 가면 여자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이거면 충분해요. 천사 가면 신사분이 잃으신 거, 다시 토끼 가면 숙녀분이 따 가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안 그래, 언니?”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이익 봤을 때 얼른 나가야겠어. 오홍홍, 저흰 이제 가볼게요. 잘 놀았어요.”

박수갈채와 함께 퇴장하는 두 사람.

토끼 가면 여자는 화가 났는지 허리 위에 두 손을 올리고는, 천사 가면 남자에게 무어라 타박을 주고 있었다.

홀린 듯, 이택규 전 사장이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자,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백덕규.

“봤제? 점마 저거 드럽게 못한다 아이가.”

“한 판에 7억…! 저, 저 호구 새끼 좀 보소. 그 돈을 꼴고서 좋다고 히죽대잖아? 아주 돈이 썩어나나 봐?”

“흐흐흐. 그니까 호구제. 대박 아이가? 오늘 큰 거 한방 해 보는 기라.”

꿀꺽,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키는 이택규 전 사장.

탐욕이라는 샘물을 마신 산양은 발굽에 힘을 주어 바위산을 향해 도움닫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황량해진 테이블 앞으로 걸어간 그의 모습.

시선은 토끼 가면 여자에게, 그러나 손은 천사 가면 남자에게 내민 이택규 전 사장이 입을 열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주사위 게임 좋아하시나 본데. 어떻게, 저희하고도 같이 한판 즐겨볼까요?”

* * * *

오래간만에 본 이택규 전 사장의 눈빛은 퀭해 보였다.

열정이나 총명함이 모두 사라져 버린, 수렁에 빠진 배신자의 눈빛.

뿔 달린 산양 가면을 쓴 그는, 도박이라는 가로등 불을 향해 온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저 그것이 하늘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인 줄로만 안 채.

“회장님. 정말 그 작전대로 가도 되겠습니까? 한두 판 정도는 이택규 사장의 실력을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상대와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 끄트머리. 유세나 보좌관은 다른 이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내게 귀엣말로 작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내게 건넨 말은 일견 타당했다. 어디까지나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도박판의 경우일 때에 한해서.

“자, 자. 후딱들 합시다잉. 규칙은 2대2. 주사위는 아까 전처럼 세 개 그대로 가시고, 맞지요?”

미처 가리지 못한 입가에 지어진, 이택규 전 사장의 벌건 웃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 아집과 탐욕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를 탄약 전자 구성원 모두에게 강요한 그 아집.

그리고 이곳 광저우까지 건너가 이제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배반한 탐욕.

그렇기에 더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앞으로 펼쳐질 광경. 나는 손가락으로 유세나 보좌관의 토끼 귀를 집어 들고는 작게 속삭였다.

“그대로 갑니다. 애초 작전대로.”

“회장님….”

“저렇게 환상에 홀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정석대로만 가도 무방하니까요. 내가 선을 잡겠습니다.”

쭈뼛거리는 유세나 보좌관을 뒤로하고, 곧장 테이블 앞으로 나선 나.

나는 평소보다 훨씬 내리 깐 목소리 톤에, 딜러에게 일부러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했다.

“순서는 내 쪽에서 먼저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선을 잡겠다는 말에 이택규 전 사장의 눈치를 보는 딜러. 이내 들려오는 심드렁한 목소리에 순서는 금방 정해졌다.

“뭐, 그쪽 멋대로 하슈.”

이어지는 베팅 규칙에 대한 설명.

차분한 집사 스타일의 딜러가 분란의 여지조차 만들지 않도록 천천히 이야기를 끝마치자, 비로소 내 손에는 컵 하나와 주사위 세 개가 들어왔다.

상대 쪽에서 나온 주자는 이택규 전 사장.

탄약 전자의 개망나니이자… 탄약그룹 내의 공학 인재들을 이곳 광저우로 유출한 사람.

왠지 모르게 잘 어울려 보이는, 뿔 달린 산양 가면을 쓴 그는 내게 베팅을 하라며 가볍게 손짓했다.

“자, 첫판이고 하니 가볍게 갑시다. 가볍게. 흐흐흐.”

“글쎄요.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어, 너무 가벼운 금액은 부싯돌 노릇조차 못 할 겁니다. 그렇기에.”

내 옆자리, 높은 산봉우리처럼 쌓여 있는 칩.

그중, 열 개씩 묶인, 개당 약 1,000만 원 정도의 가치를 가진 붉은 칩 다섯 줄이 순식간에 테이블 중앙을 향해 밀어 넣어졌다.

“5억 원! 붉은 칩 50개, 먼저 묻고 가겠습니다.”

* * * *

“행… 행님아. 어떻게 할 끼가? 5억이믄 거의 행님 전 재산 아잉교?”

“…가만있어 봐. 생각 좀 허자.”

다짜고짜 질러댄 5억 원이라는 베팅.

이택규 전 사장은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일 터였다. 다이(Die)를 외치며 게임을 포기하는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돈 1,000만 원가량이 날아가는 것이니.

거기에 어수룩함을 연기한 내 모습은 그의 이성을 잃은 탐욕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어서 따라와 달콤한 과실을 꼭지째로 따 먹으라고.

“…따라간다.”

“행님, 진짜가?”

“그랴. 그럼 가짜로 가겄냐? 어차피… 여차하면 서윤지 그년한테 받은 어음 쪼가리. 거기서 좀 더 떼먹으면 그만이여.”

양쪽 눈을 전부 찌푸린 이택규 전 사장.

정신이 거부하는 행동을 강제로 하는 것인 양, 그는 시선을 돌린 채 열 개짜리 붉은색 칩 다섯 줄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에라 모르겠다. 못 먹으면 죽는 거지. 콜!”

베팅 사인과 동시에 올려진 내 양팔.

나는 잘 정렬된 주사위를 컵 안에 넣고 크게 일곱 번, 작게 다섯 번을 흔들며 생각했다.

이번 판은… 돈을 따기 위한 판이 아니다.

이택규 사장의 욕망 그 자체에 작은 불씨 하나를 놓는 것일 뿐.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손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상황.

그렇게 녹색 천이 깔린 테이블을 바라보며 주사위를 흔드는 그 순간, 내 손끝에 곧바로 촉이 왔다.

원하는 숫자가 얼추 비슷한 정도로 조합되었다는 그 느낌이.

“바로 지금!”

달그락, 곧바로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쳐진 세 개의 주사위.

제멋대로 굴러가는 듯한 백색의 정육면체는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 그대로 그곳에 멈추었다.

뿔 달린 산양이 홀린 듯 발굽을 디딜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이는, 묘한 숫자를 뽐내며.

“이야…! 이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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